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맞던 엄마... '엄마바라기' 딸은 이해 못 했어요

[기사공모-나의 어머니]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등록 2012.05.17 15:00수정 2012.05.17 15:0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동그란 얼굴에 납작한 코, 자그마한 체구에 따뜻한 손을 가진 그녀. 그녀는 벌써 일흔셋 할머니가 되어버린 나의 엄마다. 엄마에 대한 내 유년의 기억은 애달픔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리움처럼 늘 허기진 모습이었다.


한 달이면 삼십만 원 남짓한 아버지의 얄팍한 월급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아직 미혼인 삼촌 고모들, 그리고 나까지 생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엄마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장사를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집 근처에서 아이들 간식거리인 핫도그를 팔거나, 떡볶이, 어묵 등을 팔아 반찬값이나마 벌어볼 심산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장사의 규모도 달라져 청과물도매시장으로 진출하셨다. 난전에서 제법 큰 규모로 과일을 벌여놓고 장사를 하셨다.

오전 8시쯤 집을 나서면 오후 9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 나는 엄마를 기다리느라 늘 애가 탔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무렵이 되면, 보고 싶은 엄마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이 서러워서 눈물이 나곤 했었다. 길가 신작로 전봇대 아래에서 가로등 불빛을 고스란히 받아 앉고서 엄마를 기다렸다.

그때는 비가 오는 날을 늘 기다리면서 살았다. 비가 오는 날은 엄마가 장사를 못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런 날이면, 따뜻한 아랫목에서 엄마 목을 끌어안고 누워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입술이 터져 피가 나도 아버지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의 장사에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나 말고도 또 있었다. 그는 바로 아버지. 아버지는 엄마에게 장사하지 말라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하셨고, 어쩌다가는 엄마에게 화를 내기도 하셨다. 또, 술에 취해 들어오시는 날이면 때로는 손찌검을 하기도 하셨다. 입술이 터져 피가 나고, 몸 군데군데 멍이 들어도 엄마는 아버지 말을 듣지 않았다. 아침이면 묵묵히 일어나 장사 채비를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점점 더 괴롭히기 시작했고, 엄마의 귀가시간이 늦어지는 날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비도 오지 않는 낮시간 때에 엄마가 집에 있었다. 반가움보다는 놀라움이 더 컸다. 단 칸 월세방이 전부인 방이 살림살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 두 칸짜리 얻어서 이사 가면 쓰겠노라 장만해 놓고 쓰지는 못하던 밥그릇 세트며, 법랑 냄비 세트, 옷가지들로 방에는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었던 거다. 눈만 휘둥그레 뜬 체 엄마를 바라보는 나에게 엄마는 돈을 쥐어주었다. 밖에서 놀고 오라고. 과자 사 먹고 친구들이랑 놀다가 나중에 엄마가 부르면 그때 들어오라고….

엄마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열한 살 나이답게 엄마가 쥐어주는 돈을 받아들고 집을 나왔다. 엄마는 바보다. 엄마가 집에 있는 날이면 놀던 친구와도 놀이를 그만두고,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는 나이다. 엄마가 집으로 오는 걸 확인하면 숨소리조차 잦아드는 나인데, 엄마는 그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던 것이다.

얄팍한 과자 봉지를 손에 쥔 채, 가게 앞 평상에 걸터앉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그만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못 봤으면 좋았을 일을 보고만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열한 살짜리 아이의 가슴을 옥죄기 시작했던 것이다.

눈앞으로 아버지의 무서운 얼굴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기를 몇 번째…. 집 앞으로 화물차 한 대가 서는 것이 보였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낯선 남자가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이 지나고 일주일쯤이 지났을 때였다.

그날은 내 초등학교 4학년 가을운동회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예년과는 다르게 이번년도에는 엄마가 참석을 하겠다고 해서 나는 뒤로 넘어질 듯이 놀랐다. 일 년이면 봄, 가을 소풍 때, 말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엄마표 김밥을 준비해서 엄마가 학교로 오기로 손가락 걸어 약속했었다.

