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음에 빠진 의자왕, 16년 3월에 무슨 일이?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계백>, 아홉 번째 이야기

등록 2011.11.07 11:36수정 2011.11.0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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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계백>의 의자왕(조재현 분). ⓒ MBC


의자왕의 됨됨이에 대한 <삼국사기>의 평가는 의외로 호의적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 재위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어버이를 효심으로 받들고 형제들을 우애로 대하니, 당시 해동증자(동방의 증자)라 불렸다."

의자왕과 백제를 폄하하는 데 급급했던 <삼국사기> 편찬자들마저도 의자왕을 '동방의 증자'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삼국사기>보다 먼저 나온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신당서>의 '동이열전'에서 의자왕을 그렇게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훌륭한 인격을 가진 의자왕에게 뜻밖의 일이 생겼다. 백제 멸망 4년 전인 의자왕 16년 3월(656.3.31~4.29)의 일이다. 의자왕 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6년 봄 3월, 왕이 궁인들과 더불어 음탕을 즐기고 쾌락에 탐닉하며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좌평 성충이 극력으로 간쟁(諫爭)하자, 왕은 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때부터는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의자왕은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술에 탐닉하고 고주망태가 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폭음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안 하던 짓을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 개인의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의 어느 시기엔가 술에 빠질 수도 있다. 술을 거부할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혹은 일이 잘 안 풀리고 돌파구가 보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의자왕도 그런 이유로 술에 빠졌을까? 하기야, 백제 멸망은 임박하고 탈출구는 보이지 않으니 술에 의존했나 보다'라고 단정하지는 말자. 의자왕이 술에 빠진 것은 술을 거부할 수 없는 사정 때문도 아니고, 일이 잘 안 풀렸기 때문도 아니다.  

그럼, 왜? 의자왕이 폭음에 탐닉한 이유는 '일이 너무 잘되어서'였다. 의자왕 16년 직전에 벌어진 사건들을 종합하면, 의자왕은 세 가지 면에서 '꽤 잘 나가는 왕'이었다. 그 세 가지를 살펴보면, 그가 재위 16년부터 술독에 뛰어든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의자왕, 그가 술독에 뛰어든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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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의 어좌.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화단지 안에 있다. ⓒ 김종성


의자왕은 전쟁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데뷔 이듬해인 의자왕 2년 7월에는 직접 말에 올라타 1개월 사이에 40여 개의 신라 성(城)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성 하나는 보통 읍의 크기와 비슷했고, 읍 하나를 점령하면 주변 지역까지 '패키지'로 차지했다. 40여 개의 성을 한 번에 빼앗았으니,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성과인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다음 달, 의자왕은 전략적 요충지인 신라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 일부)을 점령했다. 또 의자왕 3년 11월에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 당항성(지금의 경기 화성 일부)을 빼앗았다. 당항성은 신라와 당나라를 잇는 루트였다. 

의자왕은 의자왕 5년 5월에 신라의 7개 성을, 8년 3월에는 10개 성을, 9년 8월에는 7개 성을 함락했다. 15년 8월에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3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얼마 되지 않는 신라 국토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의자왕은 신라를 압박하고 들어갔다.

물론 의자왕 4년 9월에 신라 김유신 장군에게 7개 성을 빼앗긴 것을 포함해서, 신라에 몇 차례 패전한 적은 있다. 하지만, 김유신의 활약이 판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의자왕 16년 이전의 백제는 신라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과시했다. 의자왕 11년에 당나라 고종이 "빼앗은 영토를 신라에 돌려주라"고 요구한 사실은, 의자왕의 대약진에 당나라도 당황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의자왕은 '창'뿐만 아니라 '입'으로도 성과를 거두었다. 외교 분야에서도 대성공을 이룩한 것이다. 의자왕 3년 11월에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항성을 빼앗고 13년 8월에는 왜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15년 8월에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30여 개의 신라 성을 빼앗았다. 고구려-말갈-백제-왜국으로 구성된 세로축 동맹으로 신라-당나라의 가로축 동맹에 맞선 것이다.

수나라에 이어 중국을 재통일한 당나라 초기의 외교는 한마디로 거만함 그 자체였다. 당나라는 이웃나라들에게 자국의 행정구역(도호부·도독부)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자기 나라 외에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만함의 표시였다.

