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중위는 한미 정보전의 희생양이었나?

미군 당국에 의한 치밀한 진실 은폐는 왜 필요했을까

등록 2012.05.21 15:00수정 2012.06.22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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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훈 중위가 의문사한 지 14년을 넘기고 있다. 만약 살인범이 있다면 누구인지, 아니 그보다 중요한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실체적 진실은 하나도 밝혀지지 않고 살인죄 공소 시효마저도 끝나가고 있다. 이에 필자는 그동안 숱한 의혹과 의문이 제기되었던 이 사건을 '김훈 중위는 한미 정보전의 희생양이었나?'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이의 실체를 밝히는 데 조금의 이바지를 하고자 본 글을 작성한 것임을 밝힌다. <기자 말>

1998년 12월, 그동안 자살로만 단정되었던 고 김훈 중위의 죽음이 그 아버지인 김척 예비역 장성과 <시사인> 정희상 기자의 끈질긴 추적으로 마침내 국회 국방위원회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그 당시 부소대장이었던 김아무개 중사가 긴급 체포되고 '원점부터 재수사'하라는 국민 여론이 뜨겁게 일면서 일약 중대 전환을 맞는 것처럼 보였다.

이날 김 척 장군은 인터뷰에서 소감을 밝힌 바 있다.

"훈이가 죽은 지 10개월 만에 국민의 힘으로 비로소 수사다운 수사를 처음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군대내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힐 계기가 이제야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든 책임이 있는 미군 측과 군 관계자들이 그대로 버티고 있는 한 이번 특조단의 재조사 방향도 걱정이 앞선다. 국민이 진실의 승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14년이 흘렀다. 최근 국방부가 마지못해 다시 실험한 총기 실험에서도 자살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부합하는 결과를 얻었지만(관련기사 : <10명이 당긴 방아쇠...'자살' 결론 뒤집나>) 사건의 진실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필자가 이 사건을 역추적하면서 가장 먼저 와닿은 것이 바로 김척 장군이 말한 "그러나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든 책임이 있는 미군 측과 군 관계자들이 그대로 버티고 있는 한"이라는 말이었다.

이 김척 장군의 예언처럼 결과론적으로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의문사에 대한 알 수 없는 실체적 진실은 승리하지 못하고 있다. 왜 미군 측은 처음부터 이 사건을 자살로 몰고 가려한 것일까? 이러한 은폐 의도는 과연 이 사건의 진실과 무관한 것일까?


미군은 왜 '자살'이라는 결론이 필요했나 

이 사건 발생 직후부터 국방부는 고사하고라도 미군 당국에 의해서 사건이 치밀하게 자살로 조작되고 은폐되었다는 수십 가지가 넘는 여러 정황들은 이미 각종 언론 보도와 조사 보고서에도 기록된 바 있다. 이 사건을 이미 언급한 새로운 시각에서 살펴보기 위해 미군 당국에 의해 조작 은폐되었다고 주장되거나 보도된 핵심 내용을 간단히 다시 기술한다.

1. 조작 논란이 되고 있는 철모 문제는 별도로 하더라도 시신을 처음 접수한 미 군의관은 고 김훈 중위의 총상 부위 혈흔을 지우는 조작(실수?)을 감행하였다. 이후 발견된 철모에서도 혈흔이 뿌려져 있음이 한국군 1군단 헌병대 조사 보고서에 있듯이, 그 철모는 아리스 군의관의 철모가 아닌 것이 분명해졌다(아리스 군의관이 실수로 벗어 놓은 것이라는 변명을 한국군과 미군 측이 한 바 있음).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총상이 근접에 의한 것인지 유무를 알 수 있는, 즉 자살 유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의 하나인 총상 부근 혈흔을 지운 것이다. 총상 사건의 기본 상식을 허무는 이러한 일을 왜 전문가인 미 군의관은 감행하였을까? 이 혈흔이 지워진 시신을 인수받은 한국 군의관은 단순히 자살이라고 명기했다가 유족들의 항의를 받은 것이다. 왜 미국 군의관은 한국 군의관이 자살로 오판하게끔 증거를 지웠던 것일까?

