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덕분에 작품 세계가 에로틱하게 변했다

[오마이 블로거를 만나다 1] '도토리' 한미 도예가

등록 2011.12.18 14:04수정 2012.07.0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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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한미 도예가 ⓒ 유혜준



흑심(?)을 품은 채 단 둘이 만나면 늘 어색하다.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추임새를 넣듯이 옆에서 몇 마디 거들면 되는데, 그걸 하면서 상대방에게 사진기까지 들이대자니 찍는 사람도, 찍히는 사람도 영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미 도예가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이야기를 나누는 건 막힘이 없었는데, 사진기를 들이대면 표정이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찍히는 대상이 그러니, 찍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지만 그거야 나의 바람일 뿐이었다. 나보다 사진을 찍히는 입장인 한 작가가 더 불편했을 것이다. 나중에는 사진이 잘 안 나온다고 툴툴거리는 나를 위해 우아하게 포즈를 취해줬다. 그래도 사진은 기대보다 훨씬 낫게 나왔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원판이 좋아야 사진이 잘 나온다고 하더니, 그랬나 보다.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말을 덧붙이면 사족이 되겠지?

한미 도예가, 라고 했지만 내게 그이는 도예가 한미보다는 <오마이뉴스> 블로거 '도토리'로 더 친숙하다. 발랄한 성격에 붙임성이 좋고 다른 사람들을 아주 잘 배려하는 멋진 여자, 도토리. 그래서 그이를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은 단박에 그이의 열렬한 팬이 되어버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블로거 '도토리'가 아닌, 도예가 한미를 만난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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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포스터 ⓒ 한미

그이가 도예가인 것을 알고 있었고, 그이가 이따금 블로그에 자신의 작품을 올리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런 그이가 지난 11월에 인사동에서 개인전시회를 열었다(11월 16일~11월 22일). '소통'을 주제로 한 한미 도조전 '영혼의 기울기殿'.

옷깃만 스쳐도 삼천 겁의 인연이라 했거늘 <오마이뉴스> 블로그를 통해서 인연을 맺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몇 번을 만났으니 그 인연이 결코 가볍다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시회를 빙자하여 오랜만에 인사동 나들이를 나섰더랬다.


그이를 보러, 그이의 작품을 보러 인사동 나들이를 나선 사람은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도토리'의 블로그를 기웃거리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전시회가 열리던 날 죄다 인사동 전시회장으로 출동을 했단다. 그 날, 나는 아쉽게도 다른 일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기에 홀로 인사동 나들이를 나섰던 것이다.

'도토리'를 만나러 전시장에 간 나는 그곳에서 '도토리'가 아닌 '도예가 한미'를 만나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작고 소박한 전시장에 놓인 아홉 점의 작품 때문이었다. 사진으로 볼 때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직접 작품을 보니 '도토리'가 작가라는 인식이 확 들었던 것이다. 제법 묵직한 무게와 부피가 나갈 것 같은 작품을 만드느라 비지땀을 흘리면서 흙과 씨름했을 작가의 모습이 눈앞에 저절로 그려졌던 것이다. 그러자 사람이 갑자기 달라 보인다. 그러면서 그이에 대한 호기심이 모락모락 연기를 내면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난 2일, 나는 전시회를 마친 <오마이뉴스> 블로거이자 도예가인 한미 작가를 만나러 그이의 작업실로 갔다. 그이의 작업실은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에 있었다. 겨울의 한기가 깃들기 시작할 즈음이라 그랬을 것이다. 안양역으로 나를 마중 나온 한 작가가 작업실 문을 열자 썰렁한 한기가 느껴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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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작업실은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환한 웃음을 얼굴 가득 머금은 한 남자가 두 팔을 벌려 나를 반겼다. 예수님이다, 한 작가가 흙을 빚어 만든. 한 작가의 이번 전시회 주제는 '소통'이었고, 9개의 작품이 죄다 남녀가 한데 엉켜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해서 에로틱한 분위기를 잔뜩 연출하고 있지만, 이전에 한 작가가 주로 만든 작품은 성물이었다. 나를 반긴 예수님처럼 환하게 미소 짓는 온화하면서도 자비가 넘치는 성물을 주로 만들었다. 그 작품이 몇 점 작업실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손재주가 뛰어난 남동생이 직접 만든 나무 선반에는 그이가 만든 다양한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이번 전시회에서 선을 보였던 작품들이 놓여 있었다. 다른 공간에는 문이 활짝 열린 가마가 들어가 있다. 소파와 함께 놓인 탁자 역시 남동생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위에 아기 예수 탄생을 묘사한 작품이 경건하면서 차분한 분위기를 한껏 풍기면서 놓여 있었다.

