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설레게 했던 김어준... 그러나 이번엔 틀렸다

[주장] 성대결-마녀사냥으로 이어진 <나꼼수> 논란, 되짚어보니

등록 2012.02.15 18:51수정 2012.02.1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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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가까이 이어지던 '<나꼼수> 비키니 시위 관련 발언' 논란이 겨우 잦아들었지만 어느 쪽도 얻은 것은 없어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내내 겉돌기만 하던 서로의 이야기들이 안타깝고, 기승전결을 좇다 놓쳐버린 기회가 안타깝고, 결국 밑바닥을 드러내고야만 비겁함이 안타깝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가 조금 더 평등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논란을 더 붙들고 있을 생각은 없다. 그런다고 크게 달리질 것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과를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데야 어쩌겠는가. 또 그렇게 받아낸 사과로 기분이 나아질 리도 없다. 나는 다만 이번 일이 잊히기에 앞서 분명히 짚어두고 싶은 것이 있을 뿐이다.

내가 김어준을 좋아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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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꼼수다>(나꼼수)' 서울콘서트 이틀째 모습 ⓒ 권우성


우선, 김어준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밝혀두고자 한다.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1990년대 후반, 그러니까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우연히 김어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가 <딴지일보>라는 희한한 매체로 이름을 날리던 때였다.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그가 젊은 시절 세계를 돌며 겪었다는 믿기 힘든 일들부터 일찍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꿰뚫어보고 자신만의 매체를 만들기로 마음 먹은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강의를 듣는 내내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시대를 앞서 가던 그의 통찰력과 번뜩이던 위트는 스물을 갓 넘겼던 나를 무척이나 설레게 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0년도 더 지난 어느날, 신정아가 <4001>이라는 자서전을 들고 다시 세상에 나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신정아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보다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고 여겼고, 그래서 <4001>이란 책을 사서 읽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때 <한겨레>의 '김어준이 만난 여자'라는 꼭지에 신정아의 이름이 올라왔다. 김어준은 인터뷰 끝에 이렇게 적었다.

"최대한 공평하려 했다. 비난이 대세라고 정도 이상 당하는 걸 외면하는 건, 나쁜 놈이 힘세다고 침묵하는 것 이상 비겁한 거니까."


내가 아는 한 김어준은 신정아를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했던 단 한 사람의 인터뷰어였다.

그리고 최근에 그를 다시 만난 건 <닥치고 정치>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그의 '무학의 통찰'은 여전히 빛났다. 300쪽이 넘는 책 한 권 가득 그가 쉴 새 없이 쏟아낸 분석과 전망들 가운데 내가 시비를 걸 만한 구석이라곤 "이 책이 나올 때쯤이면 이미 문재인이 야권 지지율 1위를 하고 있을 거야"라고 말한 대목뿐이었다.

안철수 바람이 일기 몇 달 전의 인터뷰이고 보면 아무리 김어준이라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책의 끄트머리에 SNS와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플랫폼과 디바이스를 기반으로 또 하나의 매체 <나는 꼼수다>를 준비하고 있다며 '대박'이 날 것이라 큰 소리를 친다. 그리고 몇 달 뒤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미 <딴지일보> 시절보다 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세상이 뒤집어진 뒤였다.

내가 아는 김어준은 그런 사람이다. 나는 그가 '우리 편'인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엔 그가 틀렸다

그러나 이번엔 그가 틀렸다. 사실 그가 틀렸다는 사실은 이미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돼버렸지만, 애매하게 넘어갈 수가 없어 역시 논란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힌다.

