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광야>의 시인 이육사가 태어난 날

육사의 자취가 깃든 대구의 조양회관을 찾으며

등록 2012.05.18 18:12수정 2012.05.1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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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망우공원의 조양회관. 조양회관(요즘은 흔히 광복회관이라 부름)은 1926년 23세의 이육사가 찾아와 '신문화 강좌'를 들으며 공부하고 활동했던 곳이다. ⓒ 정만진


1904년 음력 4월 4일, <청포도>와 <광야>의 시인 이육사가 태어난 날이다. 그런데 1904년 음력 4월 4일은 양력으로는 5월 18일이었다. 양력 5월 18일이라면, 오늘이다! '1980년 광주'를 떠올리게 하는 5월 18일이 올해는 이육사가 출생한 날인 것이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문득 오늘을 어찌 보낼 것인가 생각해본다. 음력으로 친다면 육사의 올해 생일은 5월 24일(음력 4월 4일)이지만 요즘 시대에 맞춰 양력 생일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광주에 가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고, 그럴 여건도 안 된다. 그뿐이 아니다. 망월동에 비하면 대략 1/3 거리에 있는 안동의 이육사문학관도 문득 찾기에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오늘은 <이육사 전집>을 읽어야 하는 날

어쩔까 망설이는 중에, 2004년에 '민족시인 이육사 탄신 100주년 기념 출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이육사 전집>이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학술원 회원)와 손병희 안동대 교수(시인)가 함께 편저한 책으로 '깊은샘'이 펴냈다.

이 책은 "이육사가 생전에 써서 남긴 작품들을 총망라한 전집으로 기획, 편집"된 "이육사 문학의 결정판"이다. 전에도 몇 권의 책이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지만 "최근에 발굴된 몇 편의 작품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과 "이육사가 아닌 동명이인의 작품이 잘못 수록된 것이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일반대중용을 탈피"하여 "전공자용으로 편찬"된 진정한 전집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따옴표는 책의 '일러두기'에 나타나 있는 표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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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기념출판된 <이육사 전집>.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손병희 안동대 교수가 함께 편저했다. ⓒ 깊은샘

책은 1부 '시', 2부 '소설', 3부 '수필', 4부 '문예, 문화비평', 5부 '시사평론', 6부 '방문기, 서간문, 기타', 그리고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록의 내용은 '해설-시와 역사의식', '이육사 연보', '이육사 작품 연보(발표순)', '이육사 연구 서지 목록'이다. 차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일반독자만이 아니라 전공자까지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전집'이라는 사실은 한눈에 확인된다.

이육사가 1909년 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동 882번지에서 태어난 날인 오늘, 나는 시인의 '전집'을 다시 꺼내 읽는다. 시인을 기려 안동에 세워진 이육사문학관을 찾을 형편도 안 되니, 그가 남긴 글을 읽는 예의라도 갖추려는 생각 때문이다.


육사의 시조 2편,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져

탄신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이육사 전집>을 다시 꺼내 읽으며 나는, 그동안 널리 알려진 바 없는 육사의 작품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의무감과 의욕을 느낀다. 육사가 신석초 시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발굴된 두 편의 시조와, '대구 약령시의 유래' 등 7편의 산문이 처음으로 소개된 '전집'을 읽는 중이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마음일 터이다. 그러나 지면상 모두 게재할 수는 없는 일, 시조만 전문을 읽어보자.

뵈올가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燭(촉)태워 안젓으니
리별에 病(병)든 몸이 나을길 없오매라
저 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가 하노라

경주의 옥룡사에서 병을 다스리느라 머물러 있던 중인 1936년 8월 4일에 쓴 시조 두 수이다. 작품 아래에 편저자는 "이육사가 우리에게 끼친 작품으로 시조에 속하는 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번에 발견된 두 수는) 평시조의 자수율을 엄격하게 지킨 전형적인 작품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육사의 시 작품 목록에 두 수를 더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화자는 살뜰하게 그리는 한 대상을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이 여기서는 일단 인격적 실체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무렵 육사가 모색한 것이 민족해방의 길이었다. 이렇게 보면 여기서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은 나라, 겨레에 수렴된다"는 해설을 붙여 두었다.

대구에도 육사의 자취가 서린 유적이 있다

전에 읽은 책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하지는 않아도 되니 오후쯤이면 여가가 날 터이다. 안동은 멀어서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 그의 자취가 깃든 유적이 있으므로 거기라도 한번 찾아보아야겠다. 북경으로 떠나기 전이던 1926년, 당시 23세였던 육사가 '신문화 강좌'에 참석하는 등 활동을 했던 조양회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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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독립운동기념탑(왼쪽)과 조양회관이 한꺼번에 보이는 풍경 ⓒ 정만진


조양회관은 대구의 독립운동가 서상일 선생이 식민지를 살아가는 청년 교육을 위해 1922년 사재를 털어 지은 건물로, 문화재청이 지정한 등록문화재 4호이다. 이곳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라디오로 들은 대구의 청년들이 가장 먼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던 곳이기도 하다. 본래 달성공원 앞에 있었는데 1982년 효목동 망우공원 내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퇴학당한 육사도 북경으로 가기 이전인 1926년 조양회관을 찾아 '신문화 강좌'에 참여하는 등 활동을 했다. 서상일 선생이 건물에 '조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자체가 '조(朝)선에서 해[陽]가 가장 먼저 비치는 곳'이라는 뜻에서였으니, 대구 지역의 애국애족 청년들의 집합처였던 이곳을 육사가 즐겨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양회관 옆 서상일 선생 동상 뒤편에 45m 높이로 우뚝 서 있는 '대구경북독립운동기념탑'도 볼 만하다. 높이 45m는 1945년의 해방을 기리는 뜻이다. 2006년에 완공된 이 탑은 정확하게 동쪽으로 바라보도록 건립되었다. 안내판은 그것이 '일본에 대한 준엄한 경고' 차원이라고 말한다.

조양회관과 대구경북독립운동기념탑이 있는 망우당공원에는 임란기념관도 있다. 이곳에서는 임진왜란의 역사를 사진과 기록물, 동영상 등으로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다. 또, 공원 이름에서도 짐작이 되듯이 이 공원 안에는 망우당기념관과, 임란 발발 당시 나라 안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의 동상도 있다. 이래저래 망우당공원은 역사와 민족의식을 곧추세우는 데에 아주 유효한 필수 답사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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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호산장성이라 부르는 박작성 꼭대기에서 바라본 압록강 쪽의 풍경. 이육사는 이 만주 일대를 달리면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 정만진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렷스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때도
참아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즈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조양회관 #이육사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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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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