2. 이번 의혹 사건과 관련한 국방부의 여러 문서 조작 의혹뿐만 아니라 미군 당국도 조사 보고서를 조작하는 일을 감행했다. 최초 한미연합사의 상황조치 보고서에는 총성 발생에 따른 사고 등의 언급이 분명 있었으나, 이후 사건 발생 연도 말에 각종 의혹 제기에 따른 국회 국방위가 조사에 들어가자 국방위에 제출한 같은 한미연합사의 상황조치 문서에는 바로 이 총성 부분이 삭제된 것이다.

한국군 장교가 요약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느니, '총상(gun wound)'인데 '총성(gun sound)'으로 잘못 들어 그리 되었다느니 웃지 못할 변명만 거듭하였다. 총상이든, 그것을 잘못 들어 총성이라 했던 왜 그것을 지워야만 했을까?

3. 사건 직후 다른 부대원들의 접근을 막은 김아무개 중사로부터 "김훈 중위가 자살한 것 같다"라는 보고를 받은 한미연합사(유엔군 사령부)는 자살이라는 초 스피드 확인서를 만들어 수사관이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김동진)의 결재까지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 왜 그랬을까? 이 밖에도 현장의 펜스를 그날 다시 페인트칠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벌어진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당시 조사 보고서와 언론보도는 밝히고 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하였던 것일까?

4. 사건 이후인 4월 29일 1군단 사령부에서 있었던 한미 합동 수사 결과 발표장에서 제기된 유족의 숱한 의혹에 그나마 한국군 관계자는 "오늘 수사 발표 후에도 남는 의혹이 있다면 계속 수사를 하도록 미군과 협조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미군 수사대(CID) 대표로 나온 워잭 중령은 말미에 한국 국방 당국의 약속을 한마디로 일축하면서 "모든 수사는 끝났으며 미군 서류도 넘겨줄 수 없음을 주한 미군사령관 이름으로 확언한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시사인> 정희상 기자는 보도한 바 있다.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워잭 중령은 과연 무엇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 김 척 장군을 포함한 유족 관계자의 거센 항의에 한국군 수사 관계자도 (이후 8개월 후, 이 사건이 한국사회의 최대 이슈가 되기도 전에) 재조사 가능성을 표명하였는데, 왜 미군 수사 책임자는 이렇게 큰 소리를 친 것일까? 왜 그랬을까?

"수사는 끝났다" 워잭 중령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기가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아니하면 행동이나 발언을 조심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미국 정부나 군 관계자의 행동 지침임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사령관 이름으로 확언한다"고 전례 없이 큰소리친, 이 워잭 중령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 당시 무엇을 확신했던 것일까?

이후 시간이 경과하여 2000년 5월 그 당시 국방위 소속이었던 하경근 국회의원이 펴낸 '김훈 중위 의문사 관련 보고서'에도, '미군 측은 재조사 등에 협조하겠다는 형식적인 말만 하였을 뿐 실질적으로 하나도 협조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더욱이 1998년 12월 9일을 기점으로 국회 국방위가 관련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온 나라 언론들이 재조사를 요구하는 등 김훈 중위 관련 의혹의 재규명이 한국의 최대 이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이러한 상황을 유일하게 전한 외신으로 보이는 1998년 12월 14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는 유엔군 사령부의 확고한 입장을 재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뉴욕타임스>의 돈 커크 기자는 서울발 보도에서 김훈 중위의 의문사를 둘러싸고 한미 간 공동경비구역 관할권을 둘러싼 논쟁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의문사의 재조사에 한미 양국 군부가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관할권을 이양 요청한 한국의 요청을 틸러리 유엔군 사령관은 관할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조사에는 협조하겠다고는 밝혔으나 유엔군 사령부는 '김 중위 자살에 관한 미군 측의 최초의 결정(verdict)에 의혹(disputing)을 제기하는 한국의 시도(effort)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이전 조사가 성급하고 겉치레(shoddy)에 불과했다는 한국 국회와 언론의 거듭된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부는 이전에 진행된 한미 당국의 조사는 각종 증거들을 완벽히 조사했기 때문에 "이전 자살 결론에 의문을 제기할 어떤 증거도 없다"고 주장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당시 한국의 언론은 각종 의혹 제기를 통한 재조사 요구 등 김훈 중위의 의문사가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처럼 숱한 보도를 이어갔지만 이미 외신은 미군 당국의 입장이 확고부동함을 밝혔던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김훈 중위의 의문사 시점부터 14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 의문사를 둘러싼 유엔군 사령부(미군)의 입장은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왜, 자기 관할 지역에서 해당국의 장교가 의문사하였고 해당국 국민은 물론 많은 언론과 여론이 자살이라는 유엔사의 초기 결론에 14년이 지나도록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입장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998년 12월, 언론의 '의혹 제기'는 또 있었다

