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딸 응원해줬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들 문제 상담 오신 학부모를 보다 우리 아버지가 떠오르다

등록 2012.03.13 18:23수정 2012.03.13 18:4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작년 겨울 방학을 며칠 앞두고, 영현(가명)이 아버지께서 상담을 요청하셨다. 음악과 시를 사랑하던 녀석이 시사 잡지를 탐독하는가 하면 정치 서적에 집중하더니, 요즘 들어 사회에 너무 비판적인 듯해서 짐짓 걱정스럽다는 게 아버님의 말씀이셨다. 일반적인 학부모 상담은 어머니와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버지께서 직접 상담을 요청하신 것은 의외의 상황이다. 담임 선생님 주선으로 보건실에서 뵙게 되었다.


영현이는 혼자서 곡을 쓰고, 서정시를 찾아서 읽을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라서 아이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버지께는 낯설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 사회에 비판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며, 다만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감정에만 치우쳐 극단적인 판단을 하지 않도록 관점이 서로 다른 신문을 2개 정도 함께 구독하면서 관점을 정리해 나가도록 도와주라고 충고했다. 또한, 아버지께서도 영현이와 함께 시사 잡지 등을 함께 읽으시면서 자주 대화를 하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던 차였다.

아버지께서 잠깐 뜸을 들이더니 "선생님, 가족들이 제가 세 마리의 용과 싸우고 있다는 것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사와 부하 직원, 또 동료들 틈에서 아등바등하며 달리고 있는데…. 아들만 둘이라서 가급적하고 싶다는 것을 다 해줬던 편인데, 가장인 제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것 같아요. 녀석이 마음잡고 차분히 공부하면 좋겠는데 뜬금없이 이러니 걱정이 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방학 때, 영현이와 함께 여행하면서 아들과 더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라며 상담을 마치고 나가시는데. 그 뒷모습이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아들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학교까지 찾아오신 아버지를 뵙고 나니, 새삼 우리들의 아버지가 이 험한 세파를 얼마나 온몸으로 막아주셨는지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해졌다.

신문배달 고집 부리던 딸 편 들어준 아버지

a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가족>(2004)의 한 장면 ⓒ 튜브픽쳐스


초등학교 4,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친구들과 신문 배달을 해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여자애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말리시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해보라고 단번에 내 편을 들어주셨다. 결국, 사정이 생겨 며칠하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병원을 그만두고, 임용 시험을 준비하겠노라고 선언(?)했을 때에도 아버지는 성인인 네가 결정한 일이니, 끝까지 소신대로 해보라시며 격려해주셨다. 보건교육 운동을 하면서 모 단체에 전임자로 나갈 것 같다고 말씀드렸을 때에도, 부족해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라며 철부지 딸을 기꺼이 응원해주셨다.

돌아보니 우리 아버지도 하루하루를 세 마리의 용과 싸우면서 가슴으로 눈물을 삼키실 일이 많으셨을 텐데, 단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다. 덕분에 아버지가 어떻게 사시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나만 챙기며 줄곧 앞만 보며 달릴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뿐이랴. 가족들 돌보시느라,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자신을 투척하며 사투 속에서 버텨 오셨는데 어느 순간 아버지들의 그 치열한 몸부림이 그저 그런 당연한 일 인양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고마움을 가슴 깊이 상기할 겨를도 없이 이제는 아버지들이 도처에서 쓰러지고 계시는 듯싶어 안타깝다.

일전에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셔서 새롭게 고3 담임을 맡은 선생님께 "학교 주변이 온통 아파트여서 전보다는 학비나 급식비 지원 신청하는 학생들은 적겠네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웬걸요. 요즘, 반 아이들을 한 명씩 상담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아버님들 실직이 많은지, 깜짝 놀랐어요. 아이들이 신청하는 데 눈치 보고 있었나 봐요"라고 말한다. 뉴스에만 나오는 소식인 줄 알았는데, 급작스럽게 세 마리의 용과 싸우는 일조차, 호사스런 부러움이 될 만큼 버거워지신 아버지들이 주변에 많아지신 것 같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며, 세계시민이 지녀야 할 자질을 갖춘 아이들로 길러 내겠다는 우리 교육의 야심에 찬 계획이 과연 무너지는 아버지들을 외면하면서 성취될 수 있을까. 습관처럼 또 하릴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보건실 #아버지 #보건교육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3. 3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4. 4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5. 5 용산에 끌려가고 이승만에게 박해받은 이순신 종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