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에게 내 머리가 100개여도 못 숙여"

[환상의 짝꿍 ②] 장준하와 김준엽의 삶과 우정, 고난의 시대에 행복했던 그들

등록 2012.01.23 18:32수정 2012.01.2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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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광복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식민지 조국의 광명을 되찾기 위해 일본군을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한 '마지막 세대'인 노능서(魯能瑞)·김준엽(金俊燁)·장준하(張俊河)의 20대 시절 모습(왼쪽부터). ⓒ <장정>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 게오르그 루카치

나는 이 시적인 문장을 대할 때마다, 글의 문맥과는 상관없이 두 명의 젊은이를 떠올리곤 한다. 젊은이의 나이는 각기 26세와 24세, 1944년 여름이었다. 그들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아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으며 주야장천 6000리 길을 걸었다. 지도의 목적지는 대륙 서단에 위치한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들의 이름은 장준하와 김준엽이었다.

격동의 현대사에서 우리가 겪은 두 가지 시련을 든다면 제국주의의 침략과 군부독재의 폭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장준하와 김준엽은 이 두 참혹한 시련을 모두 회피하지 않고 살았다. 동시에 두 사람은 어지러운 시대가 안기는 온갖 수난과 역경에서도 마치 평생 반려자와 같이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다.

일제 말기 장준하는 목사 지망생으로 니혼신학교에, 김준엽은 게이오(慶應)대학 동양사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들은 똑같이 도쿄 유학생이었지만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의 학병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두 사람은 마치 합의라도 한 듯이 '숨거나 피하지 않고 학병에 응하되 곧 탈영하여 광복군에 합류한다'는 방침을 미리 굳히고 떠났던 것이다.

탈영에 먼저 성공한 측은 김준엽이었다. 그는 중국 동부 쉬저우(徐洲) 교외에 주둔 중인 일본군 츠카다부대 간부후보생 학병이었다. 1944년 3월 29일 새벽 2시, 그는 내무반 침상에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한다. 잠시 밖의 동정을 살핀 그는 어두운 목욕실 벽에 밀착해 있다가 도둑고양이처럼 몸을 움직여 병영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넘는다. 그의 배낭에는 실패했을 때 자결하기 위한 수류탄이 들어 있었다.

"환영, 한국혁명지사!(歡迎韓國革命志士!)"

강변에서 서성이던 그를 붙잡아 조사한 중국 군인은 붓과 벼루를 가져다 이렇게 썼다. 운 좋게도 그는 불과 탈출 4시간 만에 중국 국부군계의 유격대원을 만남으로써 영광스러운 '탈영 학병 제1호'가 될 수 있었다.


"한국분들이시죠? 탈출이시죠?" 장준하 만난 김준엽의 첫 외침

김준엽보다 5개월 뒤에 있었던 장준하의 탈영은 훨씬 어려운 과정을 겪는다. 세 명의 동료(김영록·홍석훈·윤경빈)와 함께 집단 탈영을 감행한 것도 어려움을 겪은 한 이유였다. 장준하가 배속된 곳 역시 쉬저우의 일본군 츠카다부대였다. 그는 거사 직전에 고향 집으로 성경구절이 담긴 편지를 부쳤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마서 9:3)

그는 학병 출정 전 신혼의 아내 김희숙에게 일러둔 말이 있었다. 그것은 '집으로 보내는 내 편지 끝에 성경 구절이 적혀 있거든 내가 일군에서 탈출한 것으로 알라'는 말이었다.