운동회 때 입을 예쁜 꽃무늬 블라우스 한 벌도 장만을 해 장롱 안에 걸어두었다. 둥둥 떠서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엄마가 나를 보러 학교로 와 준다는 것도 좋았고, 엄마가 김밥을 싸 온다는 것도 너무 좋았다. 운동회 날만큼은 비가 오지 말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그날 밤이었다. 장롱 안의 꽃무늬 블라우스가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 찬장 안에서 볶여지기만을 기다리다 하얗게 말라가기 시작하는 햄과 어묵의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 그리고 내가 엄마를 잃어버린 것이 그날 밤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엄마에게 늘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때로는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협박에 주먹질하면서까지 아버지가 알아내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그때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인상이 조금만 이상해도,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져도 나는 밖으로 나가버리곤 했으니까 말이다. 비겁하게도, 늘 엄마 혼자서 당하게 해놓고 나는 도망갔다. 아빠의 눈치가 조금만 이상해져도, 엄마는 내게 신호를 보내곤 했다. 어서 나가라고….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휴지라도 몇 칸 떼어 주며 방을 빠져나가라고 등을 떠밀곤 했던 것이다. 엄마는 고스란히 혼자서 당해 냈다. 아버지의 무서운 열기를, 의심을, 매질을 그 작은 체구로 오롯이 다 받아 겪어낸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운동회날 김밥 싸서 오겠다는 엄마의 약속... 그후로  

그날만큼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가 주기를 간절히 빌었건만, 하늘은 들어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운동회 날 비는 오지 않았으나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엄마표 김밥을 싸들고 나를 찾아온다 약속했던 엄마를 잃어버렸다.

할머니가 사 주시는 시꺼먼 짜장면을 목구멍이 막힐 지경으로 꾸역꾸역 입속에 집어 넣었다.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짜장면이라도 열심히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기어이 엄마는 오지 않았고, 그날 이후 아버지와 나는 엉망이 되었다. 매일같이 난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에 남아나는 살림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버지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이 박살이 났다. 엄마의 살림살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단박에 나를 닦달했다. 본 것을 모두 말하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말 한마디에 한 대씩 때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등을, 허리를, 다리를 손으로 때렸다. 또, 손에 잡히는 무엇으로 때렸다가, 나중에는 발길질이 되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맞는 것이 아프고, 겁이 났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말을 한다고 해서 맞지 않을 것 같지도 않았다. 미력한 나의 힘이지만, 엄마를 보호하고 싶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아버지가 한달음에 달려가 엄마를 고통스럽게 할 것만 같았다.

기어이 아버지와 엄마는 이혼했다. 애가 타게 엄마가 그리운 나는 아버지 곁에 남겨졌다. 그날 이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온통 어둠일 뿐이었고, 정지되었다. 희망이라는 낯선 단어와 잃어버린 꿈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한다거나, 땀을 흘려 움직이는 생동감 따윈 내 것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것, 애를 태우는 것, 기도하는 것 등이 빠져 버린 삶이었다. 그저 사는 것뿐이었다. 애 늙은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마음에 병이 들고 나니, 몸도 따라 병이 들었다. 40도 가까이 열이 올랐고, 무엇이든 먹는 즉시 토했다. 물조차 제대로 삼킬 수가 없었다. 학교조차도 가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차라리 나가 죽어 버려라"고 고함을 지르고 나갔던 아버지가 추위에 벌벌 떠는 나를 앉아 택시를 태웠다. 기사 아저씨에게 낯선 동네로의 행선지를 알려준 후,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오늘 하루만이다. 내일부터는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테니까! 오늘 하루만 자고, 아픈 것 나아서 와야 한다."

열에 들떠서 아버지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데다, 차 멀미까지 나를 괴롭혀서 머릿속이 온통 윙윙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지금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채로 그저 눈을 감고만 있었다. 눈을 떠서 창밖을 내다볼 기운도 없었기 때문이다. 택시가 멈췄고, 아버지가 택시에서 내렸다. 잠시 후 내 옆자리에는 엄마가 앉아 있었다. 꿈만 같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엄마와 잔 하룻밤... 거짓말처럼 몸이 나았다

OOO여인숙 계단을 올라가 이층이 시작되는 첫 번째 방 앞에서 엄마는 멈춰 섰다. 주머니를 뒤져서 열쇠를 찾았고, 문을 열어 나를 들여 보낸 후 엄마도 뒤따라 들어왔다. 엄마 신발과 나의 운동화를 방 안으로 들여놨다. 방문 옆에 신문지를 두고 그 위에 신발을 올려 두었다. 엄마는 나의 이마를, 양 볼을, 손을 천천히 그러나 깊게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열이 많네. 많이 아프네."

할 줄 아는 말이 마치 이 말뿐인 듯, 엄마는 같은 말만 되뇌었다. 말문을 열지 못하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 공포스러웠고,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막상 하려고 하니 해야 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저, 지나가는 시간이 무서울 뿐이었다.

