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강화로 체질 개선해야 할 교회

등록 2011.12.27 12:05수정 2011.12.2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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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자인 나는 대전교구에 속한 본당의 신자로 2009년부터 <대전주보>에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글을 쓰고 있다. 원고지로 6매 분량의 짧은 글인데, 2011년 11월 현재 47회를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 신앙 안에서의 내 삶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신앙과 관련한 일상 속의 소박한 이야기, 작은 에피소드, 조금은 창의적인 내 나름의 이런저런 신앙 행위들을 진솔하게 고백하기도 한다. 꽤 많은 교우들이 좋은 느낌이나 자극을 받고 더러는 참고로 삼는 것도 같다.

 

나는 정치·사회적 문제들에 관련한 이야기는 쓰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삼고 있다. 늘 그 '원칙'을 준수하려고 신경을 쓴다. 하지만 철저히 기피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오체투지 순례기도' '용산미사' '여의도 거리미사' 등에 관한 얘기들을 은근슬쩍 언급하기도 했다. 노골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으니, 다른 이야기를 하는 중에 연관을 지어 슬며시 끌어들이는 방식을 쓴다. 말하자면 기교를 부린 것이다.    

 

그런데 신자들 중에는 의외로 주보와 담을 쌓고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주보뿐만 아니라, '읽는 일'에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읽는 일에 너무도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지천이라는 것을 손쉽게 체감하곤 한다.

 

스스로 정보를 차단하는 현상

 

올해 연세 88세이신 내 모친은 2009년 6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꼬박 1년을 병마와 싸워야 했다. 폐암 말기에다 임파선에도 암세포가 있다고 했다. 식이요법과 대체의학 활용으로 폐암을 극복했지만 골반으로 암세포가 전이되고 확장되면서 엉덩이뼈 암세포 부위가 골절되셨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로 서울 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1개월, 집 근처 요양병원에서 7개월을 사셔야 했다. 그에 따라 나는 서울을 수없이 왕래해야 했고, 하루 세 번씩 요양병원을 다니며 노친을 돌봐야 했다. 갖가지 정보를 입수해 대체의학 방법을 최대한 활용했다. 말이 쉬워서 식이요법이고 대체의학이지, 그것은 가족의 노고와 정성의 집합이었다. 결국, 노친은 스스로 일어서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완쾌돼 지난해 7월 5일 퇴원을 했고, 별 문제없이 집에서 잘 생활하신다.

 

노친이 자신의 두 발로 걸어 다니시고, 스스로 식사도 챙겨 드시고 하니, 나는 그 덕에 마음 놓고 서울 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지난해 11월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서울여의도에 가서 천주교 '월요 시국기도회(여의도 거리미사)'에도 참례할 수 있었다.

 

노친의 병상을 돌볼 때는 본당의 주일 교중미사에는 거의 참례할 수 없었다. 성가대 활동도 접어야 했다. 노친이 퇴원한 후 한동안은 노친을 모시고 미사 시간이 길지 않고 신자들도 붐비지 않는 토요일 저녁 특전미사나 주일의 아침미사 혹은 저녁미사에 참례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신자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됐다. 2009년 5월 본당 총회장 짐을 벗은 나로서는 신자들의 오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회장을 그만두더니 주일에도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다"는 오해도 생겨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대전주보>를 활용할 생각을 했다. 내가 맡고 있는 고정란을 이용해 대체의학 정보를 널리 전할 겸 내 분주한 간병생활을 소개하는 글을 두어 번 쓰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 신자들 사이에는 실제로 그런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총회장을 그만두더니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돌았던 듯싶다. 노친 퇴원 이후 내가 다시 주일 교중미사에도 나가고 또 성가대 활동도 재개하자 나를 반기는 교우들 중에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반가워하는 말들 중에는 이상한 말맛을 풍기는 이들도 있었다. 노친이 무려 일곱 달이나 요양병원에 계시는 동안 문병을 온 교우들도 적지 않았고, 또 <대전주보>에서 내 글을 읽은 이들도 많건만, 의외로 또 많은 교우들이 저간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현상이 조금은 재미있기도 했다.

