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책읽는 날'이 3월 2일인 까닭은?

[해외리포트] 동화작가 '닥터 수스'를 아시나요

등록 2012.03.02 09:36수정 2012.03.0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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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어크로스 아메리카 데이' 행사의 일환으로 킨더가든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해군 병사. ⓒ 위키미디아 커먼스


작년 3월 2일,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킨더가든 클래스에서는 동화책 캐릭터 퍼레이드를 펼쳤다. 자신이 좋아하는 동화책 속의 캐릭터를 따라 변장을 한 아이들이 학교 주차장에서 행진을 하는 동안 초대받은 학부모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바빴다.

점심시간 학교 식당 메뉴 중에는 '초록 달걀과 햄'도 있었다. 해마다 3월 2일이면 이런 진풍경이 미국 여느 초등학교에서나 벌어진다. 이 날은 미국교육협회가 지정한 '리드 어크로스 아메리카 데이(Read Across America Day)'이기 때문이다.

1997년부터 시작된 이 기념일은 공휴일은 아니지만 미국 전역에서 즐기는, 특히 학교 차원에서 교사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각종 행사가 펼쳐지는 독특한 날이다. 미국교육협회가 '범국민적 책 읽기 운동'을 위해 특별히 3월 2일을 선택한 이유는 이날이 그 유명한 닥터 수스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닥터 수스라는 필명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이 작가의 본명은 시어도어 수스 가이젤(1904-1991). 2008년 <워싱턴 포스트>가 '미국 초등학교 1학년생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이라고 발표한 <초록 달걀과 햄>의 작가다.

닥터 수스의 <모자 쓴 고양이>와 <로렉스> 책 표지. ⓒ 닥터 수스


"교재에는 왜 말쑥하고 모범적인 아이들만 나오나?"

한국 사람 눈에는 그다지 완성도가 높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캐릭터들이지만 화사한 색감과 입에 착착 달라붙는 운율로 글과 일러스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닥터 수스의 작품들은 알파벳을 떼기도 전부터 미국 어린 아이들이 자연스레 거쳐가는 필독서로 꼽힌다.

그렇다고는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화 작가들 중에서 닥터 수스에 대한 사랑은 좀 유난스러워 보일 정도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미국인들의 애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 사이를 오가던 닥터 수스의 경력이 동화 작가로 굳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 <모자 쓴 고양이(The Cat in the Hat)>가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는지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1954년 5월 유명한 저널리스트 존 허시는 <라이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왜 학생들은 처음 읽기를 배우면서 수렁에 빠지는가?'라는 제목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읽기 프로그램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 장장 10페이지에 이르는 내용 중 이런 대목이 있었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접하는 교재들은 하나같이 말쑥하고 모범적인 아이들의 모습을 무미건조한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 나오는 아이들은 비정상적으로 예의 바르고 부자연스럽게 깨끗하다. … 학교 교과서들은 아이들이 어휘를 좀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림들, 예컨대 테니엘, 하워드 파일, 시어도어 가이젤 같은 상상력 넘치는 천재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작품들을 쓰면 안 된단 말인가?"


이에 대한 응답으로 당시 호튼 미플린이라는 출판사의 교육부서 디렉터였던 가이젤의 친구 윌리엄 스폴딩은 가이젤에게 '읽기를 막 깨우친 6-7세 아동들이 좋아할 만한 글과 그림을 담은 책'을 저술해 볼 것을 권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들이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한번 써 보게."

작가적 승부욕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이어 스폴딩은 6살짜리가 알아야 할 348개의 단어 목록을 전해 주면서 그 중 딱 225개 단어만 써서 책을 써 줄 것을 부탁했다. 그로부터 9개월 후 가이젤은 목록에 있던 223개의 단어와 추가로 13개의 단어를 집어 넣어 만든 작품을 건넸다.

딸아이 학교 오케스트라 행사 때 지휘를 맡은 음악 선생님들이 '모자 쓴 고양이'와 '싱원' '싱투' 이미지를 따서 '스트링원' '스트링투'로 분한 모습. 미국은 어른들도 이런 변신을 즐긴다. ⓒ 고은아


초딩이 한번 읽기 시작하면 내려놓을 수 없는 이야기

<모자 쓴 고양이>는 이렇게 목표 독자층과 사용어구까지 철저히 계산에 넣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총 1629개의 단어가 쓰였지만 어휘수로는 236개, 이중 221개 단어가 한 음절 짜리이고, 두 음절은 14개, 세 음절 단어로는 'another'가 유일하다. 철자수가 가장 긴 단어라고 해야 'something'과 'playthings'가 고작이다.