필자가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을 역추적해가면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들이 몇 가지 있다. 김훈 중위는 한미 정보전의 희생양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이 사건을 분석하고 있지만, 놀라운 것은 사실 국회 국방위의 조사 보고가 발표되고 온 나라 언론이 김훈 중위 의문사의 재조사 요구로 들끓고 있던 1998년 12월, 그 시점에서도 이러한 시각과 관련한 언론 보도는 있었던 것이다. 1998년 12월 11일, MBC의 김대경 기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 중사는 지난 90년 특전사 하사로 임용된 지 96년 10월까지 특전사에 배치돼 폭파전문 요원으로 훈련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격과 요인 암살 등 각종 전문교육 과정을 이수해 탁월한 평가를 받았지만 지난해 3월, 이례적으로 판문점 공동 경비대대의 행정관으로 배치됐습니다.

김 중사와 함께 근무했던 전역병들은 김 중사가 북한군과 술을 마신뒤 귀대했어도 일절 말을 하지 않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중대장도 김 중사와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그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군 일각에서는 그래서 김 중사가 군 당국의 지시에 의해 북한 측 공작에 대응한 역공작을 담당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 김 중사가 그동안 서울에 가짜 주소를 만들어 놓고 집 주인으로부터 각종 우편물을 넘겨받아 온 것으로 드러나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특전사 출신이면서 베일에 싸인 인물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군 일각에서 김아무개 중사가 군 당국의 지시에 의해 역공작의 임무를 담당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는 놀라운 보도였다.

이와 관련하여 MBC 김대경 기자는 필자와 한 전화 통화(한국시각 5월 20일)에서 너무 오랜 시간(14년)이 지나서 정확한 기억은 할 수 없으나 "그러한 이야기가 군 관계자 사이에서 나왔든 아니면 기자들 간의 이야기이든, <연합>이나 여타 언론사의 보도에 따른 보도이든, 그러한 여러 버전(종류)의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은 다소의 기억이 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시각의 보도는 사라지고 이후 언급할 '반쪽시각'에 사로잡힌 보도만이 가열되어 점점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

김아무개 중사의 잦은 월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알려진 대로 특전사 707 대테러 부대 정예 요원 출신인 김아무개 중사가 '이례적으로' 판문점 공동경비대대 행정관(부소대장)으로 배치된 데 이어, 김훈 중위의 의문사 사건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12월 국회 국방위의 조사발표가 나오고 긴급체포 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조치도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수많은 월북이나 김훈 중위 의문사 관련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후 언론에 진술한 당시 소대원들의 말처럼 "소대장이 죽어 부소대장이었던 김 중사가 문책받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카투사 의무병들을 관리하는 좋은 보직으로 영전한 것에 대해 부대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할 정도로 대우 아닌 대우를 받았다.

또한, 당시 단 한 차례만 월북한 것으로 안다는 국방장관의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김아무개 중사는 공동경비대 배치 직후인 1997년 7월경부터 북한 초소를 30여 차례 이상 제 집 드나들 듯 왕래한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또한 당시 특조단은 김아무개 중사가 스스로 위험을 느껴 1997년 11월 14일 이후 월북행위를 중단했다고 했으나 동년 12월 4일에는 감시 카메라의 방향까지도 바꾸어 가면서 월북했다가 돌아온 것으로 나타났다고 당시 언론들은 밝힌 바 있다.