"(성욕 감퇴제를 복용하고 있으니) 마음 놓고 수영복 사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라는 김용민의 말과 "가슴 사진 대박이다, 코피를 조심하라"고 쓴 주진우의 글은 문제가 있다. 그들이 그 말을 하고 글을 남길 당시에 당연히 염두에 두었을, 팟캐스트와 트위터 너머의 그 누군가가 불편해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다. 게다가 그 불편함에는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용민의 말은 곧 정봉주의 석방을 바라는 여성들을 향해 '당신들의 몸으로 정봉주에게 위안을 주라'는 뜻이며, 주진우의 글은 곧 '당신의 몸이 정봉주에게 큰 위안을 줄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그것이 어떻게 읽힐 수도 있는지를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사실 나를 비롯한 남성들끼리는 굳이 그것을 문제 삼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말과 글, 또 그 속에 담긴 생각은 결코 올바르지 않다. 아마 주진우도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나타난 동료 여성에게 '코피가 날 것 같다'는 농담을 건네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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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 멤버인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와 주진우 <시사인> 기자가 지난 10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정봉주법 통과 촉구 결의대회를 지켜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 남소연


정봉주 팬 카페의 어느 회원은 이를 두고 "우리는 진보의 치어리더가 아니다"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는데, 나는 그 글을 보며 어쩌면 그녀가 '치어리더' 자리에 '위안부'라고 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진보의 위안부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갇혀 있는 남성에게 그런 식의 '위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일제 강점기를 겪은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김용민, 주진우 두 사람에겐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생각의 뿌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또 그들은 여전히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용민의 말보다 사진이 먼저 올라왔다고 해서, 또 스스로 사진을 찍어 보낸 여성이 그들의 농담에 전혀 불편해 하지 않았다고 해서 -심지어는 그 여성이 실제로 정봉주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는 목적으로 기꺼이 자신의 가슴을 드러냈다고 해도- 그들의 말과 글에 담긴 뜻이 달라지진 않는다. 사회적 옳고 그름은 몇몇의 취향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닐 뿐더러, 스스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일과 남에게 몸을 드러내라고 말하는 것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억울해할 만한 몇 가지 왜곡과 오해들이 있었다고 해도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 김어준은 '성적 대상화'가 순간적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동지로도 감정이입이 됐다고 말한다. 다른 이를 대상화하지 않는 경우도 있느냐며 따져 묻기까지 한다. 절반은 맞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곧 자연스런 감정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위험한 논리로 이어지고 만다. 자연스럽기 때문에 옳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가 줄곧 조롱해온 '가카의 돈에 대한 숭고한' 애착에 대해서도 그는 연민을 가져야 옳다. 아무리 그것이 법의 테두리를 넘나드는 짓이라고 해도 누구나가 가질 수밖에 없는 자연스런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진보주의자로 사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다. 진보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가치가 아니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때 들은 교양 강의만으로 평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노력 없이 엉뚱하게도 진보 언론의 논의 수준을 비웃거나, '그림자'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며 논란을 비껴가려는 모습은 그래서 민망하기까지 하다. 정작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돌아보지 못한 채 '그림자'에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그들 자신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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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나꼼수> 한미FTA 반대 특별 야외공연 모습 ⓒ 유성호


멀리 돌아왔는데,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기껏해야 조금 모자란 수컷들이 저지른 실수로 끝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탁월한 통찰과 두려울 것 없는 배짱으로 권력을 조롱하던 그들에게도 실은 조금 모자란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논란이 커져가는 것을 오랫동안 말 없이 지켜보다 결국 비겁하게 피해가고 말았다. 그 사이 논란은 성 대결로 번져갔고, 곧 마녀사냥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곳 <오마이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나는 걸핏하면 시청 앞에 모여 불놀이를 즐기곤 하는 어버이들이 떠오를 정도로 섬뜩함을 느꼈다. 공지영도 자신의 트위터를 보며 절망했던 모양이다.

