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원 '선불제' 책방... 본전 생각 안 나요

인문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 "수많은 인연 만든 곳, 절대 문 안 닫아요"

등록 2011.11.12 14:36수정 2011.11.1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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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풍경 사회과학도서전문점답게 '맑스주의'가 눈에 띈다. ⓒ 강혜란

언제부턴가 우리는 '서점'에 간다. 대형서점에 들러 책을 읽고 책을 산다. '서점'에서 책 사기는 당연하다. 그런데 무언가 아쉽다. 책의 향기를 맡기 이전에 많은 사람들에 치이기 십상이다. 물론 책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꽉 찰 수도 있겠다. 하지만 깔끔하고 넓은 서점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노라면, 가끔은 마트에 들른 듯한 착각을 할 때가 있다. 책을 한 권 사는 것이 마트에서 휴지를 사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책방'에 들렀다. 서점보다 훨씬 더 정이 묻어난다. 그것도 20년이 넘은, 인문사회과학도서들만 취급하는, 역사가 흐르는 책방으로 갔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벽에 기대어 느긋하게 책을 읽는 학생의 모습이 눈에 띈다. 구석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주인부부의 모습이 정겹다.


서울대 근처 신림동에 위치한 책방 '그날이 오면'은 꽤 유명하다. 우리 사회와 함께 흘러온 역사 때문이다. 1990년에 김동운·유정희 부부가 책방을 인수한 이후 이 책방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또, 수많은 인연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책을 고르고 계산한 후 조심스레 이 책방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나 청했다. 대형 서점의 카운터 앞에서라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9월 말의 일이다.

'그날이 오면'에서 만들어진 인연들

"우리는 원래 노동운동을 했어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생활이 힘들었죠. 생활방편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까지 했던 활동과 무관한 걸 하고 싶진 않았어요. 무언가 연관성을 가지며 동시에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거죠."

우연히, 아주 우연히 주변 지인의 소개로 책방을 열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평소 주인 부부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사상이 자연스레 이 책방으로 인도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책방에서는 재미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서울대 학생들과의 인연, 비전향 장기수와의 인연, 감옥에 갔던 어느 날 등. 유정희씨는 가장 먼저 감옥에 갔던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97년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죠. 국가보안법 7조 5항 '이적 도서 소지' 위반으로요. 그 때 닭장차를 타고 법원에 갔어요. 그런데 호송되는 와중에 이 서점에 단골로 오는 학생이 같이 탄 거예요. 그 학생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상태였어요. 조사를 받고 나가게 됐어요.


그 학생에게 나가게 됐다고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면회를 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꼭 . 그래서 책 두권을 들고 면회를 갔죠. 그 때의 인연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어요. '그날이 오면' 홈페이지에 오준호의 맑써라 맑써' 게시판을 그 때 그 학생이 운영하고 있거든요. 이 닭장차 타고 같이 조사받아서 만들어진 인연이죠."

오준호씨 외에도 책방을 통해 맺은 인연은 많다. 그리고 모든 인연이 다 특별하다. 97년 유정희씨의 구속소식이 서울대 내에 알려지면서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400명이 넘는 서울대 학생들이 책방 앞 거리에서 '유정희를 석방하라'를 외쳤다.

"그 때 여기서 사회 봤던 학생이 내가 98년도에 구의원 선거나갈 적에 사무장을 해줬어요. 그 땐 학생이었거든요. 2002년도에는 직장인이어서 못 도와준다고, 미안하다고 후원해 줬어요. 기자였는데, 내가 구의원 활동하면서 '도림천 살리기'를 하니까 취재도 나와주고."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산실 '그날이 오면'

학생들이 그렇게 시위를 연 후 부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책방을 닫지 않겠다고 다짐했단다. 그리고 더 많은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책방 운영을 넘어서 학생들이 모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었다. 서점 2층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모임공간을 열었다. 그곳은 카페면서 동시에 사랑방이었다.

"한 달 간격으로 미네르바의 이야기마당이라고 해서 세미나 같은 것을 열었어요. 그 당시 파리에서 홍세화 선생님이 잠시 들렀을 때 모시고 학생들과 대화하는 자리도 가졌었고요. 조치 카치아피카스라는 <신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책을 낸, 68혁명과 광주 민주화운동을 비교연구한 학자를 초청하기도 했었어요.

