필리핀 동전 1페소를 한국자판기에 넣으면?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⑨] 화폐 이야기... 500페소 지폐 속에 한국이 들어있다

등록 2011.10.06 18:08수정 2011.10.2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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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국제공항에 있는 니노이 아키노의 동상. 마닐라 국제공항의 이름을 아키노의 애칭을 붙여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Ninoy Aquino International Airport(NAIA)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조수영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한국과 필리핀은 지금과는 정말 많이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67달러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지만, 필리핀은 국민소득이 195달러에 달하는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한국전쟁 때에는 전투부대를 파병시켜 위기의 한국을 도운 우방국이기도 합니다. 후에 필리핀 민주화의 영웅이 된 니노이 아키노도 당시 필리핀 최대 일간지인 <마닐라 타임스>의 종군기자로 한국전에 참전했는데, 귀국 후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 KOREA >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정계에 입문하여 민주정치를 상징하는 젊은 지도자로 급부상한 아키노는 마르코스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계엄령에 따라 3년을 복역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필리핀으로 돌아온 아키노는 마닐라 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다가 괴한의 총탄에 암살되었습니다. 독재자 마르코스 정부는 범인과의 연관성을 부인하였지만 국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고스란히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습니다.

아키노의 장례식에는 수백만 군중이 몰려들어 마르코스를 규탄했고, 이는 필리핀 민주화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피플 파워'라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지속되었고, 마르코스와 그의 사치스러운 부인 이멜다는 미국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국민의 힘으로 이룬 무혈혁명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자부심은 아키노에 대한 무한한 존경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도 마닐라 국제공항을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NAIA)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한 필리핀 대통령들... 지폐에 새겨진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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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이 아키노의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이 된 코리는 남편의 초상화가 실린 500페소짜리 지폐를 발행하였습니다. ⓒ 조수영


반 마르코스 열풍은 니노이 아키노의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필리핀 사람들은 '코리'라는 애칭으로 부릅니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대통령이 된 코리는 남편의 초상화가 실린 500페소짜리 지폐를 발행하였습니다. 한국 돈으로 1만2000원에 해당하는 고액권인 500페소짜리 지폐 뒷면에는 전투복 차림의 아키노와 그가 종군기자로 활약할 때 쓴 기사, '제1사단이 칼로 베듯 38선을 진격한다.(1st Cav knifes through 38)'와 함께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Korea', 'Seoul', 'Kaesong(g가 짤렸지만 개성)'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는 그 당시 절박한 한국 실상을 반영하듯, 외국 군인들에게 '꽃 파는 한국 소녀, 구걸하는 한국 소년' 그림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필리핀 정부가 한국전쟁을 기념하여 발행한 지폐는 아니고 필리핀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는 아키노 상원의원을 기리는 것이지만, 그가 한국전쟁에 종군 기자로 참전한 것이 그의 생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코라손 아키노에 이어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피델 라모스(1992년~1998년 재임) 또한 한국전쟁에 참전해 철원 인근의 전투에서 정찰수색대 소대장으로 전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라모스는 대통령 시절에 한국과의 유대를 훨씬 돈독하게 다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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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lipino is worth dying for. (필리핀인은 자신이 믿는 옳은 명분과 조국을 위해 죽을 가치가 있다), 니노이 아키노가 미국 망명을 끝내고 조국 필리핀으로 돌아가려 하자 측근들이 암살위험을 이유로 만류할 때 한 말로서, 500페소 지폐 앞면에 니노이와 함께 인쇄되어 있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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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500페소 뒷면에서 한국, 서울, 개성, 38선을 찾아보세요. 500페소 뒷면에는 왼쪽 아래 6.25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아키노의 사진과 함께 그가 쓴 기사가 있습니다. ⓒ 조수영