1944년 7월 7일 일석점호가 끝난 9시 15분, 장준하를 비롯한 네 명의 학도병은 각자 츠카다부대의 철조망을 넘는다. 인근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난 그들은 산속을 향해 무작정 줄달음을 쳤다. 어렵사리 산정을 넘은 그들 앞에는 난데없이 운하가 가로놓여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운하의 깊이는 사람 키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운하를 건넌 그들은 젖은 몸으로 허허벌판을 달렸다. 나침반을 보려 해도 성냥이 젖어서 켜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엷은 구름이 끼어서인지 북극성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쫓기는 노루처럼 공포 속에서 헐떡거렸다. 그들은 길과 인가를 피해 가며 조밭, 수수밭, 낙화생밭, 고구마밭 등을 고랑이며 두둑이며 가리지 않고 달렸다. 탈진과 허기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갈증이었다. 그들은 여명이 틀 때까지 걷거나 뛰었다. 그들이 다음날 오후 수수밭에서 중국 공산군 계열의 팔로군을 만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후 중국군의 선처로 김준엽과 장준하 일행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김준엽은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왁자지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으로 뛰어나가 보니 일본군복 차림의 청년들이 있었는데, 그 지성적인 얼굴과 느낌으로 대번 나는 나와 같은 한국의 학병일 것으로 단정했다. "한국분들이시죠?"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그들을 차례로 꽉 끌어안았다. 나는 이때처럼 감격에 차고 희열에 넘친 일은 없었다. (중략) 나와 장준하 형과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인데 이로부터 그와 나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그가 1975년 8월에 별세할 때까지 연인처럼 일생고락을 함께 하게 된다. - 김준엽 회고록, <장정> 1권, 249쪽

이번에는 장준하의 회고를 읽어 보자.

이윽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중국 군복을 입은 홍안의 미청년이었다. 어쩐지 말도 내기 전인데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와락 달려들 듯이 "한국분들이시죠?" 하고 분명한 우리말로 이렇게 물으면서 바로 우리 앞에 섰다. "탈출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는 더욱 힘차게 우리를 끌어안았다. (중략) 그 이름은 김준엽이라고 했다. 그는 곧 우리에게 친숙해졌다. 나는 10년 지기의 친구와 같은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 장준하 회고록, <돌베개> 64, 65쪽

김준엽과 민영주의 '영내 결혼식', 주례는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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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 ⓒ 자료사진

1944년 7월 28일 장준하와 김준엽 일행은 망한 조국의 임시정부를 향해 6000리 대장정에 오른다.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그들은 다시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으며 걸었다. 그들은 중국 유격대의 안내를 받아 장사꾼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벙어리 시늉까지 해가며 온갖 기지와 담력으로 일본군 점령지를 여러 차례 돌파한 후 9월 10일 광복군 훈련반이 있던 린취안(臨泉)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장준하와 김준엽 등은 잡지 <등불>을 간행했다. 그들은 거친 마분지 위에 일일이 붓으로 쓴 원고를 묶었는데 마지막으로 표지를 만들 종이가 전혀 없었다. 고심 끝에 김준엽은 표지용 헝겊을 희사했는데 그것은 그가 입고 있던 무명팬티였다. 덕분에 그는 한동안 팬티 없이 허전하게 지내야 했다.
  
린취안을 떠난 그들은 마지막 목적지인 충칭임시정부를 향했다. 그들은 매일 100리 길을 걸어서 꼬박 2주나 걸린다는 파촉령을 넘기도 했다. 심지어는 숲속에서 진짜 호랑이를 만난 적도 있었다. 그들은 한없이 양쯔강(楊子江)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침내 1945년 1월, 쉬저우 출발 7개월 만에 그들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이르렀다. 멀리 높은 계단 위에서 청색 중국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수행 인사들과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인자한 눈빛을 검은 테 안경 속에 담고 있는 그 노인은 바로  김구 주석이었다. 이곳에서도 장준하와 김준엽은 주석판공실장 민필호(임정 창업 공로자 신규식의 사위)의 지원으로 잡지 <등불>을 속간한다.

1945년 4월, 장준하·김준엽 일행은 시안(西安)으로 파견된다. 그들은 이곳에서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의 지휘로 미군전략첩보대(OSS)와 합작하여 벌이는 국내진공작전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특수훈련을 받았다. 장준하는 '신철', 김준엽은 '신일'이라는 가명을 썼는데, 돌림자가 같은 것은 두 사람이 형제임을 의미했다.

