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프라블럼"이라는 그에게서 여유를 배웠다

[바깽이의 이집트 여행기⑥] 나일강의 위대한 뱃사공, 아흐마드

등록 2011.12.16 14:48수정 2011.12.1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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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이집션, 아흐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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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루카는 바람을 따라 방향을 조정해 나아가며 나일강을 가른다. ⓒ 박경


"웃어라. 모든 게 다 좋지 않느냐. 난 평화로운 게 좋다. 노 프라블럼."


아흐마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좋은 여행하면서 대체 왜 인상을 쓰느냐'는 뜻이리라.
펠루카 비용을 왕창 뜯긴 내 표정이 굳어 있었나 보다. 게다가 배에 오르고 보니 사공 아흐마드가 있었고, 터번 아래로 굵은 주름이 밀린 늙은 남자가 있었다. 아흐마드는 그를 캡틴이라고 소개했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람. 나중에 뜯어 먹겠다는 거로군. 캡틴은 선주인가 보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이, 아흐마드에게 모든 걸 맡긴 채, 얌전히 그렇게 배 끄트머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말해라, 가고 싶은 곳을. 어디든 다 좋다. 원하는 곳으로 향하겠다.

엘레판틴 섬으로 가려면 다른 선착장에서 타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우리가 망설이자 아흐마드는 또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저의일까. 엘레판틴 섬까지 가고 나면 멀리 왔으니 돈을 더 달라고 억지를 부리겠지? 그럼 또 인상 빡 쓰고 다투어야 하나. 어지럽다. 스트레스 만땅이다. 누비안 마을이고 뭐고 다 귀찮다.

그냥 건너편에 보이는 강 서안에 내려달라고 아흐마드에게 말했다. 그곳에도 누비안 마을이 있다고 아흐마드는 우리 가족을 위로했다. 잠시 불던 바람에 흰 돛이 팽팽해지는가 싶더니만 이내 바람이 멈추자 펠루카 역시 멎는다. 아흐마드는 일어서서 큰 장대를 들었다. 강바닥을 밀어 배를 미끄러뜨리는 것처럼 보였다.

배가 강가에 닿자 아흐마드는 우리를 따라 내렸다. 굳이 원하지 않는데도 강가의 누비안의 집까지 바래다 주고는 펠루카로 돌아간다. 나중에 배 있는 곳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누비아 여인은 우리에게 집을 구경시켜 준다. 차까지 권한다. 됐거든요, 거절한다. 이제 그런 것이 순수한 호의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집을 구경하는 동안 어느새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다.

집을 나오면서 여인에게 박시시를 주었고, 몰려든 아이들에게는 들고 있던 바나나며 오렌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졸졸졸 계속 따라오는 것이다. 간식으로 들고 있는 과일을 더 달라기도 하고 박시시를 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한다. 난감하다.

따라오는 아이들을 쫓아 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마을 노인들이 소리를 친다. 그제서야 아이들이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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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안 마을 누비아는 이집트 남부에서 수단 북부에 걸친 지역. 만년의 역사는 아스완 댐의 건설로 물 속으로 가라앉고, 누비안들은 주변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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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안 마을 원래 가려던 엘레판틴 섬에 가지 못하고 나일강 서안으로 갔다. 누비안 마을이 뭐 별건가. 누비안들이 살면 누비안 마을이지.공사중인 마을의 어느 곳. ⓒ 박경


무서운 아이들

작고 소박한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 길에 아까 그 녀석들이 또 진을 치고 있었다. 도망치듯 우리 가족은 강가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녀석들은 다람쥐처럼 잽싸게 따라 붙었다. 그만 돌아가라고 팔을 휘저었으나 막무가내다. 남편과 딸은 벌써 저만치 달아났다.

나는 엉거주춤, 아이들에게 뭐라도 주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길게 가랑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카메라를 가리킨다. 사진을 찍어달란 얘긴가? 그 정도 서비스는 내가 해 주지. 사진 찍히고 싶어하는 걸 보니 애들은 애들이구나, 싶어 한 장 찍고 돌아서는데, "포토 머니" 날카롭게 울린다.

돌아보니, 아이들의 눈빛과 목소리는 완전히 달라졌다. 졸졸졸 꽁무니를 따라오며 구걸하던 아이들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듯 노골적이고 공격적이다. 아니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기세로 나를 빙 둘러싼다.

나는 서둘러 동전을 하나씩 나눠 주곤 돌아서려는데 녀석들이 앞을 가로막고 선다. 안 받은 녀석도 있다고 하소연이다. 대여섯 명이나 되는 녀석들, 나이도 달라 키도 들쑥날쑥, 한꺼번에 손을 내미는데, 받고 또 받는 녀석도 있는데, 그걸 다 일일이 줄 세워 확인하지 못한 불찰이다. 굴침스럽게 들러붙는 녀석들이다.

앗 뜨거라, 내 뺄 수밖에. 덤불을 헤치고 도망치는데, 녀석들은 더 위협적으로 따라붙었다. 덜컥 무서웠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아이들이니까 더욱.

