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보다 더 위대한 흰 고래 '모비딕'

[고래 이야기③] 대곡리 반구대~울산만 장생포

등록 2011.10.13 18:39수정 2011.10.1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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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경선 진양호 장생포 부두에 전시되어 있다. ⓒ 김갑수


미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로 회자되는 <모비딕>은 허먼 멜빌이 1851년에 쓴 것이다. 이 소설은 머리가 흰 거대한 고래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물어뜯긴 포경선장 에이해브의 복수극을 담고 있다.

포경선 피쿼드 호의 선장 에이해브는 고래에 대한 적개심으로 동료들의 충고도 아랑곳 않고 모비딕을 찾아 대서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까지 항해를 계속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돌연 모비딕이 나타나 사흘간이나 사투를 벌이던 끝에 에이해브는 작살을 명중시켰으나 돌연 상상 밖으로 분노한 고래에게 끌려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배도 침몰하여 수십 명의 선원도 함께 몰사한다. 

한때 포경선을 탄 경험이 있는 작가 허먼 멜빌은 인간이 작은 배를 타고 창과 작살을 무기로 거대한 고래와 싸우는 광경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했다. 1851년 발표 이후 전혀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한 세기 이상이나 지난 20세기에 들어서야 재평가되었다. 이 소설은 웅장하고 격조 높은 서사시적 산문으로 시종일관된다. 한국에 완역본이 소개된 것은 1959년인데, 최근 작가정신사에서 김석희 번역으로 나온 단행본은 820쪽 분량이다. 

고래에 대한 인간의 집요한 적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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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포 1910년대부터 해방 이후까지 이 포구로 포경선이 들락거렸다. ⓒ 김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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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포 고래문화특구 고래 조형물 조형물 너머 건물이 고래연구소다 ⓒ 김갑수


<모비딕>은 인간과 고래의 근연적 관계와 적대적 관계를 동시에 담고 있는 담론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런데 고래를 상대로 한 인간의 복수극은 처절한 실패로 파국을 맞는다. 에이해브뿐 아니라 수십 명의 포경선원들이 함께 목숨을 잃는다.

살아남는 이는 오직 한 사람, 이야기의 서사적 임무를 맡은, 즉 이야기의 전말을 독자에게 전달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서술자 이슈메일뿐이다. 이슈메일은 <바이블>에 나오는 유대인의 시조 아브라함이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영어식 발음이다. 그런데 차후 아내에게서도 새로 아들이 태어난다. 그러자 하녀와 그 자식은 사막으로 추방된다. 요컨대 이슈메일은 주류 기독교 사회에서 추방된 인물인 셈이다. 

고래에 관한 한, 과거는 물론 미래에도 한사코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엄청난 고래 담론에는, 첫째 인간과 고래의 근연성, 둘째 고래에 대한 인간의 적개심, 셋째 인간에 대한 고래의 분노심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중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하지만 우리가 뱃전 너머로 바다 속을 들여다 보니, 수면에 펼쳐진 이 놀라운 세계 밑에는 더욱 신기한 세상이 있었다. 그것은 물로 이루어진 둥근 천장에 매달려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어미들과 거대한 허리둘레로 보아 이제 곧 어미가 되려는 고래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좀 전에 암시했듯이 이 호수는 상당한 깊이까지 투명했다. 젖먹이들은 엄마 젖을 빨 때,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처럼 엄마의 가슴에서 눈을 돌려 다른 곳을 조용히 쳐다본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영양을 섭취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것이 아닌 초자연적 회상을 정신적으로 즐기는 듯하다. 그래도 이 새끼고래들은 우리 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갓 태어난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한 줌의 모자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 옆에 떠 있는 어미들도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 허먼 벨빌, 김석희 역. <모비딕> 중에서

갓 태어난 새끼고래가 어미의 젖을 빨면서 자기들을 살육하러 온 인간을 해초 대하듯 무심히 쳐다보는 이 장면은 인간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첫째, 인간과 고래의 근연성은 생물적 동질성에서 비롯된다. 같은 포유류로서 숨을 내쉰다는 사실, 새끼를 낳아 기르며 젖을 물린다는 사실, 무리를 지어 살며 청각으로 의사 전달을 한다는 사실, 지적으로  영특하다는 사실 등, 인간과 고래의 근연성은 의외로 많다.