그 외에도 뭐 다녀간 사람들 많죠. 김동춘 교수, 비전향 장기수였던 강용주씨 등이요. 일상적으로 학생들의 세미나를 위해서 만든 공간이었지만 이야기마당을 통해서 학생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강연회나 토론회를 했었어요. 그 때를 학생들이 많이 기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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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용 그날에서 책읽기 한 때 책방에서 만들었던 소식지 '그날에서 책읽기' ⓒ 강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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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부부의 모습 이 곳을 거쳐 만화가가 된 김태권씨의 학생시절 만화를 보여주고 있다. ⓒ 강혜란

비록 재정난으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문을 닫았지만 학생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준 고마운 곳이라고 주인 내외와 학생들은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과 <그날에서 책읽기>라는 책을 낸 기억도 아련한 듯 회상한다.

<그날에서 책읽기>는 이 책방에서 추천하는 책 소개글을 싣거나 학생들의 글을 실었던 일종의 책방 소식지였다. 그곳에서 또 많은 인연이 맺어졌다. 유정희씨는 조금은 빛바랜, 그 책을 들고와 자랑스레 펼쳐보였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라는 책을 아세요? 그 친구가 학생 시절에 여기에 만화를 그렸어요. 아마 서울대 미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었을 거예요. 그 때부터 만화에 관심과 재능이 있었죠. 이 그림 보이시죠? 이렇게 여기서 습작의 시기에 거쳐 만화가의 반열에 오른 거죠. 하하."

맺어진 많은 인연들이 지금도 <그날이 오면>을 운영하는 힘이 된다. 그때 그 학생들이 후원회를 결성해서 재정난으로 힘든 서점의 경영을 돕고 있다. 책읽기 회원에 가입한 이들은 매달 10만 원을 먼저 예치시키고 책을 사간다.

동네책방이 살아남기 어려운 지금,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고마운 사람들의 힘을 받아 또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 최근 온라인 서점을 문을 열었고 책 판매수익의 3%를 양심수를 후원하는 일에 사용한다.


"온라인 서점을 열기 이전에 양심수를 위한 도서기부를 한 적이 있어요. 그 당시 알고 있던 몇몇 양심수 분들에게 책을 보냈었죠. 온라인 서점을 열면서 후원을 또 해보자 생각했어요. 액수 자체를 크게 기부해 보진 못했지만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서 책을 보냈죠.

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책을 보내요. 대략 8명에서 9명 정도가 쭉 유지가 되더라고요. 들어갔다 나왔다 하니까. 보낸 책으로는 <사회적 공공성>, <내 청춘의 감옥>, <분노하라> 등이 있어요. 고맙다고 편지가 오더라고요."


마침 그 양심수들 중에는 이 책방에 들른 적이 있다는 서울대생도 있었다. 그 중 한 명인 명진씨는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멀리서나마 맺어진 소중한 인연이다. 더 많은 기부를 하고 싶지만 못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어려운 책방 사정에도 새로운 인연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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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수들의 편지 책을 후원받은 양심수들이 고맙다는 편지를 '그날이 오면'에 전해온다. ⓒ 강혜란


사실 온라인 서점 매출이 크지가 않다. 그래서 기부액을 더 늘리기가 쉽지 않다. 서점의 유지조차 힘든 상황이다.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책방의 주인은 또 다른 인연을 꿈꾼다. 유정희씨는 여유가 된다면 '그날이 오면' 장학제도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기금을 만들고 싶어요. 펀드를 만들어 그 이자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으면 해요. 왜 삼성장학생이다 뭐다 말이 많았잖아요.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학생들의, 또 다른 의미의 '그날이 오면' 장학생을 만드는 거죠. 아직 구체적인 것은 없어요. 바람이죠, 하하."

결국은 모든 일들이 어쩔 수 없이 경제적인 것과 연결된다. 어려운 책방 상황에 할 말이 많다. 후원회의 도움으로 겨우 월세 정도는 해결이 되지만 일단은 책이 더 팔려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대형서점들이 도서정가제를 잘 지키지 않는 상황에서 이 책방이 맞설 힘이 부족하다.

그래도 이 책방이 문 닫을 일은 없어 보인다. 절대 문을 닫지 않겠다는 주인 내외의 의지보다도, 이들과 인연을 맺고 있는, <그날이 오면>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정리하는 차에 책을 사가는 학생과 주인부부가 정답게 인사를 나눈다. 책방을 나오는데 마음이 따뜻하다. 이야기를 듣는, 책을 사는 게 아니라 고르고 나오는, 그리고 주인 부부와 인사하고 나오는 그 시간들 때문에.

덧붙이는 글 | 강혜란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 '오마이 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강혜란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 '오마이 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양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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