낯선 공간이니 우선 익숙해지기 위해 내부를 대충 둘러보고, 탁자 앞에 앉아 그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그이가 이야기를 했고, 나는 가끔 추임새를 넣으면서 그이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참으로 즐거웠다. 인터뷰를 빙자해서 그이를 만나기를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긴 만남이 즐거워야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쉬운 법.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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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대학시절 생활미술을 전공했지만 한 작가는 결혼을 한 뒤 세 아이를 낳아 키우는 생활에 푹 빠져 살았더란다. 하긴 하나도 많다고 하는데 셋이나 낳았으니, 그 뒤치다꺼리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막내가 다섯 살이 되던 즈음이었다고 그이는 기억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그이의 말을 빌자면 '남보다 30년은 족히 앞서가는' 혜안을 가진 어머니는 육아에 푹 젖어 있는 딸을 흔들어 깨웠다.


"엄마가 전화로 그러더라구요. 너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고, 배운 게 있는데 계속 그렇게 놀고 먹으면 나중에 네가 할 게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요. 할 게 없으면 네가 괴로울 것이라고 뭐라도 해야 한다구요."


범상치 않은 어머니였다. 그이의 어머니는 딸 셋을 죄다 재수까지 시켜가면서 대학을 보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런 어머니를 보고 아마도 극성이라고 수군거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이 어머니는 여자도 일을 해야 한다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이 아주 확고한 분이었다. 그래서 딸들을 가르쳤고, 제 몫을 확실히 해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언니는 약사, 동생은 한의사가 되었으니, 그이 어머니의 선견지명은 30년을 앞서간 게 맞는 것 같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시작한 게 '흙'이었다.

"내가 재미있게 하고 싶은 게 무엇일까, 생각했더니 흙이더라구요. 물레를 한 1년 정도 배웠는데, 잘 하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 흙을 만졌고, 심한 경우에는 잠도 자지 않고 밤을 새우기도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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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한미 도예가 ⓒ 유혜준

그렇게 시작한 작품 활동이 10년을 훌쩍 넘겼고, 그이는 개인전과 초대전 등을 합해서 10여 차례가 넘게 전시회를 한 작가가 되었다. 작가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게 잘 풀리는 건 아니다. 성물 전시회를 할 때는 그런대로 작품이 팔렸지만, 작품 세계의 변화를 꾀한 이번 전시회에서는 한 작품도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 작가가 우울 모드로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작품을 하는 게 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하는 거니까, 전시회를 할 때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아요. 전시회가 끝나면 맥이 빠지지만 그래서 허탈감이 별로 크지 않아요. 이렇게 한 번 해봤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요."

작품이 팔려야 전시회가 성황리에 끝났다고 인식을 하는 다른 작가들이 이번 전시회에서 그이가 작품을 전혀 팔지 못했다고 하니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 하기는 했단다. "다들 측은지심이 서린 표정으로 보면서 '밥, 더 먹어' 하는데 그렇게까지 비참한 마음은 없었어요"하면서 그이는 까르르 웃었다(밥 먹는 자리였단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자랑 같지만 요즘 볼 수 없는 깊이감을 가지고 작업을 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돈은 못 벌었지만 자존감을 많이 키워준 전시회였던 거지요. 내가 작가로서 부끄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굉장히 뿌듯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게 대단하다는 건 아니지만 전시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 입장에서 지금까지 보다 나은 전시를 했다는 게 좋았어요."

성물 작품만 하던 사람이 자유 주제로 작품을 했고, 그것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으니, 만족한다는 거다. 그렇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한 작가에게 '일'을 권했던 어머니께서 아무래도 수강생을 받아서 경제활동을 하라는 조언을 하신 것만 봐도 그렇다. 그래서 궁금했다. 한 작품이 대체 얼마나 하는지, 만일 작품이 전부 팔렸다면 그이가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지.

이번 전시회의 작품 구상은 이 년 전부터 했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년 전.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이 죄다 팔렸다고 해도 200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돈이었다. 재료비에 작품 전시회에 들어간 비용을 제한다면, 남는 돈은 1000만 원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 들인 노력 즉 인건비는 아예 계산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작품이 전혀 팔리지 않았으니, 경제활동은 제로에 한없이 가까울 수밖에 없다. 거참,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흙은 정직해요... '일필휘지'가 나오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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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이전에 주로 만들었던 성물(聖物) 전시회를 했을 때 작품이 제법 팔렸다고는 하나, 지금까지 한 셈법으로 계산을 해보면, 그이의 작품 활동은 그이의 가정 경제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 역시 예술은 배고픈 거구나. 여기서 또 궁금해졌다. 그런 대로 잘 팔리는 성물을 계속 만들지 왜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을까?

"늘 성물만 하다 보니 내가 도식화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 성물을 만들 때는 웃는 모습을 더 잘 만들려고 무척이나 노력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져서 기분이 좋든 나쁘든 어떻게 하면 이런 미소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회의가 생겼고, 그 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은 시시해 보이고 남이 하는 일은 대단해 보이는, 말하자면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사람이라서 도예를 하면서 그림도 잘 그리는 사람을 보면 부러웠거든요."

회화를 시작했더니 그이의 생각이 달라졌다. 그이는 그것을 '생각이 열렸다'고 표현했다. 내가 지금까지 틀에 박힌 작업을 하고 있었구나, 예술가라기보다는 성물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 있었구나, 작품을 통한 일종의 신앙고백이었구나, 신앙고백을 갖고 평생을 할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작품 성향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덕에 '소통'을 주제로 한 '영혼의 기울기전'을 내놓을 수 있었다.