자신의 취임식 장면을 지폐에 넣은 아로요 대통령

필리핀 대통령들의 지폐 사랑은 계속됩니다. 2001년 대통령에 취임한 글로리아 아로요는 이전에 없던 200페소짜리 지폐를 만들면서 앞면에는 자신의 아버지(이 아버지도 전 대통령이었습니다)의 초상을 넣고, 뒷면에는 자신이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을 넣었습니다. 재임 중에 온 국민이 쓰는 지폐에 떡하니 자신의 모습을 넣는 대담함, 그 가치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100페소나 500페소와 달리 200페소짜리는 잘 쓰이지 않고, 다른 지폐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어간 대통령 아버지의 초상화(업적이 없으니 배경도 횅합니다)를 볼 때마다 부담스럽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극진한 사랑과 자신의 모습을 화폐에 남기고 싶은 욕망이 탄생시킨 실용성 없는 화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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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페소 지폐는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2001~2010 재임)가 대통령 재임당시에 만들었는데 앞면에는 아버지초상을, 뒷면에는 비리혐의로 전직 에스트라다대통령을 몰아내자는 People Power 2에서 길거리에서 신부 앞에서 당시 부통령인 아로요가 대통령직을 대행한다는 선서를 하는 그림을 넣어서 발행되었습니다. ⓒ 조수영


부모와 아들이 한 지폐에... 필리핀 대통령들의 '지폐 사랑'

아로요에 이어 2010년에는 노이노이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이 취임하였습니다. '아키노'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500페소 주인공인 니노이 아키노와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사이의 아들입니다. 이로써 필리핀에는 세계사에 보기 드문 '모자' 대통령이 탄생하였습니다. 취임한 지 1년 후 노이노이는 새로운 지폐의 탄생을 발표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등장인물을 보면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200페소 지폐에서 직전 대통령인 아로요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예 없애긴 좀 그랬는지 거의 보이지 않을 크기로 줄여서 숫자 뒤로 숨겨버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앞면의 아로요 아버지 초상 또한 부담스러웠던 얼굴 사이즈를 대폭 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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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신권 500페소에는 현 대통령의 아버지, 어머니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현 대통령인 아들의 친필서명까지. 세계 최초로 세 명의 한 가족이 들어간 지폐가 탄생하였습니다. ⓒ 조수영


50대 노총각 노이노이 대통령의 최대 걸작은 500페소 지폐입니다. 부모님의 최대 업적인 피플파워 장면을 배경으로 아버지인 니노이 아키노와 함께 어머니인 코라손 아키노의 초상을 넣었습니다. 그 옆에 현 대통령인 아들의 친필 서명이 있습니다. 이로써 세계 최초로 세 명의 한 가족이 들어간 지폐가 탄생하였습니다.

뉴스에도 새로운 화폐를 받은 대통령이 웃음을 지으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두 부모와 그의 아들이 한 지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아들로서, 그리고 필리핀의 국민으로서 나를 기쁘게 한다. 이것은 우리들을 위한 그들의 희생과 국가에 대한 사랑을 증언하는 것이다"는 내용을 대서특필하였습니다.

필리핀 대통령의 대단한 지폐 사랑, 어쩌면 조만간 지금의 아키노 대통령의 초상이 떡 걸린 1000페소짜리 지폐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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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가 없다면 어려움도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포스터에 등장한 대통령 196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이 필리핀을 방문해 식량 원조를 요청했다는 기록은 사실 우리에게는 '정말 그랬을까'하는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우리의 목표 중에 하나가 필리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반세기전의 상황과는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들의 원조를 받아 '최초'의 실내체육관을 지었던 한국은 이제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고, 그 도움의 '주체'였던 필리핀은 어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변해버렸지만 그래도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지금같지 않았다는 것과, 우리가 언제처럼 지금 같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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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지폐에 그려져 있는 위인들을 모두 아는 외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하지만 필리핀 지폐 속의 인물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 3대 정치 가문(아키노 가문, 마카파갈 가문, 마르코스 가문)의 얽히고설킨 애증의 관계만 안다면 말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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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동전 ⓒ 조수영



#필리핀 지폐 #필리핀 대통령 #노이노이 #500페소 #니노이아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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