"배 고프제? 아무것도 못 먹는다면서..."

엄마는 뭔가가 생각이 났다는 듯. 목소리가 커지고, 눈동자가 커지고, 행동이 빨라졌다. 커다란 카스텔라와 우유가 내 앞에 놓여졌다. 나는 마치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우유인양, 카스텔라인양 먹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먹는 즉시 토하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배가 고프기 시작했고, 망치로 두들겨 대듯 아팠던 두통도 말끔하게 가셨다. 우유 맛과 카스텔라 맛이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병이 말끔하게 나아진 것 같았다.

게 눈 감추듯 커다란 카스텔라와 우유를 다 먹은 후, 눈이 떠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찬찬하게 엄마의 방을 둘러볼 수도 있게 되었다. 벽에 걸린 옷 몇 벌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평소 엄마의 성품대로 보자기로 쌓여진 체로였다. 가난과 외로움이 방안 곳곳에 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엄마는 신이 난 사람처럼 나에게 다른 뭔가를 먹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아버지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며칠째 물도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채 열만 난다고. 어쨌든 하룻밤 말미를 얻었기에…. 엄마는 어떻게든 나를 살려서 다시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조금씩 눈빛이 돌아오는 나를 보며, 뭔가 가능성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바쁜 손끝에 단감이 있었고, 곧이어 감 껍질을 깎아 낼 과도를 찾는 분주한 엄마가 보였다. 한순간. 찰나와도 같을 그 순간에 나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보지 말아야 할, 두 번째 것이 눈에 보이고 말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것인지까지 단박에 알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 낮시간 집에서 엄마를 보았을 때, 가게 앞 평상에 걸터앉아 보았던 그 사람. 화물차 조수석에서 우리 집으로 들어가던 사람. 보기 흉한 '장미' 담배는 아마도 그 사람의 것인 모양이었다. 당황한 엄마의 손길에 의해 담배가 가려지는 것을 따라 나도 내 마음을, 눈을 가렸다. 지금은 저 담배 따위에, 엄마와 내가 있는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주섬주섬 꺼내 든 종이 위에는 이 노랫말이 적혀져 있었다.

"노랫말이 너무 좋아서, 다음에 널 만나면 내가 꼭 가르켜 줄라꼬. 손님한테 불러 달래서 적어놨지!"

사실, 엄마는 한글을 잘 모른다. 엄마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외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았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부모도 없고, 형제자매도 없다. 학교에 다닐 수가 없어, 한글을 익힐 수도 없었다. 그런 엄마가 노랫말을 적어두었다. 아니 그려 두었다. 삐뚤빼뚤 형체도 알아보기 어여울 정도로 상태는 엉망이었다. 종이 또한 마찬가지다. 하루에도 몇 번을 접었다 폈다 반복했을 것처럼 종이가 닳아서 푸석했다. 목이 메어서 '엄마! 나 이 노래 아는데….'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불러주면 나도 따라 불렀다.

"앞으로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많이 울겠구나!"
"이 노래는 나에게 엄마 대신이겠구나!"

엄마를 따라 노래를 부르면서 생각했다. 그렇게 하룻밤이 가고 있었다. 자지 않겠다던 것이 어느샌가 잠이 들었나 보다. 엄마가 흔드는 기척에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엄마는 말끔하게 일어나 앉아서 나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프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면, 엄마가 데리러 갈게. 방 한 칸 마련할 돈만 생기면 데리러 갈 테니…. 그때까지만 마음 흩트리지 말고, 공부해야 한다."

어제저녁 아버지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을 때처럼, 엄마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눈물이 나서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엄마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를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양말을 신겨 주었다. 하얗고 정갈한 양말이었다. 다이알 비누 냄새가 퐁퐁 풍기는 양말이었다. 엄마를 따라 여인숙 문을 나섰고, 아직 해가 뜨지 않는 어둑한 기운 사이로 이곳이 어디쯤인지, 지난밤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띄엄띄엄 보아 두었다. 아버지가 데리러 오기 전까지 여인숙 골목 풍경을 내 눈에 모두 찍어둘 생각이었다.

엄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자리에 눕지는 않게 되었다. 엄마의 말을 전부 믿어서는 아니었지만, 학교도 가고 공부도 했다. 그날, 새벽에 엄마가 신겨 주었던 양말을 빨기 위해 다이알 비누도 샀다. 엄마가 했을 것 같은 손놀림으로 양말을 빨았고, 마른 양말을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이따금 꺼내서 냄새를 맡곤 했다.