빨리 강가에 이르기를 기도하며 힘껏 달렸다. 소리를 악악대며 쫓아오는 녀석들은 더 이상 다람쥐가 아니다. 녀석들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한 절대 포기하지 않을 듯이 필사적으로 나를 따라왔다. 외딴 마을에서, 낯선 사람이 찾아들기를 기다리며 석 달 열흘이나 굶주린 짐승처럼 그렇게 그악스럽게. 어린아이들이라고 너무 만만하게 본 걸까.

드디어 아흐마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는데, 녀석들은 배가 정박한 모래강변까지 쫓아왔다. 멀리서부터 보고 있던 아흐마드는 배에서 내려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아흐마드가 뭐라고 뭐라고 소리를 치자, 그 순간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일강 위에 떨어지는 햇살처럼 눈부시게. 저 녀석들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나,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조금 전 그들은 절대 아이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처럼 악착스럽고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아흐마드의 한마디에 와르르 넘어가는 걸 보니, 애들이 맞긴 맞다. 녀석들은 천진한 모습을 되찾았다. 녀석들은 금세 순순해져서 저들이 달려온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내가 그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었구나, 가끔씩 찾아드는 무책임한 여행자들이 그 아이들을 그렇게 길들였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쓸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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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완의 상징 펠루카 ⓒ 박경


아흐마드의 위대한 일

펠루카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아흐마드와 좀더 친근해졌다. 굳어 있던 내 표정이 풀어져 경계가 풀렸는지 아흐마드는 이런 저런 말들을 걸어왔다.

"다 좋다, 다 괜찮다"고 말하는 아흐마드는 전 세계에 친구가 많고 아랍어,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를 할 줄 안다고 자랑했다. 대단하다고 칭찬하니, 자신의 이야기를 순순히 풀어 놓는다.

아내는 영국인이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휴양지 샤름 엘 셰이크의 큰 배에서 일하던 중 여행온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은행에서 일을 한다, 석 달은 영국에 머물고 석 달은 이집트에 머문다.

영국인 아가씨와 결혼할 때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그는 입에 붙은 말만 되풀이했다. 노 프라블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흐마드의 얼굴에 잠깐 외로움이 비친 것도 같다.

바람은 멎고 아흐마드는 천천히 장대로 강바닥을 밀어 배를 움직였다. 모래산과 푸른 하늘이 맞닿은 곳에서는 구름을 토해내고 있다. 아흐마드 말처럼 모든 것이 좋았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바가지 때문에 속 끓인 일, 이집션들에 대한 경계심,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하면서, 바가지를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큰소리 쳤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집트에 와서는, 바가지 강도가 센 탓인지, 약발이 현저히 떨어져 있던 차에, 아흐마드가 그걸 일깨워 준 것이다.

4개국 말을 하는 똑똑한 아흐마드, 평화를 사랑하는 현명한 아흐마드가 왜 이런 하찮은 일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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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의 위대한 뱃사공 아흐마드 여행 초반에 아흐마드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행복한 뱃사공 아흐마드 덕분에 여행은 다시 즐거워졌다. 아흐마드 고마워! ⓒ 박경


아흐마드를 만난 이후에 나는 변했다. 늦은 저녁, 수크 거리를 쏘다닐 때, 더 이상 바가지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탓이리라. 2파운드(1이집션파운드=약 220원)도 안 되는 생수를 20파운드 달라고 눙치는 사내의 팔뚝을 툭 치며 말했다. 에이, 2파운드인줄 다 아는데 무슨. 사내는 순순히, 그럼 그렇게 달란다. 이제 싱거울 지경이다.

내가 다 알고 달려들면 흥정은 쉽게 끝난다. 잔뜩 경계하고 잘 모르는 눈치를 보이면 저쪽도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서로 생긴 건 달라도, 말은 잘 안 통해도, 그런 건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다.

여행 초반에 아흐마드를 만난 건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난 한동안 더 시불시불거리며 돌아다녔을 거다. 대부분의 아랍 사람들처럼, 미국이 싫다고, 미국을 위해 일하는 반기문의 국적이 미국이 아니냐고 반문하던 아흐마드는 전형적인 이집션이 아니었을까 싶다. 순하고 낙천적인 이집션들. 참견하길 좋아하고 긴 속눈썹과 큰 눈망울을 가진 사람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아흐마드가 하는 일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걸. 정말로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걸. 적어도 유엔총장보다 훨씬 더 평화를 사랑하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한 여행자의 마음을 완벽하게 평화롭게 만들어 놓았으니.

그리고 난 아직도 궁금하다. 미처 그걸 묻지 못했던 게 두고두고 아쉽다.

대체 아흐마드는 그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한 걸까. 무슨 말이 아이들을 한순간에 까르르 넘어가게 만든 걸까. 무섭게 달려들던 그 아이들 얼굴에 다시 천진스런 표정이 피어나게 한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 2주 동안 이집트를 여행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2011년 1월 2주 동안 이집트를 여행하였습니다.
#펠루카 #누비안 마을 #아스완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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