둘째, 고래에 대한 인간의 적개심은 에이해브 선장을 통해 나타난다. 에이해브는 <바이블>의 구약 '열왕기'에 등장하는 폭군 야합을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그는 야훼의 선지자 엘리아의 충고를 거부하는 우상숭배자다. 소설에는 초반부에 일라이저라는 신비한 인물이 잠깐 등장하여 포경선 피쿼드 호(號)의 흉조를 예측한다. 그런데 일라이저의 영어식 이름이 곧 엘리아인데 그는 예언자다. 또한 포경선 이름 '피쿼드'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피쿼드 족은 북아메리카 원주민 중에서 백인에게 저항하다가 부족 전체가 몰살한 최초의 부족이다. 백인들은 피쿼드 족의 여자와 간난아이까지 죽임으로써 부족을 씨도 남기지 않고 섬멸했다.

한편 모비딕과 같은 종(種)인 향유고래의 뼈 턱을 갈아 의족을 만들어 끼우고 다니는 선장 에이해브는 모비딕에 대해 소름끼칠 정도로 집요하고 포악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거의 죽을 뻔했던 그 결투 이후 에이해브가 그 고래에 대해 격렬한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복수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에이해브가 광적일 정도로 과민해져서 결국에는 자신의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지적, 정신적인 분노까지도 모두 흰 고래와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흰 고래는 모든 편집광적 화신으로서 에이해브의 눈앞을 끊임없이 헤엄치게 되었다. - 허먼 멜빌, 같은 책 중에서

인간의 적개심보다 더 이성적인 고래의 적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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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경용 작살(장생포 고래 박물관 소장) 오른쪽의 것은 고래 해부용 칼이다. ⓒ 김갑수


셋째, 이상하게도 인간에 대한 고래의 분노는 고래에 대한 인간의 적개심보다 더 이성적으로 표출된다. 앞서 말했듯이 모비딕은 에이해브뿐 아니라 이슈메일을 제외한 피쿼드 호의 선원을 모두 죽인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흰 고래 모비딕에 한한 일이 아니다. 고래가 계획된 교활성과 포악성으로 인간을 몰살시키는 사례는 <모비딕> 전편을 통해 허다하게 소개된다. 거의 모든 고래가 인간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계산된 행동으로 보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 아닌가.

"향유고래는 어떠한 경우에는 계획적으로 큰 배에 구멍을 뚫어서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침몰시킬 수 있을 만큼 힘이 세고 지혜롭고 교활하며 악랄하다... 고래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결론의 정당성은 모든 사실이 보증해 주는 것 같았다. 고래는 짧은 간격을 두고 전후 두 번에 걸쳐 본선에 대한 파상 공격을 감행했는데, 두 번 다 공격 받은 방향은 우리에게 최대의 피해를 주도록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고래는 두 물체의 속도가 결합하여 충격이 가중되도록 배 앞으로 돌아가서 정면으로 충돌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충격의 효과를 높이려면 고래가 취한 바로 그런 행동이 필요했다. 고래의 모습은 참으로 무시무시했고, 원한과 분노를 나타내고 있었다." - 허먼 멜빌, 같은 책 중에서

분명히 고래는 인간에 대해 유별난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향유고래가 다른 고래와 싸울 때에는 머리와 턱만 무기로 쓰지만 인간과 싸울 때에는 인간을 경멸하듯 주로 꼬리를 사용하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고래의 유별난 분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인간이 자기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한 복수심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하지만 멜빌은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언질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고래는 조용한 기쁨, 빠르고 힘찬 움직임 속에서 맛보는 평화로운 안정감에 쌓여 있었다. 에로우파(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패니키아의 공주. 제우스는 하얀 황소로 변신하여 에로우파를 크레타 섬으로 납치했다. 필자 주)를 납치하여 자신의 우아한 뿔에 매달고 헤엄쳐 가는 하얀 황소, 처녀를 계속 곁눈질하며 추파를 던지는 그의 아름다운 눈, 크레타 섬에 마련된 사랑의 보금자리를 향해 황홀할 만큼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달리는 제우스, 그 위대한 최고신 제우스도 성스럽게 헤엄치는 저 아름다운 흰 고래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 허먼 멜빌, 같은 책 중에서

모비딕은 이렇게 신의 모습을 띠고 이슈메일 앞에 현현했다. 허먼 멜빌은 대리역 이슈메일의 입을 빌려 이 흰 고래를 신 중의 신 제우스보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모비딕>이 신비로운 문학이라는 명제는 바로 이런 점으로 근거를 갖는다.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이 소설에서 흰 고래 모비딕은 단순한 고래가 절대 아니다. 모비딕은 실로 '거대한 의미'를 함축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마지막쯤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한다.
#모비딕 #허먼멜빌 #포경선 #에이해브 #이슈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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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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