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녀자들의 지옥시대, 후궁은 물론 공주까지 강간을...

[역사소설 - 함흥차사 5] 이방원의 첫 등장

등록 2012.01.24 10:38수정 2012.01.2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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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를 맞은 개경에 생기가 넘쳤다. 화려하게 성장한 고관과 부인들이 저자를 활보하고 송악산과 예성강에 모인 상춘객들은 흐드러진 봄을  만끽했다. 명절을 가장 기다린 사람들은 젊은이들이었다. 한껏 멋을 부린 청춘남녀들이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거나 으슥한 곳에서 입을 맞추기가 일쑤였다.

나이든 자들이 "요즘 젊은 것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며 타박을 주었어도 들뜬 분위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들이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을 탓하는 데는 부러움도 포함되었다. 몽골의 침략을 받은 이후부터 공민왕 초기까지는 대낮에도 아녀자들이 나다니기 어려웠었다. 원나라가 요구하는 품목 가운데 가장 주요한 것은 고려의 미인이었다. 수요를 채우기 위해 단오나 초파일, 팔관회 등의 명절에 놀러 나온 처녀들이 납치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충혜왕의 시대에는 아녀자들의 지옥이었다. 강간으로 아침을 시작해서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강간을 즐기고, 심지어 선왕인 충숙왕의 후궁은 물론 계모가 되는 원나라의 공주까지 강간하다가 결국 폐위 당한 충혜왕의 시대에는 바깥에 얼씬거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그렇게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노인들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성균관도 한껏 들떴다. 대과(大科)에 도전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젊은 인재들도 모처럼 허락된 외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과거제도를 부흥시키기 위해 특히 성균관을 아꼈던 공민왕이 죽고 이인임 등의 권신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많이 위축되기는 하였어도 성균관의 권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우왕도 6년 전인 즉위 2년에 성균관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며, 권신들도 아들들을 출세시키기 위해서 성균관에 입교시키는 형편이었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명절에 외출을 하면 단연 인기가 최고였으며 아름다운 처녀들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 억눌렸던 젊은 혈기를 마음껏 발산할 기회를 맞은 유생들이 외출을 나서는데, 실력으로 입교한 유생들과  아비를 잘 둔 덕택에 뒷구멍으로 들어온 망나니들이 끼리끼리 어울려 나갔다.

"왜 이리 늦었느냐?"

이방우(李芳雨)가 잔잔하게 웃으며 이방원(李芳遠)을 맞았다.


"큰형님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이방원이 급히 인사를 했다.

"어인 일은? 잘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느니라. 단오 같은 날이 아니면 만나기가 어렵지 않느냐."

이성계와 정실부인 한씨 슬하의 여섯 아들 가운데 장남인 이방우는 다섯째 이방원을 매우 아꼈다. 올해 성균관에 입교한 이방원은 이제 열다섯이었지만 체격이 걸출하고 기상이 범상치 않아 먼저 입교한 선배 유생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큰형님 댁에 가서 인사를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오시면 송구스럽지 않습니까?"
"우리 형제들 가운데 성균관에 입교한 사례는 오직 네가 유일하니 반드시 대과에 급제하여 아버님의 체통을 세우고 집안을 빛내야 할 것이다."

이방원은 열세 살이나 더 먹은 큰형을 매우 어려워했지만 이방우는 특히 이방원원을 자랑스러워했다.  

"응당 그리 하여야 할 것이나 본래 우둔하고 게을러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너무 겸양 말거라. 네 자질과 능력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남들만큼만 노력하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도록 해라. 아무렴 너 하나쯤 뒷바라지 못할 것 같으냐?" 

잔잔하게 웃으며 말하던 이방우가 이방원을 데리고 성균관을 나섰다. 그런데 길을 잡는 방향이 이방우가 사는 곳과는 반대방향이었다.

"큰형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오늘 같은 명절에는 작은 어머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작년에 일곱째를 생산하신 다음 또 회임을 하셨다니 아들 된 도리로서도 찾아뵙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앞으로 여가가 나면 종종 찾아뵙도록 하여라."

이방우가 말하는 작은어머니는 이성계의 둘째부인 강 씨였다. 강씨는 작년에 이방번(李芳蕃)을 낳은 이후 계속 개경에 머무르다가 다시 회임하였는데, 이성계와 혼인한 다음 개경에서 지내는 기간이 훨씬 많았다. 이방우가 강씨를 어머니라 칭하고 인사를 앞으로도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자 이방원의 기색이 아주 마뜩치 않게 변했다. 이방원은 강씨를 어머니로 예우하지 않았으며, 작년에 태어난 이방번도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가기 싫으냐?"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싫다면 굳이 억지로 권하지 않겠다. 아무튼 모처럼 바깥바람을 쏘이게 되었으니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늦지 않도록 해라."

집에 오라고 당부한 이방우가 허적허적 걸어갔다. 이방원이 강씨와 이방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성계도 알고 있었다. 이성계는 아직 어린 나이와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고집 탓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남달리 숙성한 이방원은 감수성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나이도 별로 많지 않은 강씨를 어머니로 섬기는 것이 내키지 않기는 이방우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소설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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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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