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제주지사한테 '해군기지중단' 편지 쓰겠다"

[동행취재] 노란색 티셔츠 입은 세계적 석학 놈 촘스키 교수 "강정에 지지를" 호소

등록 2012.05.24 13:21수정 2012.05.2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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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MIT 명예교수(오른쪽)가 22일(현지시각) 제주 출신 평화활동가 고길천 화백과 함께 피켓을 들고 우근민 제주도지사가 해군기지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려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 최경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비판해온 세계적인 석학 놈 촘스키(Noam Chomsky) 매사추세츠공대(MIT) 명예교수가 우근민 제주도지사를 향해 해군기지 건설 공사를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촘스키 교수는 22일(현지시각) 제주 평화활동가 고길천 화백을 만난 자리에서 "(우근민) 제주도지사가 그의 영향력과 능력을 사용하여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동참하고, 심각하고 위협적인 일을 종식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를 호소한다"고 말했다. 촘스키 교수는 필요하다면 우근민 제주도지사에게 직접 편지를 쓰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고 화백은 촘스키 교수에게 제주 강정마을에서의 해군기지 반대 시위가 경찰에 의해 완전히 봉쇄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촘스키 교수는 "세계 여러 사람들이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의 항의에 동참하고 지지하기를 희망한다"며 해외에서의 연대 활동을 호소했다. 그는 특히 "극단적으로 위협적인(extremely threatening) 해군기지 건설이 종식되기를 요구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촘스키 교수는 '구럼비를 죽이지 마라'는 글자가 새겨진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전시회 도중 촘스키에게 날아간 고길천 화백의 고민

고길천 화백은 지난달 초부터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과 캘리포니아주 샌타로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제주 출신 화가로서 제주 4.3 항쟁에 깊은 관심을 보여 온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예술가 이전에 평화활동가로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이번 미국 전시회는 오랜만에 예술가로서의 본업에 충실할 수 있는 기회였다. 오는 27일까지 예정되어 있는 샌타로사 개인전은 5년 전 제주도를 방문한 한 예술가의 기획으로 어렵게 추진됐다.

그러나 바다 건너 들려오는 강정마을 소식은 고 화백을 생업에만 집중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경찰은 강정마을 주요 지역에서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시위대를 무차별 연행하는 강경책을 썼다. 주민들은 "집회의 자유를 허용해 달라"며 법원에 호소했지만 이마저도 지난 11일 기각됐다. 경찰에 의해 고립된 상황에서 강동균 강정마을 회장은 시야를 해외로 돌렸다. 전 세계 평화·환경활동가들의 연대를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멀리서 불편한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던 고 화백은 순간 놈 촘스키 교수를 떠올렸다. 작은 마을 회장의 처절한 외침보다 좀 더 영향력 있는 인물의 무게감 있는 호소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곧바로 촘스키 교수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세계적 석학'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촘스키 교수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따라서 보통 2~3개월 전에 면담을 요청해야 가능하고, 허용되는 면담 시간 역시 인사 나누기에도 모자랄 만큼 짧다.


그러나 고 화백의 연락을 받은 촘스키 교수는 이례적으로 2주 만에 면담 약속을 잡아줬고, 면담 시간 역시 평소보다 2~3배 이상 더 많이 할애해줬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에 대한 촘스키 교수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고 화백은 이제 막 중반에 접어든 전시회를 뒤로한 채 미련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미 동부 뉴저지주에 있는 누님 댁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고 화백의 두 손에는 미국 전시회를 위해 들고 온 작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부터 모든 게 급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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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평화활동가 고길천 화백(오른쪽)이 22일(현지시각) 놈 촘스키 MIT명예교수를 면담하기에 앞서 제주 해군기지 공사 중지를 촉구하는 내용의 피켓을 제작하고 있다. ⓒ 최경준


우선 고 화백은 강정마을에 연락해 '구럼비를 죽이지 마라'는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보내라고 주문했다. 지난겨울 강정마을을 다녀간 전승희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에게는 통역을 부탁했다. 또한 촘스키의 메시지를 영상에 담기 위해 뉴욕에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강혁진씨에게 자원봉사를 요청했다. 촘스키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 매직과 널빤지를 샀고, 면담 약속 시간 직전에 촘스키 교수 연구실 앞 로비에서 피켓을 제작했다.

촘수키 "경찰이 본토에서 들어온 것이냐?"

22일 오후 4시 20분(현지시각), 매사추세츠공대에서 가장 형이상학적으로 생긴 건물 8층 한 연구실에 고길천 화백과 촘스키 교수가 나란히 앉았다. 우선 고 작가는 평소 가지고 다니던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통해 현재 강정 해군기지 건설로 인한 구럼비 바위 등 자연훼손 상태를 소개했다. 그는 이어 해군기지 반대 시위 주민과 활동가들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 탄압 등 강정마을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유린 상황에 대해서도 집중 설명했다.

