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치마폭에 호수를 안고 있는 산

[전국 100대 명산을 찾아서 62] 무주 적상산

등록 2011.11.04 16:18수정 2011.11.0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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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 오르는 길가의 빨간 단풍 ⓒ 이승철


"우와~ 단풍 참 곱다. 내장산 단풍보다 더 좋은 걸"

"아니야, 입구는 아무래도 내장산보다 조금 못한 것 같아. 그런데 저 산자락은 정말 내장산보다 더 고운 것 같은데."


적상산을 오르는 일행들 두 사람이 내장산 단풍과 비교하며 주고받은 말이다. 정말 그랬다. 골짜기 입구의 화려한 단풍은 확실히 우리나라에서 최고라는 내장산과 비교할 수 없었지만 산자락을 물들인 단풍은 내장산을 능가할 정도로 고왔다.

지난 주말인 10월29일 새벽 서울을 출발할 때는 차가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올가을 들어 처음으로 단풍산행을 나섰는데 비가 내려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관광버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부슬비는 충청도 땅을 벗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속도로도 정체가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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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부연 안개속에 드러난 하부댐 호수풍경 ⓒ 이승철


가을비 속에 떠난 적상산 단풍산행

"날씨가 괜찮을 것 같은데, 창밖 좀 봐? 비가 그쳤어!"

새벽잠을 설치고 온 터라 깜박 잠이 들었는데 일행이 흔들어 깨우는 통에 눈을 뜨고 창밖을 보니 정말 비가 그쳐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희부연 안개가 덮여 시야가 흐렸다. 주말이었지만 서울에 새벽부터 내린 비 때문인지 무주지역으로 접어들면서부터 교통량이 줄어 도로는 한산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적상산 입구에서 잠깐 내려 양수발전소 하부 댐과 홍보관을 둘러보고 근처에서 점심을 드시도록 하겠습니다."

운전기사의 안내에 이어 곧 버스가 정차한 곳은 그리 크지 않은 저수지 옆 주차장이었다. 단풍이 곱게 물든 산자락 아래 펼쳐진 저수지가 바로 적상산 양수발전소 하부 댐이었다. 해발 250미터인 적상면 포내리 괴목천을 막아 조성한 인공호수 주변에 조성된 공원은 새빨갛게 물든 단풍나무와 맑은 물빛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그러나 양수발전소 홍보관은 마침 수리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골짜기로 조금 더 들어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식당에서 구수하고 맛깔스런 청국장 백반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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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은 식당 뒤편 산록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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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호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절벽과 단풍풍경 ⓒ 이승철


이곳에서부터 상부 댐인 적상호까지 오르는 길은 15킬로미터 거리로 구불구불하고 아슬아슬한 길이었다. 운전기사는 우리들에게 안전띠를 잘 매고 절대 통로에 나오지 말라는 당부를 거듭했는데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급커브 길에서 반대차선을 타고 내려오는 차량과 충돌할 듯 몇번인가 급제동을 하는 바람에 깜짝깜짝 놀랐지만 다행이 사고는 나지 않았다.

마주 오는 차량들과 서로 조심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사고를 일으킬지 안심할 수 없는 위험한 길이었다. 그러나 길가에는 형형색색으로 단풍이 곱게 물든 나무들이 감탄사를 자아냈다. 한참 만에 터널을 지나 적상호에 이르니 주차장에 차량들이 가득하다. 적상호가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은 해발 850미터로 본래 이곳에 안국사와 조선시대 왕조실록 등 역사서를 보관했던 5사고 중 하나인 적상산사고가 있었으나 양수발전용 댐을 만들면서 옮겨졌다.

구불구불 아슬아슬 오르는 양수발전용 댐 적상호 가는 길

"자, 다 왔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 안국사까지 모시려고 했는데 차량이 많아 길을 막았네요. 앞으로 1시간 30분 드리겠습니다. 호수 전망대를 둘러보시거나 안국사까지 다녀오시면 적당 하실 것입니다. 정상까지는 조금 무리일 테니까 참고하시고요"

이건 완전히 운전기사 마음대로다. 몇 사람이 투덜거리며 버스에서 내린다. 산행을 목적으로 왔는데 정상 등산을 하지말라니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운전기사에게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올 테니까 그리 알라고 통보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일행 40여 명 중에서 다섯 명이 정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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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댐 적상호와 호숫가의 단풍나무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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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 사고 ⓒ 이승철


마침 위쪽에서 내려오고 있는 등산객에게 물으니 1시간이면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포함한 일행 다섯 명은 거의 달리듯이 길을 재촉했다. 호수 주변에는 새빨갛게 물든 단풍나무들이 곱게 늘어서 있어 자꾸만 눈길을 붙잡는다. 안국사로 오르는 길가에 나란히 서있는 황·홍·청색 단풍나무 세 그루가 이채롭다.