양말에서 풍겨오는 옅은 다이알 비누향은 그 무렵의 내게는 엄마의 냄새였기 때문이다. 양말에서 비누향이 희미해질 무렵이면, 다시 양말을 빨았다. 다이알 비누를 듬뿍 묻히고 오래오래 헹구었다. 엄마의 냄새가 좀 더 오래도록 양말에 배어 있기를 바랐다. 양말이 안 되고, 엄마가 가르켜 준 노래로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 가는 하늘을 보면서 엄마가 있을 여인숙 그 골목을 떠올렸다. 가 보고 싶었다. 특히 하루 해가 저물어 밤이 되면, 너무나 가 보고 싶었다.

그때, 그 시각이면 엄마가 그 방에 있을 테니까. 작고 습한 방에 고단한 몸을 뉘여, 천장을 바라보며 나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다가 어쩌면 울게 될지도 모르니까. 학교로 향하는 아침이거나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그 골목길이 간절하게 생각났다. 그 길로 그냥 달려가고 싶은 열기로 발바닥이 뜨거워지곤 했다. 딱 한 번만 가보자! 가서 엄마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오면, 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엄마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오자. 어느 날 아침 학교로 가는 대신 버스를 탔다.

○○○여인숙 문 앞에 섰을 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렸다. 이 문을 열고, 곧장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서 모퉁이만 돌면 바로 엄마의 방문 앞이다. 문을 두드리면,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엄마의 실체를 볼 수가 있다. 학교를 빼먹고 달려온 나를 엄마는 나무랄지도 모르지만, 엄마의 나무람은 나의 그리움에 비하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엄마를 볼 수 있는데, 엄마를 실감할 수가 있는데… . 학교 때문에 매를 맞는다고 해도 아프지도 서럽지도 않을 것만 같았다.

"엄마!"

모기만 한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떨리기 시작하는 목소리는 더더욱 힘을 실어 보내지 못했다. 엄마가 없으면 어떡하나! 순간,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엄마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분명하게 엄마를 불렀다. 문도 두드렸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린 건 잠시 후였다. 문 너머 이쪽에서조차 엄마의 당황스러운 얼굴이 보여질 만큼 엄마의 목소리는 허둥대고 있었다.

"누고?"

누군지를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닌 듯, 엄마는 곧장 다음 말을 했다.

"니가 어찌…. 니가 여기를 우째…."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 했듯이, 이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문이 열리고,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잠깐, 기다리라는 엄마의 목소리에 섞여서 희미하게나마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언짢은 듯, 둘아 눕듯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생생하게 내 귀에 와 꽂혔다.

엄마는 서둘러 나의 몸을 돌려 바깥을 향하게 했고, 엄마와 나는 여인숙 문을 빠져나왔다. 아직 오전 9시도 되지 않은 아주 이른 시각이었다. 엄마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나는 절망했다.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다는 걸, 미루어 짐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를 그리워했던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엄마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일에 힘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화풀이를 나 자신에게 행하며, 점점 엉망진창인 하루를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아버지가 재혼하셨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재혼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기다렸던, 꿈에서조차 잊지 않고 있었던 엄마와 함께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마음의 빗장은 단단하게 여며 잠가 둔 채, 엄마의 옆에서 짐을 풀었다. 엄마와 나 그리고 또 한 사람….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매일같이 함께 살기는 하였으되, 결코 함께 사는 삶이 아니었다. 엄마의 가슴에서 눈물을 뽑아내려 엄마 곁으로 간 아이처럼, 엄마가 그리워 내가 흘렸던 눈물의 몇 십 배를 엄마의 눈에서 확인하려는 못된 아이처럼, 나는 엄마에게 못되게 굴었다. 엄마에게 복수해 주자 단단히 결심한 아이처럼 엄마를 괴롭혔다. 엄마의 선택이 내가 아닌 것에 대해 복수하고 싶었다. 이해도 용서도, 엄마를 두고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순하지 않은 나 때문에, 늘 눈에 독기를 품고 사람을 대하는 나 때문에 엄마와 함께 사는 그 사람의 관계도 순탄하지 못했다. 나에 대한 불평불만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무조건 나만 감싸는 엄마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싸웠다.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내 마음대로 정해두고 그저 엄마에게는 통보만 한 후, 엄마는 급작스레 늙어갔다.