촘스키 교수는 고 작가로부터 "삼성에 의해서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생물권보전지구가 파괴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서 "지금 그렇다는 것이냐"고 관심을 보였다. 구럼비 바위에만 서식하는 멸종위기종 붉은말똥게의 사진에 호기심이 생긴 듯 이름을 다시 묻기도 했다. 특히 강정마을 주민들과 시위대를 연행하는 경찰 사진을 본 뒤, "이 경찰들이 본토에서 온 것이냐"고 물었다. 촘스키 교수는 "진압 전문 경찰로서 4.3 항쟁 이후 경찰이 본토에서 들어온 것은 처음"이라는 고 작가의 설명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길천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이 해군기지가 당초 민군복합항이라고 발표가 되었는데, 사실 이것은 해군 전용 기지였다. 한국 정부가 한국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제주 도지사는 공사 중단을 시킬 권한이 있다. 그러나 제주 도지사가 아직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동안 계속 (구럼비 바위 등은) 파괴가 되고 있다."

촘스키 "(고 화백이 가져온 강정마을 유인물을 들여다보며) 그 내용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다."
고길천 "(유인물을 가리키며) 이 사진은 가장 최근 것이다. 제주 도지사에게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리라고 시위를 하는 모습이다. 촘스키 교수도 제주 도지사에게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릴 것을 요청해 달라."

촘스키 "그렇게 하겠다.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할지 정보를 준다면 내가 (우근민 제주도지사에게) 편지도 쓰겠다."
고길천 "강정마을은 현재 경찰에 의해서 완전히 봉쇄되어 있다. 그래서 강정마을 회장이 전 세계를 향해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나 작은 마을의 회장에 불과해서 힘이 없다. 그래서 촘스키 교수가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해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연대와 동행을 호소해 줄 것을 부탁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제주도지사를 향해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촘스키 "제주도지사는 어떻게 선출되는 것인가?"
고길천 "선거에 의해서 뽑힌 사람이다. 그러나 도지사는 해군 편을 들고 있지, 제주 도민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 그래서 제주도민의 편에 서라고 부탁하고 싶다. (해외 평화활동가들의 연대 시위 사진을 보여주며) 이것은 영국 런던 한국대사관 앞에서 벌인 시위 모습이다. (엔지 젤터를 가리키며) 이 분은 강정마을에 와서 한 달간 살았다. 두 차례 경찰에 의해 연행이 됐고 폭행까지 당했다."

촘스키 "이 사람이 누구라고?"
고길천 "엔지 젤터다. 영국에서 온 노벨평화상 후보다. 그러나 지난해 3월 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됐다. 이것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시위 사진이다. 이뿐 아니라 시애틀,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연대 시위가 있었다. 이제는 해외에서 많은 연대 행동이 벌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촘스키 "내가 세계 사람들을 향해서 (강정마을과의) 연대를 호소하는 글을 쓸 수는 있는데, 그것을 실어줄 매체를 찾기가 힘들다. 어떤 기구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내가 아는 몇 곳에 얘기를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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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 촘스키 MIT명예교수(오른쪽)가 22일(현지시각) 고길천 화백으로부터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시위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최경준


노란색 티셔츠 입은 촘스키 "제주 주민과 연대할 수 있어서 영광"

촘스키 교수에게 설명을 마친 고 화백은 가방에서 노란색 티셔츠를 꺼내 건넸다. 그는 "이 티셔츠는 제주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제주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상징적인 옷"이라며 "전 세계 사람들이 시위를 할 때 이 옷을 입고서 한다"고 말했다. 촘스키 교수는 잠시 티셔츠를 들여다보며 관심을 보이다가 고 화백의 권유로 그 자리에서 티셔츠를 입고 카메라 앞에 앉았다.

촘스키 교수는 "멀리서나마, 세계 평화에 심대한 위협을 끼칠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며 평화의 섬 제주를 파괴하려는 행위에 항의하고 있는 용기 있는 제주 주민과의 연대에 동참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말했다.

촘스키 교수는 지난해 9월에도 고 화백과 만난 자리에서 "군사기지 건설은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이며, 중국을 견제하고 태평양 지역을 통제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엿보이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국제사회의 긴장을 심각하게 증가시킬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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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 촘스키 MIT명예교수는 22일(현지시각) 고길천 화백이 가져온 제주 해군기지 반대 티셔츠를 입고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호소했다. ⓒ 최경준


촘스키 교수를 만나고 나온 고길천 화백은 "샌타로사에서 아직 진행되고 있는 전시회가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제주도 사람"이라며 웃어보였다. 그는 이어 "촘스키 교수를 만나 연대 메시지를 얻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해 전 세계 양심적인 시민들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내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강정마을 해군기지는 결코 제주도나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근민 도지사 "공사 정지 명령 요건 충족되지 않아"

한편 우근민 제주도지사는 제주 해군기지 내 공유수면 매립공사 정지 명령을 내리기 위해 지난달 실시한 청문 결과와 관련, 22일 오후(한국시각) "(공사 정지 명령을 내릴) 요건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우 지사는 이날 한 종합편성 채널의 시사프로그램에 출연, "공사정지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우 지사는 "불법성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청문 결과를 보면 아직 공사정지 명령을 내릴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공사 정지 명령을 내릴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셈이어서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의 퇴진 요구 등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놈 촘스키 #고길천 #제주해군기지 #강정마을 #우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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