의자왕은 그렇게 사는 것이 싫었다. 그는 '당나라의 51번째 주'가 되어 찌질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구려·말갈·왜국과 더불어 당나라의 '나쁜 외교'에 반기를 치켜든 것이다.

의자왕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나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었다. 외교 방면에서도 그는 시대의 진보적 흐름을 선도하는 국제적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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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성 사적비. 당항성은 당성으로도 불렸다.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권력 '확실하게' 장악한 의자왕, 한마디로 완벽했다

외치의 성과는 내치의 성과로 연결된다. 의자왕은 내정에서도 완벽했다. 여기서 '완벽했다'는 것은 정적들이 사라질 정도로 권력을 '아주 확실하게' 장악했다는 뜻이다.

의자왕의 승승장구가 정점에 오른 시점은 의자왕 15년 8월(655.9.6~10.5)이었다. 이때 그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30여 성을 빼앗았다. 외교 및 군사에서 동시에 대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의자왕의 국제적 위상을 한껏 고양시킨 사건이었다.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의자왕은 '여의도'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정적들을 죄다 소멸시킨 것이다. 위에서 소개했듯이, 의자왕 16년 3월부터는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폭음에 대한 비판을 포함해서 자신에 대한 견제 자체를 소멸시킬 정도로, 그는 완벽하게 전제왕권을 구축했다.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언로를 차단했다는 뜻이지만, 달리 보면 그만큼 왕권을 견고히 했다는 뜻이다. 이 점은 의자왕 17년 1월(657.1.20~2.18)에 41명의 왕자가 한꺼번에 좌평(1등급 관직)에 임명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이 조치는, 귀족들을 안배할 필요도 없을 만큼 의자왕의 왕권이 강력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전쟁과 외교와 내치에서 대성공을 기록한 의자왕. 그의 성적은 '신용평가기관'에 따라 'AAA 등급'이 될 수도 있고 'AA+ 등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인격적으로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니, 누가 봐도 그는 '너무' 완벽한 군주였다. 

의자왕 15년 8월을 계기로 의자왕이 절정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16년 3월에 성충이 그에게 "술 좀 작작 드시죠!"라고 간언한 배경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나라만 생각하고 불철주야 일만 하던 의자왕이 15년 8월을 계기로 긴장이 확 풀려 술독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때부터 멸망 때까지 백제는 군사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의자왕이 폭음에 빠진 것은 전쟁·외교·내치에서 '너무 큰' 성공을 이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걱정거리를 모조리 없애기 위해 열심히 살았고, 걱정거리를 죄다 없앴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 것이 도리어 그의 나태함을 초래했던 것이다. 너무 완벽한 성공이 오히려 화근이 된 것이다.

그는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공 직전까지도 백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수십 년간 백제의 승승장구가 계속되고 있었으니, 그렇게 확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나당연합군을 최전방에서 방어하지 않고 안쪽 깊숙이 끌어들여 한 번에 일망타진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심리적 무적상태'가 그를 폭음에 빠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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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하는 의자왕. 말 탄 사람 중에서 맨 앞. ⓒ MBC

전략대로만 됐다면 백제는 세계 최강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계백을 비롯한 현장 지휘관들은 의자왕의 주문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결국 의자왕은 자신의 전략적 실수를 탓하면서 하얀 깃발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대성공이 완벽한 대실패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맹자는 <맹자> '양혜왕' 편에서 "어진 이에게는 적이 없다"(仁者無敵)고 말했다. 지당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적이 있는 게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적이 없으면 긴장감도 생기지 않고 악착같음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의자왕이 폭음에 빠진 것은 심리적으로 무적(無敵)의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전쟁·외교·내치의 대성공이 비판세력의 소멸로 연결되고, 그것이 다시 심리적인 무적의 상태로 연결된 것이다.

실제로는 여전히 적이 남아 있었지만, 의자왕의 대성공은 그의 마음속에서 적의 존재를 지워 버렸다.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드는 적이 마음속에서 사라졌으니, 더 이상 긴장할 이유도 더 이상 노력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의자왕이 '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서 적이 계속 준동했다면, 의자왕과 백제는 전혀 다른 운명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완벽함에 취해 스스로 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계백 #의자왕 #자만심 #인자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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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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