작가는 이번 작품에 이전에 했던 성물 작업을 접목시켜 지금과는 다른 성물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종교와 세속은 어찌 보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 그래서 성물 작품에서 세속 작품으로 넘어갈 때 그다지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것처럼 성물 작품으로 되돌아갈 때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작가는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이전과 다른 작품이 나오겠지만.

이번 전시회에 관해 궁금했던 것. '도조전'이 낯설었다. 내가 이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도예로 조형작품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흙을 소재로 조각과 같은 효과가 나는 작업을 하기에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 빚어서 가마에서 구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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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한미 도예가 ⓒ 유혜준


한 작가가 이번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은 죄다 1미터가 훌쩍 넘는 거대한 것들이었다. 그러니 공력뿐만 아니라 노동력 또한 많이 들 수밖에 없다. 직업병이 생긴단다. 어깨가 아파 팔을 들 수 없는 지경이 되기도 하고, 손목이 아파 병뚜껑조차 돌릴 수 없어 치료를 받기도 했다. 벨리 댄스를 배우고, 수영을 하는 건 일종의 체력 다지기다. 어느 분야나 체력이 있어야 버틸 수 있는 건 마찬가지구나, 했다. 무거운 작품을 옮길 때는 기운 센 동생을 불러댄단다.

결혼해서 아이가 셋이나 있는 주부가 전업 작가로 활동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남편의 동의 내지는 지원.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남편이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이의 말을 빌자면 "굉장히 점잖은 사람인 남편은 굉장히 고지식한 사람이라 밤늦게 귀가하는 건 용납을 못 하지만, 작품 활동하는 건 전폭적으로 지지, 지원"한단다. 올해 고3인 아들을 비롯한 세 아이 역시 엄마가 작가인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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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엄마가 바빠 아이들에게 일일이 잔소리를 할 시간이 없이 자유롭게 놓아두기 때문이라는 게 그이의 생각이다. 그래서 가끔 그이는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을 비교한단다. 자신의 어머니는 딸들의 미래에 강한 신념을 갖고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자신은 그런 면에서 볼 때 어머니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그런 평가를 하는 몫은 아마도 한 작가의 아이들에게 돌아갈 것 같다. 훗날 아이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어떻게 회고할까?

<오마이뉴스> 블로거인 그이가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첫 글을 올린 것은 지난 2011년 3월 첫날. 대체 어떤 인연으로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까? 플라치도 님을 통해 <오마이뉴스> 블로그를 알게 되었고, 많은 블로거들처럼 처음에는 눈팅만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블로그를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블로거들과의 '소통'은 그이로 하여금 '오블'에 더 깊숙이 발을 들이게 만들었다.

그이의 블로그는 <도토리 안의 우물>.

인연은 인연을 낳는다. 그 인연으로 많은 오블 멤버들이 앞 다퉈 그이 전시회 소식을 포스팅 했고, 전시회를 보러 인사동으로 나들이를 나서 성황을 이루게 했단다. 농담처럼 '오블'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하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긴 전시회 첫날, 뒤풀이를 오블 멤버인 '참치주방장'님 식당에서 했으니, 한미 작가의 이번 전시회는 오블에서 시작해 오블로 이어져 오블과 함께 막을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이럴 때 생각나는 말이 있다. 역시 오블 멤버인 이충렬 샘이 오블 멤버를 두고 하신 말씀. "우리가 남이가?" 맞다, 오블 멤버는 남이 아니라 다정한 이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오마이뉴스>를 통해서 끈끈한 인연을 맺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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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한미 도예가 ⓒ 유혜준


흙은 솔직하다, 는 게 지금까지 10여 년이 넘게 흙으로 작품 활동을 해온 '도토리' 한 작가의 변함없는 생각이다. 흙은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 좋은 작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흙에서는 '일필휘지' 같은 게 나오지 않는단다. 자기가 시간을 들이고 노력한 만큼만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일필휘지'로 붓을 휘두르는 것 같은 사람들도 그 내공을 쌓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공력을 들여 그런 결과를 얻는 것이겠지만.

그래서 작가는 성실한 작업만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날마다 작업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작업실에 있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그 아이디어에서 연작이 나온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 지금처럼 기운이 팔팔하지 않게 되면 아무래도 작품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겠지만, 아직은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면서 한 작가는 기운차게 웃었다.

한 작가의 이름 이야기를 덧붙여야겠다. 참으로 예술가다운(?) 이름이었다. 아름다울 미(美), 외자 이름이었던 것이다. 다른 형제와 자매가 다 비슷한 이름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물었다. 이름이 참 예쁘고 특이해요. 다른 형제, 자매도 그런가요? 아버지께서 사주를 보고 지어주신 이름이란다. 다른 형제, 자매 이름은 평범한데 그이에게만 그런 이름을 붙이셨다는 것이다. 예술가의 운명은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면 이름을 따라가는 것일까?
#한미 #도토리 #오마이뉴스 블로거 #도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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