삶의 기운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처럼 헛헛해했다. 엄마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독기를 머금고 있는 사이사이 엄마는 나 때문에 절망했다. 나중에는 증오하기 위한 증오가 되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행여나... 나는 기다렸다

나는 엄마가 혼자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다시 예전의 엄마와 나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기를…. 엄마가 혼자가 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극히 나만 아는 철부지 어린 생각이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았던 엄마는 가끔 나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하면서 내 마음을 붙잡아 두었다.

엄마는 "올해가 지나면, 이번 일만 끝이 나면 함께하는 생활을 끝을 내겠다"며 한시적 동거임을 내게 말했었다. 아마도 끝끝내 내가 인정을 하지 않고,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지키지 못할 거짓말을 조금씩 시간을 연장하는 데에 쓰곤 했던 것 같다. 끝까지 엄마가 끝을 낼 수 없는 일을 두고, 나는 엄마를 종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손아귀에서도 엄마가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엄마는 언제까지고 아버지를 견디고, 술을 견디고, 손찌검을 견디면서 살았을 것이다.

재혼한 엄마의 삶이 행복했더라면…. 그 시절 내가 늘어놓는 변명이었다. 그랬더라면 아마도 엄마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엄마의 삶은 여전히 팍팍했고, 고단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해야만 하는 상황도 예전과 같았다. 또, 그는 술을 먹지만 않았을 뿐 언성이 높아지면 엄마에게 폭행을 가했다. 내가 가장 참을 수 없고, 이해할 수는 부분이었다. "왜? 바보처럼 사느냐"고 엄마에게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그래서 엄마가 더 미웠다. 평생을 못나게 당하고만 사는 엄마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가 막상 혼자가 되었을 때, 이제는 내가 혼자가 아니었다. 결혼했고, 꾸려나가야 할 가정이 생긴 것이다. 사랑에 지치고, 핏줄에 지친 엄마는 할머니가 되어갔다. 이제는 엄마로서만이 아닌, 여자로서, 사람으로서 엄마를 바라볼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속죄할 기회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유년시절, 나의 기억이 허락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시도 엄마를 잊어본 적은 없었다.

엄마가 그리우면 그리운 채로, 엄마가 미우면 미워하는 채로 엄마는 내 가슴에 늘 함께했었다. 열 몇 살 때는 몇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마음을, 엄마의 진심을, 그리고 엄마의 용기까지도…. 내 손가락 끝에 살짝 난 생채기가 아팠기에…. 엄마 가슴에 난 구멍에서 눈물이 마를 사이 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걸, 보면서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줄을 몰랐다. 더 아픈 쪽은 오히려 나라고 우겨대기만 했을 뿐….

그리움이었던 엄마의 존재가 지금은 죄스러움으로만 남아있다. 내가 엄마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미움으로 일관했던 그 긴 시간에 대한 속죄를 받을 길이 없다. 엄마를 엄마로서만 보지 말 것을, 한 사람으로, 한 여인으로 볼 수 있는 넉넉함 내게는 없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엄마 곁에서 밤을 보냈다

어쩌다가 한번 찾아오는 자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겠다고, 신작로 큰길까지 해도 뜨지 않는 신 새벽에 길 마중을 나와 있는 엄마, 동그란 얼굴에 납작한 코, 자그마한 체구에 따뜻한 손을 가진, 벌써 일흔셋의 할머니가 되어버린 나의 엄마.

결혼하고, 처음으로 엄마 곁에서 밤을 보냈다. 아이들과 남편밖에 모르고 세월을 사는 동안 엄마의 손가락 마디가 굽어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무릎 관절이 심해져 5분 이상을 지속해서 걸을 수 없게 된 지가 어느새 반년이 넘어가고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사느라 바빠 그랬노라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나 얼굴이 뜨거워서 하늘을 올려다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고, 필요한 치료를 하고자 며칠의 말미를 얻어 엄마 곁에 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 곁에서 엄마 손을 붙잡고 누워서 엄마의 노래를 부른다. 예전 같으면 노랫말을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엄마 손을 붙잡고, 엄마 냄새 가득한 엄마 방에 누우니 울지 않아도 좋았다. 엄마가 있으니까….

엄마의 향기를 대신해 주는 다이알 비누향, 엄마의 양말이 아닌,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엄마가 그려 주었던 노랫말을 따라가며 엄마의 체취를 기억하는 것이 아닌, 진짜 내 엄마가 있으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어머니 응모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나의 어머니 응모 기사입니다.
#어머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4. 4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5. 5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