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화살은 적장의 목을 관통하고...

[역사소설 함흥차사 ②] 승리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밀스런 집단

등록 2012.01.18 10:34수정 2012.01.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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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을 넘어 황산으로 진출한 이성계의 앞에 마침내 적이 나타났다. 제법 경사진 구릉에 설치한 목책의 뒤에 정렬한 왜구들은 이성계로서도 처음 보는 규모였다. 특히 대오가 정연하고 기병들에 엄호되어 정규군으로 손색없는 일단의 부대는 아기발도의 본진이 분명했다.

이성계의 동북군을 발견한 왜구들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닿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하는데도 바위가 굴러 내리지 않았다. 적지에 고립된 놈들답지 않게 접근을 막기 위해 바위라도 굴리는 최소한의 조치도 하지 않는 것을 본 이성계가 정지를 명했다. 적이 이렇게 나오는 이상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결전에 앞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에 최영의 본진이 당도했다. 간단하게 보고를 마친 이성계가 이지란을 불렀다.


왜구들이 크게 함성을 질렀다. 얼굴을 위시한 온몸과 전마(戰馬)마저 빈틈없이 철갑으로 감싼 웅장한 체구의 무사가 작두 같은 칼을 치켜들고 나서는 것이 보였다. 갑주를 피로 칠갑한 아기발도가 나타나자 고려군들은 사색이 됐다.

최영의 본진마저 불안하게 웅성거리는데 이성계와 이지란이 동시에 활을 쏘았다. 아기발도의 좌우에 있던 왜구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사십 명 이상이 죽어 자빠졌는데, 아기발도의 오른쪽에 있던 놈들은 왼눈에 화살이 박혔고 왼쪽의 놈들은 오른눈에 화살이 박혔다.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하던 신궁의 속사에 아기발도마저도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아무리 명궁이라고 해도 전신을 철갑으로 감싼 아기발도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용기를 수습한 아기발도가 고함을 지르며 돌격하는 순간, 바람을 찢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큰 망치가 때린 것처럼 엄청난 충격이 투구를 강타했다. 호랑이를 사냥할 때, 일격에 죽이기 위해 가운데 손가락이 튀어나온 것 같은 주먹 모양의 무쇠에 가는 구멍을 뚫어 맹수를 위협하는 굉음을 내는 향전(響箭)이 투구에 적중한 것이었다.

산악을 무너뜨릴 기세의 고려군, 왜구를 베다

무서운 힘이 실린 이지란의 향전에 정통으로 투구를 얻어맞은 아기발도가 뒤에서 머리를 잡아챈 것처럼 고개가 젖혀졌다. 이를 악물고 고삐를 틀어잡아 겨우 낙마를 면한 아기발도의 목에 이성계의 화살이 틀어 박혔다. 유일하게 철갑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주 작은 빈틈의 한가운데를 관통당한 아기발도가 피를 뿜으며 무너졌다. 왜구들은 물론 고려군들까지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최영이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성계의 호령에 동북군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이성계와 이지란은 물론 이리가죽의 무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며 내달았다. 전면을 향해 집중된 수백 발의 화살은 거의 목표를 놓치지 않았다. 아직도 아기발도의 죽음을 믿으려 하지 않고 멍하게 바라보던 왜구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놈들도 시장바닥에서 어미의 손을 놓친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총공격을 명령받은 고려군은 산악이 무너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마침내 적에게 격돌한 이성계가 칼을 뽑았다.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는 왜구를 죽이는 것은 갓 태어난 강아지를 때려잡는 것처럼 수월했다. 그래도 저항하는 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약간의 난전이 벌어졌다. 전열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한 이지란이 부장들에게 주의를 주려는 순간 느닷없는 공격에 측면을 찔렸다. 이성계에게 사살당한 아기발도의 본진이 덤벼들었다.

여느 왜구들과 달리 오래도록 가문으로 이어진 그들은 정규군 이상으로 강하고 견고하게 결속했다. 돌아갈 길을 잃고 주군까지 전사한 왜구들이 오직 복수를 위해 덤벼들자 도주하는 적을 죽이며 느슨하게 싸우던 동북군이 수세에 몰렸다. 이성계를 발견한 왜구들이 이를 갈며 덤벼들었다. 이미 목숨을 도외시한 왜구들은 하나가 죽으면 둘이 덤볐고 칼과 창을 맞아도 죽을 때까지 달려들었다. 선두와 본대를 분리시킨 왜구들이 흉맹하게 덤벼들었다. 본진에서 지휘하던 최영이 이성계를 구원하라고 명령하는 순간 그토록 악착스럽던 왜구의 공세가 제동이 걸렸다. 

참수의 현장에서 독수리들은 군무를 추고...

간격이 벌어졌던 이리 가죽의 무사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추격하던 적과 찔렀던 적을 버린 무사들이 화살을 집중시켜 왜구를 저지하는 사이에 근접해 있던 무사들이 이성계를 단단히 감쌌다. 최강의 왜구들이 사력을 다해 덤벼들어도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다. 화살이 떨어지거나 활을 쏠 수 없을 정도로 근접하면 날렵하게 휜 칼과 매서운 창으로 적을 떨어뜨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드러난 빈틈에 칼과 창을 박아 넣는 이리가죽의 무사들은 이리 떼가 말을 타고 싸우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렀다.

중과부적으로 당하거나 배후에서 찌른 창을 맞아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스러지는 그들에게 왜구들 가운데서도 독하기로 소문난 아기발도의 왜구들까지 공포에 질렸다. 동북군의 본대가 합류하고 최영이 급파한 부대가 당도하여 왜구를 섬멸한 다음에도 육탄의 결진(結陣)은 풀리지 않았다.

뼈와 심줄을 자르느라 무뎌진 칼날이 또 하나의 죽음을 수확했다. 여러 차례의 칼질에 거칠게 잘려나간 목덜미에 살점이 너덜거렸다. 뿜어지던 핏줄기가 압력을 잃고 걸쭉하게 흘러나오면서 푸들거리던 경련도 잦아들었다. 생포되거나 항복한 왜구들은 최소한의 자비조차 수혜 받지 못했다. 무고한 백성을 잔혹하게 죽이고 윤간하는 것도 모자라 인육(人肉)까지 서슴지 않았던 그놈들은 인간으로 분류될 수 없었다.

1만이 넘는 짐승들을 참수하느라 병사들의 팔에 쥐가 나고 구토까지 하는데, 상공에서는 독수리들이 축제를 즐기려는 것처럼 타원형의 군무를 흐드러지게 추었다. 이미 들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짐승들은 한동안이나 원 없이 고기를 포만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달랐다. 전사한 동료를 독수리에게 맡기는 이리가죽의 무사들이 회생하지 못할 것 같은 동료들의 고통도 덜어주었다. 머리를 잃으면 탱그리신(단군)에게 갈 수 없기 때문에 심장을 찌르고 돌아서는 그들의 뒤로 독수리들이 모여들었다. 형제의 고통을 덜어주면서도 그리 슬퍼하지 않던 그들은 머리를 잃은 동료의 시신이 발견될 때마다 서글프게 휘파람을 불었다. 영혼을 으깬 분말 같은 휘파람이 아득한 고향을 향해 스산하게 퍼졌다.
#역사소설 #이성계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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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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