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로 부역'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추억 더듬기

등록 2012.03.09 11:00수정 2012.03.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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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신작로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지만, 옛날(그러니까 내 소년 시절)에는 노상 쓰던 말이었습니다. 일제 때 새로운 길이 많이 만들어지면서 그때부터 일상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말로 알고 있습니다.


일제 때 길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전에 없던 길이 새로 만들어진 경우도 있고, 걸어 다니거나 우마차 정도가 겨우 다닐 수 있었던 좁은 길을 자동차가 교행하며 다닐 수 있도록 넓힌 길도 있었습니다. 새로 만든 길과 넓힌 길 모두 신작로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사는 고장(충남 태안)은 특히 신작로가 많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태안은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을 지닌 곳이지요. 동쪽을 제외하고 3면이 바다인데, 리아스식 해안이 더욱 도드라진 곳이 바로 '태안반도'입니다.        

고장의 명산 백화산 정상에 올라 북쪽의 가로림만에서 남쪽의 천수만으로 눈을 돌리다 보면 그림 같은 풍광에 절로 감탄을 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풍광이 더욱 아름다웠을 테지요.

조선 세조 때 녹두 나물을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한 변절의 대명사 신숙주가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연결하는 굴포 운하 공사를 독려하기 위해 태안에 내려왔다가 백화산에서 바라보는 태안반도의 풍광에 취한 나머지 예정보다 훨씬 더 머무르고도 아쉽게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올 정도니까요.

백화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옛날에는 바다였던 곳들이 육지로 변한 모양새를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일제 때부터 크고 작은 간척공사가 곳곳에서 시행되었지요. 특히 태안반도에는 곳곳에 간사지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간척공사로 바다였던 곳이 육지로 변하니 그에 따라 신작로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태안에서 서산으로 이어진 지금의 4차선 도로도 일부 구간은 완전한 신작로였지요. 없던 길이 새로 생겨난 경우입니다.

또 태안에서 각 면으로 가는 네 갈래의 2차선 도로는 모두 일제 때 우마차 정도 겨우 다닐 수 있던 길을 넓힌 경우입니다. 역시 신작로이지요.

지금의 4차선, 2차선 포장도로들이 옛날 신작로도 불리던 시절, 신작로를 관리하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마을마다 구간이 정해져 있었고, 또 각 집마다 너비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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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태안읍 남문리의 슴밖이(서문 밖) 행길(큰길) 모습. 농작물을 팔러 구시장 저자로 가는 아낙네의 뒷모습. 저 기와집 뒤 행길 건너에 우리 집이 있었다. 오래 전에 저 기와집도, 그 뒤편의 집도, 행길가의 밭들도 다 없어지고, 행길은 방지턱들이 있는 포장도로로 변했다. ⓒ 지요하


우리 집이 있었던 태안읍(당시는 면) 남문2리는 읍내 서편 '마리지고개' 너머 '똥재갓' 앞 일대가 관리 책임 구간이었습니다. '마리지고개'는 고개 모양이 말갈기처럼 생겼다 해서 '말갈기재'로 불리다가 세월 따라 '마리지고개'로 변했는데, 길고 높았던 고개가 지금은 고개 같지도 않지요.

'똥재갓'은 마리지고개 너머, 서쪽을 향했을 때의 오른편 야산의 이름인데, 지금의 국방과학연구소 평가단 사원아파트(일명 측후소 아파트)가 있는 곳이지요. 옛날 새벽 읍내 저자에 나가 팔 푸성귀나 갯것들을 머리에 이고 가던 아낙네들이 가고 오는 길에 한 번씩 들러 볼 일을 보는 곳이라 해서 '똥재갓'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곳이랍니다.

그 마리지고개 너머 똥재갓 앞 일대가 우리 남문2리(당시는 2구)의 책임 구역이어서 나는 가끔 새벽에 아버지를 따라 부역을 나가곤 했습니다. 당시 책임 구간에 나가서 신작로를 보수하는 일을 일러 부역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녁에 남문리 2구 4반의 반장님이 각 집을 돌며 "내일 아침에 신작로 부역을 헤야유"하거나, "내일은 신작로 부역날이유"라고 연통을 하면, 다음날 이른 아침 모든 집들이 어김없이 신작로로 부역을 나가곤 했습니다.

신작로 부역 날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정해져 있었지만, 비가 많이 내려 길바닥 곳곳이 패였다거나 또 어쩌다 군수 이상의 높은 사람이 온다거나 하면 긴급 연통에 따라 부역을 나가야 했습니다.