결국 이번 일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이른바 '꼴통 페미니스트'들이 건전한 상식을 갖춘 '합리적 시민들'에게 또 한 번 혼쭐이 나는 것으로 마무리되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꼴통 페미니스트들'은 다시 지하로 숨어들어 꽤 오랜 시간 숨죽여 지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 또 어떤 '꼴통 보수' 정치인이 술에 취해 한 마디를 뱉어 준다면 조금 빨리 땅 위로 올라설 수도 있겠지만, 요즘 여의도 분위기로는 그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 사회는 조금 더 평등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아니, 이번 일로 우리 사회는 조금 더 불평등해졌다. 직장에 다니는 여성 가운데 무려 72.6%가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경향신문, 2012.1.31)고 말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 대학교 1학년 때 여성학 교양 강의를 들은 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욕망을 농담에 실어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불편한 표정이라도 지으면 '그 정도는 나도 다 안다'고 타이르면 그만이다. 그리고 불편함을 드러낸 그 여성에게는 당연히 '꼴통 페미니스트'라는 차가운 낙인이 찍힐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제 여성들은 주변의 남성들에게 자신은 그런 '꼴통'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 받기 위해 더 환하게 웃어줘야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동안 <나꼼수>가 우리 사회의 시민 의식, 정치 의식을 끌어올린 것에 비하면 그깟 문제가 대수냐고 따질 것이다. 보수 정권을 끌어내리고 진보적인 정부를 세울 수만 있다면 이번 논란을 통해 얻을 수 있던 '소소한 진보'보다 훨씬 더 '크고 엄청난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올해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국회를 절반씩 나눠가진다고 한들, 또 문재인과 안철수가 앞으로 10년간 번갈아가며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고 한들 세상은 결코 우리가 바라는 만큼 바뀌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정부 때도, 참여정부 때도, 또 열린우리당이 국회의 절반을 차지했을 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올해 있을 두 번의 선거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있을 무수한 선거들 모두가 그 두 번의 선거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있을 모든 선거들을 똑같은 기대를 가지고 똑같이 진지하게 대해야 하며, 또 그 두 번의 선거를 위해서라면 쉽게 지나치거나 포기해도 되는 소소한 문제들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매일 같이 부딪히는 소소하다고 여기는 문제들, 그러나 한두 번의 선거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그 문제들이 실은 오늘 나와 내 이웃들의 삶을 더 숨 막히게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길 위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집 안에서도 불쑥불쑥 덮쳐오곤 하는 불평등과 차별이라는 폭력의 그림자들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꼼수>가 올해 있을 두 번의 선거에서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하든 그들이 이번 일을 통해 우리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비롯해 이번 일로 절망감을 느꼈거나 상처를 받았을 모든 이들을 위해, 그리고 아쉽게 놓쳐버린 기회를 위해 이것만은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나꼼수>와 청취자들에게 바라는 것

<볼륨을 높여라(Pump Up The Volume)>(1990)라는 20년도 더 된 영화가 있다. 인터넷도 트위터도 없던 시절, 10대들의 억눌린 욕망을 라디오 전파에 실어 보내던 어느 해적 방송을 다룬 영화다.

주인공(크리스찬 슬레이터)의 거침없는 방송이 또래들을 하나 둘 라디오 앞으로 불러 모으던 어느 날, 방송을 즐겨 듣던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지게 되고, 그 일로 죄책감을 느낀 주인공은 방송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B급 문화'로 따지자면 <나꼼수>보다도 서너 단계는 아래 급인 그야말로 막 나가는 방송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매체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책임만큼은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지난 며칠 <나꼼수>의 모습을 보며 아쉬웠던 부분이다.

나는 영화에서처럼 <나꼼수>가 경찰에 붙잡혀가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방송들이 더 많이 생겨나 그들이 무겁게 짊어지고 있는 짐을 여럿이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들이 진보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일도, 또 스스로 그렇게 여기는 일도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번 일에서 드러났듯이 우리 사회에는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도, 또 해결하지도 못할 일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이번 일처럼 <나꼼수>가 우리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일은 또 일어날 수 있다.

끝으로 이번 일로 실망하거나 상처 받았을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쫄지 마, 씨바!"
#나꼼수 #김어준 #비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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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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