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곱 백발 할아버지, 좋지 아니한가

흰머리 때문에 겪은 웃지 못할 일들

등록 2012.02.06 11:19수정 2012.02.0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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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이 나빠서 밤길 운전을 하지 않는 편이라 밤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지난달 31일 한 모임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마침 하교 시간이라 학생들이 의자에 다 앉아 있었습니다. 학생 둘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힐끔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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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 아내는 그 때까지 남편 머리가 검은 머리인 줄 알았습니다. ⓒ 김동수

"어르신 앉으세요."
"응?"
"앉으시라구요."
"그래 고마워."

짧은 대화가 끝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은 몇 정류장을 더 간 후 내렸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왜 그 학생이 자리를 양보했지?' 양보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도 자리를 잘 양보하지 않는 것으로 잘 알고 있는데, 쉰 살도 안 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이유를 몰랐다가 이내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것은 머리카락입니다.

"할아버지 길 좀 비켜주세요"

제 머리카락은 중학교 3학년때부터 이른바 '새치'가 하나씩 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반 친구들이 '아저씨'라고 할 정도였고, 대학 때는 '할아버지'로 격상(?) 되었습니다. 지금은 흰머리카락 70, 검은머리카락이 30정도 입니다. 얼굴 생김은 아저씨인데, 머리카락은 할아버지이니 그 학생은 '어르신'이라고 생각해서 자리를 양보한 것 같습니다.

흰머리카락 때문에 겪었던 웃지 못할 일들이 많습니다. 1997년 8월에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를 만난지 두 달 만입니다. 당연히 그 때는 염색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나서 염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습니까? 서른 두 살 남편인 줄 알았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반백이 된 할아버지가 누워있으니……. 그래도 아내는 저를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97년 여름 어머니가 해주신 한산 모시적삼을 입고 시장에 갔습니다.(저는 98년으로 기억나는데, 아내는 97년이라고 합니다.)


"덥다, 더워."
"당신은 모시적삼을 입었으니 시원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할아버지 길 좀 비켜주세요."(이름 모를 50대 아주머니)
"……."(아내와 나)
"할아버지 길 좀 비켜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
"예!"
"당신 보고 할아버지라고 해요. '호호호호'"
"당신도 보기에 할아버지처럼 보여요."
"머리카락은 반백이지, 모시적삼을 입었지. 걸음걸이도 느릿느릿하지. 영락없이 할아버지 폼이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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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여름 어머니가 해주신 모시적삼을 입고 나갔다가 "할아버지 길 좀 비켜주세요"라고 들었습니다. ⓒ 김동수


벌써 13년 전입니다. 여름날 모시 적삼을 입을 때마다 아내는 그 때 일을 떠올립니다. 이뿐 아닙니다. 지난 2008년 1월 경기 구리에 사는 목사님을 만나러 온 가족이 갔습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친하게 지낸 형님 같은 분이었습니다. 사모님을 '형수님'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흰머리가 더 많은 것을 보자 대뜸 하는 말이 "동수씨 염색해야겠네" 라고 말였습니다.

염색했다가 옻 올라 보름 동안 고생

"형수님,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렵니다."
"아니야 염색해. 내가 해줄게."
"염색을 하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아내)
"이번에 그냥 한 번 해보면 정말 좋을 거야. 염색하면 얼마나 젊게 보이는데. 일본에서 보낸 좋은 염색이야. 동수씨 한 번 해보자. 내가 해줄게."

염색을 하고 나니 정말 젊어보였습니다. 누구보다 아내가 기뻐했습니다. 10년 전 남편이 '할아버지' 소리를 들었을 때 내심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이제 남편이 할아버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하루가 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부터 머리가 가려웠고고, 얼굴은 부어올랐습니다.  이틀 후에는 베갯잇이 온통 진물 범벅에 머리카락을 만져보니 풀 같고, 본드를 만지는 것처럼 찐득거렸습니다. 아내는 깜짝 놀랐습니다. 남편을 조금 더 젊게 하려다가 빨리 보낼 뻔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큰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학부모가 참관하는 공부 시간이 있었는데, 아내와 함께 갔습니다. 참관 수업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큰 아이가 전해 준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아빠!"
"응, 왜 그러니?"
"오늘 친구들이 아빠보고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세요."
"너는 좋겠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와서. 이런 말 했겠지."
"아니예요. 아빠 보고 할아버지라고 해요."
"뭐라고? 할아버지!"
"친구들이 '인헌아 네 할아버지 오셨다'고 했어요."
"… 그럼 너는 누구라고 했는데."
"당연히 할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빠라고 했지요."

아,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50대 아주머니가 "할아버지 길 좀 비켜주세요"라고 해도 마음은 조금 상했지만 웃으면서 넘어갔습니다. 젊게 보인다면 염색했다가 옻이 올라 보름 이상을 고생해도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큰 아들 친구들이 "할아버지 오셨다"는 말은 충격이었습니다.

"검은머리카락 뽑아 아예 흰머리로 만드세요"

그 때보다 흰머리카락은 더 늘었습니다. 한 번씩 아내에게 흰머리카락을 뽑아 달라고 하면 아내는 말합니다. 흰머리가 아니라 검은 머리를 뽑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아이들도 아빠 흰머리가 더 좋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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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머리는 흰머리가 적습니다. 앞쪽은 아예 흰머리입니다. 앞머리는 도저히 보여줄 수 없습니다 ⓒ 김동수


"여보 흰머리카락 좀 뽑아주세요."
"흰머리카락이 아니라 검은머리카락을 뽑는 것이 더 낫겠어요."
"아니 검은머리카락을 뽑아요."
"이 참에 검은 것 다 뽑아 완전히 흰머리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흰머리카락 뽑는 것보다 시간도 적게 걸리고, 흰머리가 더 멋지게 보일 수도 있어요."
"엄마가 뽑기 싫어하니 막둥이 네가 뽑아라."
"아빠 그냥 뽑지 마세요. 나는 아빠 흰머리도 좋아요."

이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검은머리카락 다 뽑아 버릴까요? 다 뽑아 아예 흰머리가 되면 버스 탈 때 학생들에게 자리 양보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요. 마흔일곱 살, 흰머리카락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웃지 못할 일들이 일어날 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싫지는 않습니다.
#흰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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