각 마을의 책임 구간 안에는 또 각 집에 할당된 너비가 있었는데, 그 너비는 돌무더기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신작로의 한쪽 가장자리에는 대략 10미터 길이의 돌무더기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신작로 바닥이 패이거나 가장자리가 뭉그러지거나 하면 채워 넣거나 보수를 하는데 쓸 돌이었습니다.

그 돌무더기들의 양쪽 간격의 중간까지가 각 집의 책임 구간인 셈이었습니다. 처음 돌무더기를 만들 때는 산에 가서 돌을 주워 지게로 져 나르는 아버지의 수고가 컸던 것 같습니다. 그 일에는 어머니도 동원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지게로 돌을 져 나르는 수고는 하지 않았지만, 똥재갓으로 가서 똥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돌을 주워 소쿠리에 담아 들고 오는 수고는 몇 번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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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태안읍 동문리 태안성당 주변 풍경 가운데 위쪽 붉은 지붕 건물이 태안천주교회 옛 건물이다. 읍내 쪽에서 바라본 성당 주변 풍경인데, 당시 태안성당이 위치한 곳은 읍내에서 뚝 떨어진 변두리였고, 읍내와 성당 사이에는 논과 밭이 많았다. ⓒ 지요하


신작로를 보수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울퉁불퉁해진 길바닥을 쇠스랑으로 긁거나 파서 고르게 하고, 움푹 팬 곳은 적당한 크기의 돌을 깔고 흙을 덮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돌무더기의 돌이 줄어들고 해서 똥재갓에 가서 조심하며 돌을 주워 와야 하는 일은 사실 고역이었습니다.

가끔은 다른 집 돌무더기의 돌을 슬쩍슬쩍 집어다가 자기네 돌무더기를 채우는 불량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짓을 하다가 발각이 나서 새벽에 신작로에서 험한 소리로 된통 욕을 먹는 사람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각 집이 돌무더기에 신경을 쓰는 것은, 면사무소에서 검사를 나오기도 하는데다가 가끔 높은 사람이 시찰이 나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높은 사람이 돌무더기를 확인하러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높은 사람의 그 시찰은 백성들 처지에서는 사실 광범위한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각 집의 신작로 보수 관리 책임은 꽤 오래 지속되었고, 또 신작로 가장자리의 긴 돌무더기 행렬도 오래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굽이굽이 흘러 신작로들이 하나 둘 확포장이 되면서 신작로라는 이름도 사라지고 포장도로니, 2차선도로니, 무슨 길이니 하는 지칭들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집에서 유지해오던 신작로 가장자리의 그 돌무더기들은 훗날 도로를 포장할 때 요긴하게 쓰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훗날의 도로포장을 위해 주민들이 그처럼 신작로 가장자리에 수많은 돌무더기들을 만들고 오래 유지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작로 바닥을 고르게 하는 일에 뭔 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냐는 불평들도 있었지만….

그 신작로 부역을 가끔 추억하곤 합니다. '부역'이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내 소년 시절의 신작로 추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부역'이라는 단어는 내게 왠지 명쾌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음습한 기운이 피어오르기도 합니다. 일제에 부역했던 대가로 민족의 등골 속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들, 해방공간이나 6·25전쟁 전후에 부역이라는 죄목으로(또는 누명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 얘기도 떠오르곤 합니다. 하지만 내 소년 시절의 신작로 부역 추억은 그대로 그리운 추억입니다.
   
차를 몰고 포장된 도로를 경쾌하게 달릴 때는, 특히 마리지고개 너머 길을 밟을 때는 내 소년 시절의 신작로 추억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포장도로를 경쾌하게 달리는 무수한 운전자들 중에 옛날 신작로 부역 경험을 가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오늘에 어렸을 적의 신작로 부역 추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을까? 괜한 궁금증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오늘 무수한 운전자들이 경쾌하게 달릴 수 있는 포장도로의 작은 한 지점에는 내 소년 시절의 땀방울도 어려 있다는 사실이 길에 대한 애착심과 자부심 같은 것을 배가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이른 아침 아버지를 따라 마리지고개를 넘어가서 한바탕 신작로 부역을 하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엷은 안개자락 사이로 화들짝 비쳐 나오는 아침 햇살을 흐벅지도록 온 가슴에 안고 아침밥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던 날의 그 아슴한 풍경이 오늘 절절히 그립습니다.
#신작로 #부역 #태안반도 #간척공사 #간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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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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