 

더욱 놀랍고 재미있는(?) 일은 최근에 있었다. 주일 교중미사에 참례해 2층 성가대 석에 앉아 잠시 <대전주보>를 읽다가 뒤에 앉은 남성 동료단원에게 물으니 주보를 받아오지 않았노라고 했다. 내가 보던 <대전주보>를 그에게 주며 내 글을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그가 호기심을 보여 물으니 <대전주보>에서 내 글을 처음 본다고 했다. 내가 <대전주보>에 글을 쓰고 있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얘기였다. 

 

"아니, 내가 <대전주보>에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글을 쓴 게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지금까지 그걸 전혀 모르고, 내 글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단 말이야?"

 

내가 놀란 소리로 물으니 그가 태연한 소리로 대답했다.

 

"난 원래 주보를 읽지 않아요. 뭘 읽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소질도 없어서…."

"그래도 그렇지, 주보의 존재이유도 좀 생각해야지. 그거 너무하는 것 아냐? 우리 본당에서 돈을 들여 사오는 주보고, 교구교회에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잘 돕기 위해 많은 이들이 고생을 해서 만드는 주보인데, 그렇게 무시한다는 게 말이 돼? 정말 너무한다."

 

나는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나보다 한참 후배여서 나무라는 투로 말했지만, 가슴이 한없이 먹먹하고 답답하고, 또 저리고 아팠다.

 

지난 6월, 이웃동네인 서산의 한 성당에 간 적이 있다. 그 성당에서 열리는 음악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 성당의 사목위원들을 비롯해 낯익은 얼굴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런데 대부분의 낯익은 얼굴들이 내 근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와 악수를 하면서 묻은 말이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거였다. <대전주보>에 나타난 내 근황을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더러 주보에서 내 근황을 접하기도 했지만, 읽고 나면 금세 잊어버리는 그런 현상 탓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아예 주보를 읽지 않는 관성과 체질 탓이 아닐까 싶었다. 다행히 한복 차림으로 안내 봉사를 하는 자매들 중에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고, <대전주보>에서 내 글을 잘 읽고 있다는 인사도 하고 해서, 나는 그런대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교구주보>에 출현한 '사회교리'

 

신자들은 주일에 성당에 오면 입구에서 <교구주보>와 <본당주보>를 받는다. 봉사자들이 일일이 인사를 하며 주보를 건네준다. 그런데 신자들 중에는 미사 후 주보를 입구에 놓고 가는 일들이 의외로 많다. 주보를 미사 전에 다 읽었는지, 신부님 강론 시간에 강론을 듣지 않고 주보를 읽었는지, 주보를 집에까지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봉사자들은 어지럽게 쌓인 주보를 정리하느라 한참동안 수고를 하곤 한다. 

     

그런 현상이 안타깝게 보여 내가 <교구주보>에 '주보를 집에 가져가세요!'라는 글을 쓴 적도 있다. 주보를 성당에서 읽지 말고 집에 가서 찬찬히 읽어야 한다는 것, 주보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니 이웃에게도 나누고 선교에도 활용해야 한다는 것 등을 설명한 글이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다. 주보를 성당에서 대충 읽고 미사 후 입구에 버리고 가는 관성과 체질은 고쳐질 수 없는 것 같다.

 

요즘 <대전주보>에는 '사회교리'에 관한 글이 나온다. '세상 속 교회'라는 면 제목 아래 연기군 전의 본당 주임 박상병 루도비꼬 신부님이 벌써 여러 달째 사회교리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매주 그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한국교회가 사회교리 교육을 강화하기로 한 것과 발맞추는 것임을 느끼면서도, 너무 때가 늦은 게 아닐까 싶은 아쉬움도 갖는다. 아쉬움 속에서도 교회가 늦게나마 사회교리 교육의 필요성을 크게 인식한 증좌로 느껴져 다행스러운 마음을 갖는 것이다.

 

<대전주보>에 사회교리에 관한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글이 연재되기 시작한 이후로는 미사 후 성당 입구에 버려지는, 수북이 쌓이곤 하는 주보들을 보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 할머니들이 주보를 놓고 가는 것이야 탓할 일이 아니다. 노안(老眼)이 아닌 사람들, 더욱이 말쑥한 차림새의 형제자매들이 주보를 버리고 가는 모습은 얄밉기도 하다.