이 모든 특조단의 조사 결과가 앞뒤가 안 맞는 것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1998년 2월 3일 북한 변용관 상위가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변 상위는 한국의 대위 계급의 북한 적공과 소속으로, 귀순 후 그동안의 공동경비구역(JSA) 지역에서의 북한의 한국군 사병 등 대남 접촉 활동을 한국군 정보 기관에 상세히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 당시 언론이 입수했다는(이 중요한 심문 문서를 한국군의 정보기관이 어떤 의도로 당시 언론에 넘겨주었는지도 중요한 의문이지만) 변 상위의 심문 보고서에는 김아무개 중사의 잦은 월북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언론들이 보도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희상 기자는 필자와 한 전화 통화(한국시각 5월 21일)에서 국방부 관계자는 문서가 기밀이라면서 당시 국방위 조사위원회에 들고 와 보여준 것을 메모해 보도한 것으로 기억이 난다고 밝혔다.

한국군 일반병들과의 접촉 사실을 모두 실토한 변 상위가 고기까지 구워서 수십 차례나 월북 왕래한 김아무개 중사의 행위는 진술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실일까? 이는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변 상위의 귀순과 그에 따라 남북한 군인들의 잦은 접촉이 알려져 군사분계선의 경계가 초비상인 상황에서 다시 김아무개 중사는 김훈 중위가 의문사하기 8일 전인 2월 16일 소대원을 기만하고 단독순찰을 강행하면서 또 다시 월북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그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보도한 바 있다.

자신의 월북 행위에 위험을 느껴 1997년 11월 14일 이후로는 월북하지도 않았다는 국방부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김아무개 중사는 변 상위 귀순 후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월북을 하고 돌아왔을까? 왜 그랬을까? 그의 월북 왕래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반쪽시각'으로 놓쳐버린 사건의 실체적 진실

2008년 12월, 국회 국방 소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언론은 타살 가능성에 이어 북한의 개입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나가는 보도를 이어나갔다. 그 당시 언론 보도의 상황을 알려주는 1998년 12월 9일의 <동아일보> 보도는 아래와 같다.

북한군은 변 상위가 귀순하자마자 "남조선군이 총으로 위협해 변상위를 끌고갔으니 송환하라"고 우겼다. 한국군이 "변상위는 귀순했다"고 버티자 북한군은 "반드시 보복하겠다. 남조선군 장교를 죽여서라도 끌고 오겠다"고 협박했다.

김 중사는 2월 16일경 근무 중 한 차례 월북했다가 돌아왔으며 8일 뒤인 24일 김 중위는 숨진 채 발견됐다. 이 같은 정황으로 미뤄 김 중사가 북한군에서 지령을 받고 김 중위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사건을 조사중인 국회 국방위원회 소위원회의 잠정 결론이다.

위의 보도처럼 이 당시 한국 언론의 보도는 변 상위의 귀순과 김아무개 중사의 잦은 월북왕래 그리고 소대원들의 진술 등을 바탕으로, 또한 당시 변 상위의 귀순 상황에서 북측이 납치 운운하면서 보복 등을 말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김아무개 중사가 북측에 의해 교사되어 김훈 중위 의문사에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취지로 보도를 이어나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만약 북한에 의한 교사라면 자신의 월북 행위가 동료들에게 다 드러날 만큼 공개적으로 하고 다녔던 김아무개 중사의 태도나 해당 추측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북한 측에 돌아갈 역 피해를 생각할 때, 이는 매우 사실 가능성이 낮은 추론에 불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추측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그러한 사항을 밝히면 미군 측도(국방부의 책임 문제는 거론되겠지만) 북한 측의 공작에 의한 소행인데, 크게 손해 볼 이유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다시 말해 미군 측과 국방부가 왜 그렇게 증거까지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아 가며 이 북한의 교사(?)를 받은 살인범(?)을 보호(?)하려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시사인> 정희상 기자도 필자와 한 전화 통화에서 이 사건 초기부터 이러한 시각(한미 정보전의 희생양)과 관련해서도 많은 의혹을 품은 바 있으며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으나 최근까지도 이와 관련한 확인할 수 없는 제보가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정희상 기자가 확인할 수 없다고 밝힌 것처럼, 필자가 언급하는 이 '한미 정보전의 희생양'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100% 진실이라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북한 교사에 의한 한국군의 상관 살해보다도 이 한미 정보당국의 역공작 속에서 그 실체적 진실이 들어날까봐 누군가에 의해서 피살된 것이 맞는다면, 아마 이는 그 정황상 기존의 추측보다도 만 배는 더 그 실체가 드러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 정보 당국의 역공작은 정녕 밝혀질 수 없는 것일까?