한편 이범석의 부관으로 근무하던 김준엽은 함께 근무하던 이범석의 여비서 민영주(주석판공실장 민필호의 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이렇게 되자 동료들의 질시와 눈총이 따르게 되어 김준엽은 괴로워한다. 이를 일거에 해결해 준 것이 장준하였다. 장준하는 동료들의 이해를 구한 후, 두 사람의 결혼을 적극 주선했고 아예 자청하여 주례를 맡아 결혼식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말년의 삶, 장준하는 불꽃같이 김준엽은 대쪽처럼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나의 광복군 시절)' 표지 ⓒ 나남

해방 3일 후인 1945년 8월 18일, 장준하와 김준엽은 이범석 등과 함께 광복군 선발대로 고국에 와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방해로 기수를 중국으로 돌려야 했다. 이후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장준하는 민주민권운동을 벌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고급 시사지 <사상계>를 주관한다. 중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김준엽은 <사상계>의 편집위원과 주간 등을 맡으며 적극 가담했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두 사람의 인생 여정은 조금 달라진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는 민주투사로 변신한 반면, 김준엽은 고려대 교수와 총장을 역임하면서 학자로서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민주·자유정신만큼은 단 한시도 굴절된 일이 없었다. 

격정적인 성격의 장준하는 독재자 박정희와 유달리 날카로운 각을 세우며 대립했다.

"박정희라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밀수왕초다."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씨가 잘났다고 해서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다."
"박정희씨는 우리 국민을 월남에 팔아먹었고 박씨는 과거 공산주의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조직활동을 한 사람이다."

장준하는 1974년 1월 박정희에 의해 네 번째로 구속된다.(긴급조치 1호 위반) 그는 '헌법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한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 받았다. 이때부터 국민들은 그를 가리켜 '재야 대통령'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고려대 교수 김준엽은 1957년 아세아문제연구소를 발기하여 부소장·소장을 맡았고 '중국학회'를 조직하여 중국학 연구와 독립운동사 연구의 기반을 다진다. 그가 펴낸 <중국공산당사>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등은 일관되게 '세계 속 한국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2년 고려대 총장에 취임한 김준엽은 학원 내에 상주해 오던 기관원을 축출했다. 그는 해직교수 구제에도 앞장서 전원 복직시켰다. 어용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직선제 총학생회 부활도 관철시켰다. 급기야 그는 전두환 정권의 압박으로 강제 사퇴하게 된다. 학생들은 한 달 남짓이나 '총장사퇴 결사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는 "그때 학생들의 시위를 인생의 최고 훈장으로 여긴다"고 했다.
 
김준엽은 1960년 이래 장면 내각의 주일대사 제의, 5·16 실세 김종필의 공화당 사무총장직 제의, 박정희의 통일원장관직 제의, 노태우의 국무총리직 제의 등을 모두 물리쳤다. 그의 대쪽 같은 선비적 삶은 관직에 관심을 갖는 오늘의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는 국무총리에 응하지 않는 이유를 노태우에게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노 당선자를 그동안 두 번 만났으나 잘 모르고, 새 헌법에 따라 전두환씨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데 총칼로 정권을 장악하고 많은 사람을 괴롭힌 그에게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숙일 수 없고,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자에게 투표한 내가 총리가 되면 야당을 지지한 66% 국민의 뜻에 어긋나게 되며,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들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그 스승이라는 자가 총리가 될 수 없으며,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거리는 풍토를 고치기 위해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야 한다."

한편 1974년 12월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던 장준하는 이듬해인 1975년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 등반을 갔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일본군 간부후보생 훈련과 광복군 훈련, 그리고 미군 특수공작훈련까지 이수한 그가 야산에서 실족사했다는 당국의 발표를 믿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이렇게 불꽃처럼 살다가 먼저 갔다. 그리고 김준엽마저 지난 2011년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

이 글의 서두에서 별을 이야기한 루카치는 '길이 나타나면 그들의 여행은 끝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시대의 문제적 인물'을 두고 한 말이다. 장준하와 김준엽 두 사람은 길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여행을 그만 끝내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 두 사람처럼 '창공에 빛나는 별을 보며 시대의 지도'를 읽는 인물을 앞으로는 여간해서 만나게 될 성싶지 않다는 예감 때문이다.
#장준하 #김준엽 #학병 #돌베게 #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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