바쁜 걸음으로 오르다보니 금방 숨이 턱에 찬다. 바로 그때 오른편으로 화살표가 표시된 '적상산 사고' 표지판이 나타났다. 오른편으로 100여 미터 가까운 곳에 붉은 단청을 한 한옥 몇 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본래 적성호 자리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조선시대 5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사고와 외사고인 강화 정족산사고, 묘향산사고, 태백산사고, 오대산사고를 말한다. 그러나 묘향산사고는 북방에서 세력을 키운 후금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와 관리 부실로 이내 폐지되었다. 이를 대신해서 광해군 6년에 생긴 사고가 바로 적상산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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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홍청 세 그루 단풍나무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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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성 ⓒ 이승철


적상산 사고를 잠깐 둘러보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곧 안국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 왼편 아래쪽에는 '적산산성' 석성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적상산은 상산, 또는 상성산이라고도 불렸다. 정상 부근이 평탄하고 물이 풍부하며 산의 허리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천혜의 요새지 형세를 갖춘 산이다.

이러한 산세를 이용하여 고려 공민왕 23년인 1374년에 최영의 요청으로 적상산성이 축성되었다. 산성이 축성된 후 거란과 왜구의 침략 때에는 인근지역의 백성들이 이곳에서 항전하기도 했으며, 1614년에는 적상산사고를 건립하고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를 보관하였다.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앞에 안국사가 나타난다. 안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적상지에 따르면 1277년(고려 충렬왕 3)에 월인이 세웠다고 전하는데, 조선 태조 때 자초가 적산산성(사적 146호)을 쌓으며 지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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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사 경내의 붉개 물든 단풍나무 ⓒ 이승철


1613년에 증축하고 이듬해인 광해군 6년에 사고를 두어 사각과 선원각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하고, 덕웅을 승병장으로 세워 승병 92명을 두고 지키게 했다. 이 때 절 이름을 안국사라고 바꿨으며, 1910년에 사고의 책을 규장각으로 옮기자 이철허가 사고 건물을 경내로 이전하였다. 적성호 댐 건설로 절 지역이 수몰지역에 포함되자 1991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993년에 절을 현재의 위치로 완전히 옮긴 것이다.

역사의 숨결이 깃든 적산산성, 사고와 사찰, 그리고 산 이름의 유래

안국사 경내에도 새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한 그루가 절집의 붉은 단청과 어우러져 화려하다. 그러나 정상으로 오르기 위해 경내를 지나자 그 화려하게 물든 단풍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숲길이 이어진다. 적상산의 높이는 1,034미터다. 지역적으로는 덕유산국립공원 지역에 속하며, 4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적상산은 중생대 백악기 신라층군에 속하는 자색의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산 중턱의 붉은색 바위절벽지대가 마치 산허리에 붉은 치마를 두른 것 같다고 하여 붉을적(赤) 치마상(裳)자를 쓴 적상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더구나 가을철 이맘때면 만산홍엽으로 정말 산 전체가 붉은 치마를 입은 것 같아 한국 100경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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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대에 오른 일행들 ⓒ 이승철


안국사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자 길은 좌우로 갈라진다. 오른편으로 가는 길이 정상인 향로봉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으로 가는 길이 절경으로 소문난 안렴대로 가는 길이다. 우선 안렴대로 방향을 잡았다. 첫 번째 전망대를 지나 안렴대애 이르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때까지 걷히지 않은 연무 때문에 그 황홀하게 아름답다는 절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멀리 덕유산 봉우리가 구름 속에 아스라이 바라보일 뿐이었다.

안렴대에서 뒤돌아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높낮이가 심하지 않은 능선길이다. 기봉과 주봉인 향로봉(1,034미터)이 마주보고 있는 정상 일대는 흙으로 덮인 토산이어서 비록 앙상한 겨울나무들이지만 나무숲이 매우 울창했다. 정해진 시간에 쫓겨 매우 급한 걸음으로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왔지만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자! 빨리 내려갑시다. 우리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니까"

하산길은 그야말로 달리기나 다름없었다. 다행이 급한 경사가 아니어서 다리와 무릎관절에 큰 무리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허둥지둥 적상호 도로에 내려서니 같은 버스를 타고 온 다른 일행들 몇이 벌써 정상에 다녀오느냐며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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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호 주차장 뒤편 산록의 단풍풍경 ⓒ 이승철


다급했던 발걸음과 마음을 진정하며 돌아보는 적상호와 주변 단풍이 새삼스럽게 아름답고 멋진 풍경으로 다가온다. 잔잔한 호수 물에 드리운 빨간 단풍 그림자가 가히 환상적이다. 물가의 버드나무 잎도 옅은 갈색을 띠기 시작하고 억새는 어느새 시들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빗길과 안개, 그리고 쫓기는 시간 때문에 걱정했던 적상산 단풍산행은 조금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때를 맞춘 단풍 절정기여서 황홀한 단풍에 푹 젖어들 수 있었던 멋진 산행이었다.
#적상산 #단풍 #무주 #100대 명산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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