필자가 서두에도 언급하였듯이 고 김훈 중위의 의문사를 '한미 정보전의 희생양'이라는 시각으로 볼 때, 그동안의 미국 측의 자살이라는 일관된 태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역할만을 해온 국방부의 이해하지 못할 태도 등 많은 의문이 풀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미 언급한 데로 이는 한미 정보당국의 핵심적인 사항이라 밝혀내기가 쉽지 않고 아니 어쩌면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갑제닷컴>의 김필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A씨(현직 정보관계자)는 이날(2008년 4월29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후 한미연합사(CFC)가 다루는 군(軍) 기밀들이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이틀 정도면 평양에 유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이유로 미군 측이 일부러 대북(對北) 역(逆)정보를 흘리고 이것이 북한에 도달하는 시간과 함께 북한 측의 대응과정을 인공위성과 통신감청을 실시한 적이 있다"면서 "군내 기밀사항의 유출과 관련해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보도는 2008년 4월 30일 <프리존뉴스>에 보도되었고 다시 2010년 6월 4일 <조갑제닷컴>에 보도된 바 있다. 물론 이 보도는 군 내부의 안보의식이 허술하다는 상황을 보도하기 위하여 김필제 기자가 인터뷰한 2008년 당시 현직 군정보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특히, 한미연합사의 군 기밀들이 하루 이틀이면 평양으로 유출되고 있으며 이를 알고 미군 측이 일부러 역공작을 펼친 바 있다고 분명히 보도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을 말한 현직 한국군 정보관계자가 북한 정보기관 출신이라고 밝혔다.

어떻게 군 기밀(한국군의 기밀도 아닌 한미연합사 기밀)이 하루 이틀이면 평양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변용관 상위 귀순 등과 관련성이 없는지), 역공작은 언제, 어떻게 펼쳐졌는지(미군 측이 한국군의 정보도 아닌 한미연합사의 역정보를 흘리려면 당연 한미연합사 소속 한국군 장병을 역이용했었어야 할 것이며), 이를 알려준 북한 정보기관 출신(?) 현직(2008년) 한국군 정보관계자는 누구인지, 등 새삼 놀랍고도 새로운 의혹을 품게 하는 보도였던 것이다.

특히, 이 보도는 필자에게는 2008년 2월 3일, 북한군 적공과 간부급(대위)인 변용관 상위의 귀순과 관련하여서도 많은 의문이 들게 하는 보도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필제 기자는 필자와 한 전화 통화에서(한국시각 5월 21일) "당시 한국군 정보관계자는 탈북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맞기는 하지만 정보원 보호차원에서 이를 밝힐 수는 없다"고 밝혔다. 또한 "이 정보관계자가 귀순한 변용관 상위는 아니다"라고 밝히면서 이 역공작의 시기 등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한미 정보전의 희생양? 양심선언만이 밝힐 수 있을까?

사건 처음부터 타살의 가능성이 높은, 의문사가 분명한 사건을 그것을 밝히기는켜녕, 왜 미군 당국이 온갖 조작과 은폐 시도를 통하여 자살로 몰고 간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누구에 의한 단순(?) 살인이라면 그냥 밝히면 되는 것인데, 미군 당국은 왜 이 살인자(?)를 보호했어야 했으며, 국방부도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야만 했을까?

이번 국방부의 총기 실험 재조사 결과도 타살이 분명하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 지면서국방부와 국가보훈처는 원인 미상(?)의 사망으로 고 김훈 중위가 순직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적절한 보상과 함께 국립묘지 이양 등 순직(?)처리 할 것이라고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로막은 이 거대한 보이지 않는 장벽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풀지 못할 가공할 사건의 진실은 이제 어쩌면 이 사건 관련자의 또 다른 양심선언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훈 중위 #DIA #한미 정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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