 

본당 사목자에게서 주보를 세심히 읽고 공부를 하도록 유도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도 섭섭하고 야속하다. <교구주보>에 사회교리에 관한 심층적인 글이 연재되는 것은 교구차원의 어떤 의지의 작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또 교구교회가 본당 사목자들에게 뭔가를 간접 지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좋은 기회가 아닌가. <교구주보>에 연재되는 사회교리에 관한 글을 가지고도 좋은 강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교리를 가지고 강론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교구주보>에 나오는 사회교리에 관한 글을 세심히 잘 읽어보도록 권장할 수 있지 않을까.

 

안타깝다. 나는 <교구주보>에 연재되는 사회교리에 관한 글을 대부분의 신자들이 유심히 읽지 않는 현실, 사회교리에 관한 글이 신자 전반에 어떤 자극이나 각성의 기제로 작용할 수 있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 현실문제와 유리된 신자들의 관성과 체질 때문에 성당에 갈 적마다 한숨을 쉬곤 한다.     

                

'사회교리'에 대한 희망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은 한국교회의 '인권주일'이다. 인권주일로 시작되는 대림 제2주간을 올해부터는 '사회교리 주간'으로 지내게 된다. 한국주교회의는 올해 추계총회에서 '사회교리 주간'을 제정했다. 주교회의의장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는 '사회교리 주간' 제정을 두고 "각 교구에서 신자들에게 사회교리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는 첫 단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한국교회가 '사회교리 주간'을 제정한 배경을 여러 각도로 파악한다. 본당 기초공동체에서 신자생활을 하는 평범한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생활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반 그리스도적' 정서를 가장 큰 요인으로 생각한다.

 

어느 본당에나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신자들은 있게 마련이다. 사제가 사회정의에 관한 강론을 한다든지, 사회 이슈가 된 문제들을 거론할라치면 반감을 표시하는 신자들도 있음을 알고 있다. 어느 본당에서는 강론 중인 사제에게 벌떡 일어나 항의를 한 신자도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을 염려해 사회정의를 가르치지 못하는 사제들의 나약한 태도다. 또 대다수 신자들의 사회정의에 대한 둔감과 무관심이다. 신앙을 '치장'한 채 사제에게 반감을 표시하는 신자들, 수구적 가치관에 갇혀 사는 정치 편향적 신자들은 사실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대다수 사회현실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이 문제인 것이다.

 

주보조차 제대로 읽지 않는 신자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리 없다. 그들은 한정된 정보 속에서 산다. 인터넷에서 광범위한 정보를 얻는 사람들보다는 TV에 사로잡혀 살거나 이른바 메이저 보수언론이 주입하는 정보에 더 쉽게 노출되곤 한다.

 

나는 이런저런 소공동체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현상을 겪곤 한다. 그 어디에도 기득권 세력에게 핍박받고 수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님의 모습은 없다. 불의에 분노하며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의 신앙생활과 별 관련이 없다. 하느님의 창조질서가 내재된 4대강이 인간의 탐욕으로 마구 파괴되고 변형돼도, 자본가들의 탐욕에 의한 부당 해고에 저항하기 위해 한 연약한 여성 노동자가 고공 크레인 위에서 계절이 네 번 바뀌는 동안 혼자 생활하는데도, 유네스코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제정한 제주도의 강정마을에 사실상 미국을 위한 해군가지를 건설하려는 정부에 맞서 온 제주도민이 수년에 걸쳐 피눈물을 흘리며 투쟁을 하는데도, 그런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목자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한미FTA도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심각한 불평등 속에 주권 상실의 여지가 농후한데도, 그것에 관한 얘기는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한다.

 

그런 현실이 나는 슬프고 암울했다.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스스로 해소하고 위안 받기 위해 지난 1년 동안 매주 월요일 오후 여의도를 갔는지 모른다. 성당에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한다는 게 부끄럽고 죄스러워 내 나름 열정을 사르듯 고생을 감내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나로서는 교회의 사회교리와 '사회교리 주간' 설정을 진정 희망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교리가 하루빨리 우리 교회에 정착하고, 신자들 전반이 사회교리에 익숙해지고 사회정의 문제에도 눈을 크게 뜨게 되기를 학수고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2011년 12월 15일 발간된 천주교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의 계간 <기쁨과희망> 제8호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1.12.27 12:05 ⓒ 2011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2011년 12월 15일 발간된 천주교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의 계간 <기쁨과희망> 제8호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사회교리 #천주교 주교회의 #강우일 주교 #사회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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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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