또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영어로 시를 짓는 데 있어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각운 맞추기(라이밍)'의 정수를 보여준다. 눈으로 읽는 스토리가 아니라 소리 내어 읽을 때 제 맛이 나는 책이다. 미국에서의 지명도에 비해 한국에서의 유명세가 그리 폭발적이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어린이들에게 익숙한 단어들을 인위적으로 조합해 상황을 만들어 나갔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하면 영어로 읽힐 때의 그 경쾌한 리듬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어느 비 오는 날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뜬금없이 모자 쓴 고양이가 나타나 집안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가 엄마가 집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 놓는다'는 단순한 설정은 극적이라기보다 어린아이들이 흔히 하는 공상을 현실화한 것처럼 장난스럽다. 하지만 바로 이 '장난스런 상상력'이야말로 미국에서 닥터 수스가 사랑 받는 진짜 이유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상상력이 각운을 바탕으로 한 천부적인 '스토리텔링'과 만난다. 그래서 닥터 수스의 이야기들은 그냥 플롯에 따라 전개되는 동화가 아니라 '이야기 시'다. 고대로부터 서양 문학은 서사시의 형태로 발전해 왔다. 호머의 <일리어드>나 <오딧세이>도 긴 이야기이지만 모두 각운에 바탕을 둔 시의 형태로 쓰여졌다.

영화 <로렉스> 한국판 홍보포스터 ⓒ 유니버설


"생명체는 아무리 작아도 생명체다!"

이처럼 장구한 서양 문학의 전통에 한계를 모르는 어린이다운 상상력으로 내용을 채우고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일러스트로 구체화한 작품들. 이 점이 바로 닥터 수스의 성공을 견인해 온 특징이 아닐까? 여기서 더 나아가 몇몇 작품에서는 사회참여적 메시지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호튼>은 정글에 사는 코끼리가 아주 작은 먼지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걸 듣고 그 안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후'라는 생명체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다른 동물들로부터 이 먼지 속 마을을 보호해 주려고 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화를 담았다.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는 문구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생명체는 생명체다. 그게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A person's a person, no matter how small!)"

한때 낙태 반대 운동가들은 이 문구를 자신들의 모토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작품 속 캐릭터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을 선호했던 닥터 수스지만 작품 의도와 상관없이 너무 과용되기 시작하자 1986년에 철회해 줄 것을 요구하고 사과를 받아낸 바 있다. <호튼>은 2008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약 3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환경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로렉스>는 환경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로렉스 프로젝트'를 발족시켰고, 봄에 열리는 '지구의 날' 행사 때면 종종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받아왔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로렉스> 표지에는 '지구 친화적 로렉스 프로젝트, 재활용지에 인쇄함'이라고 적힌 문구가 스티커 모양으로 포함돼 있었다.

올해는 이 작품을 토대로 한 3D 애니메이션 영화가 닥터 수스의 생일인 오늘(3월 2일) 미국에서 일제히 개봉된다. 미국교육협회도 얼마 전부터 올해 리드 어크로스 아메리카 데이의 주제를 '그린'으로 정해놓고 책 읽기와 환경 캠페인, 영화 홍보를 겸하고 있다. 목소리 연기에 잭 에프론, 테일러 스위프트 등 아이돌 스타들이 참여해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에서도 4월 중 개봉 예정이다.

이로써 닥터 수스가 남긴 44권의 책들 중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모자 쓴 고양이>(2003년), 짐 캐리가 주연한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2000년), <호튼>(2008년)에 이어 <로렉스>까지 모두 네 편으로 늘어났다.

한편 지난해 가을에는 <피터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찰리와 초콜릿 공장> 등 어린이들에게 익숙한 작품으로도 유명한 할리우드의 명배우 조니 뎁이 닥터 수스의 일생을 영화화하는 작품에서 닥터 수스 역을 맡고 제작에도 참여한다는 소식이 알려지기도 했다.

미국의 대형서점 반스 앤 노블에 가면 아동 서적을 모아 놓은 곳에 닥터 수스 책들만 따로 모아 진열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 고은아


전세계 15개 언어로 번역돼 2백만 권 이상 팔려

닥터 수스의 책들은 지금까지 전세계 15개 언어로 번역되고, 2백만 권이 넘게 팔렸다. 뿐만 아니라 1998년 이후부터는 닥터 수스의 판권을 관리하는 출판사 랜덤하우스에서 닥터 수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화자로 해서 자연과학 상식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책들과 단계별 읽기 시리즈 등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어 '짝퉁 닥터 수스' 책들도 시중에 엄청 많이 나와 있다. 이래서 미국 서점들에서는 흔히 아동 서적 코너에 닥터 수스 책들만 따로 진열해 놓는 경우가 많다.

2008년에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 해에 가장 돈을 많이 번 명사 13인을 발표한 바 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가 1위를 기록한 이 조사에서 작가로는 스누피로 유명한 만화가 찰스 슐츠가 3300만 달러로 2위, 1200만 달러를 벌어들인 닥터 수스가 6위를 차지하며 순위에 올랐다.

닥터 수스는 한 사람의 걸출한 작가가 우리 사회에 남기는 유산이 얼마나 거대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물질적 가치 창출도 대단하지만 그 유산이 위대해 보이는 더 큰 이유는 세대를 뛰어넘어 공감하게 되는 정신적 가치에 있는 것 같다.

올 봄에 영화 <로렉스>를 보게 되는 사람들이라면 작품 속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에 백분 공감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바로 당신과 같은 사람이 전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UNLESS someone like you cares a whole awful lot, nothing is going to get better.)
#닥터 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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