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묘 전경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도립공원 안에 위치해 있는 남연군묘의 모습.
예산군
'2대 천자(天子)가 난 명당터'로 유명한 남연군묘를 쓰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그 자리에 있던 가야사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때 불태운 절이 가야사가 아닌 묘암사라는 주장이 나와 이에 대한 검증과 재정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최근 <내포에 핀 연꽃 가야산의 절터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낸 김기석(64, 충남 태안, 상산역사문화연구회장)씨는 흥선대원군이 남연군묘 자리를 찾아낸 1844년보다 무려 90년 앞서 나온 <상산삼매(象山三昧, 조선시대 예헌 이철환이 1753년 충청도 가야산 일대를 4개월여 동안 유람하고 남긴 유기)>의 내용을 근거로 "예헌 이철환이 가야산을 유람한 뒤 기록한 1753년에 이미 가야사는 터만 남아 있었다. 가야사는 가야산에 있는 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어서 이후 가야사를 모칭(模稱)하고 다녔던 인근 절 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금탑(남연군묘 자리)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묘암사다.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도 잘못 알아 훗날 가야사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씨가 펴낸 책 <내포에 핀 연꽃…> 203쪽에 따르면 "<상산삼매> 1753년 12월 8일자 기록에 '도청봉 아래에 묵은 터가 있는데, 그것은 가야사터이다. 병선(=병화(兵火))이 나서 다 불에 타버렸다. 그 폐허에 무너진 형체만 남아 있다'고 나와 있다. 또한 나흘 뒤인 12월 12일자 글에는 '묘암사는 가야사에 속했다. 가야사가 잔악해지고 불탄 뒤로부터 그 본래 쓰던 이름은 버리고, (그 옆에 있는 절들이) 통틀어 가야사라고 모칭했다'고 돼 있다"면서 "대원군이 자기 선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불태워버렸다고 하는 가야사는 금탑 옆에 있던 묘암사였던 것 같다. 가야사가 없어진 뒤부터 묘암사, 관음사, 광명대가 서로 가야사라고 모칭을 하고 있고, 1753년 당시에도 묘암사가 금탑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고, 가야사가 없어지고 남아 있던 3개 사찰 가운데 대표적 사찰이 묘암사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이 묘암사를 가야사로 잘못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 돼 있다.
김씨는 이외에도 가야사와 흥선대원군의 인연에 대한 역사자료들을 근거로 제시하며, 이 부분에 대한 연구와 역사정리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충남도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돼 있는 남연군묘에 관한 이야기는 흥선대원군과 가야사, 금탑에 얽힌 비화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군지와 문화재 소개자료 등 현재 나와 있는 모든 자료들에는 당시 불태운 절이 가야사로 나와 있다. 때문에 이번 김씨의 주장이 맞을 경우 기록물들에 대한 정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역사서만 제대로 봤어도 진작 정정할 수 있던 내용이 지금껏 규명되지 않은 까닭은 무관심 때문이다. 가야산은 크지 않은 규모임에도 200여 개의 절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이는 경주 남산의 130개보다 훨씬 많은 수다. 가히 '한국에서 최초로 꽃피운 불교의 성산(聖山)'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풍수지리가들과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고, 많은 이들이 찾고 있는 이 가야산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시피하다"고 지적한 뒤 "가야산에 대한 유일한 역사기록물이라 할 수 있는 <상산삼매>의 완역본이 없어 지난해 예산문화원에 향토민속사업으로 제안을 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더라. <상산삼매>의 저자가 예산 고덕 사람이고, 가야산이 예산군에 있는 만큼 예산지역에서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내가 가야산 일대 마을의 기록을 위해 만났던 어르신들 열 분 가운데 일곱 분은 3∼4년새 벌써 세상을 달리하셨더라. 산증인들의 생전에 구술기록을 해두려면 빨리 서둘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