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밥? 백반?...이 차 없으면 모내기 못해요

충남 예산 모내기 현장에서 만난 농민들

등록 2012.06.04 18:14수정 2012.06.0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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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 모를 절반쯤 심어놓고 먹는 점심밥은 참 달다. 예산 발연리 농민들이 논둑에 둘러앉아 점심밥을 먹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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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대신 부지런히 들밥을 실어다 주는 식당 차의 정겨운 모습. ⓒ 장선애


어머니가 광주리에 삼베보자기를 씌운 들밥을 이고 저 멀리서 걸어오면, 바람이 밥냄새를 먼저 실어오고, 아버지의 허리가 저절로 펴졌다. 세상이 달라져 식당차가 들밥을 배달해오지만, 그래도 들밥은 여전히 냄새부터가 다르다. 더구나 무논에 모를 절반쯤 심어놓고 먹는 밥은 꿀맛이다.


5월 30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 발연리 모내기가 한창인 논옆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던 농민 4명을 만났다. "밥 있슈, 잡숫구 가유. 퉁퉁장두 있구, 들밥이라 맛있유"라며 지나는 이의 발길을 붙든다. 빈 논에 연둣빛 모가 제자리를 잡는 계절인데, 가뭄에다 못자리 병해까지 발생해 농민들의 어깨가 처졌다.

"모를 엎고 시작했으니, 올 같은 해는 도지주고 나면 (한 마지기에) 쌀 한 짝도 못 먹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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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자리 병해가 발생해 논에 심겨지지 못하고 논둑에 버려진 모판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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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할아버지가 이앙기로 모가 심겨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 장선애


20마지기 농사를 짓는 김정환(80)옹이 주름 가득한 얼굴에 수심 깊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내뱉는다. 그러고 보니 논둑에 애써 키운, 병난 모판들이 줄줄이 엎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김옹은 어쩔 수 없이 농협 육묘장에서 한 판에 2000원짜리 모판을 따로 사왔다. 금전적인 손해는 물론이거니와 초봄부터 들인 정성이 헛수고가 됐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김옹의 시선이 모를 심다 만 논으로 자꾸 향한다.

"구신이 씹어먹지 않아서 갱신히 돌아다니지, 나이 80에 농사짓는 눔이 오죽허것나."


무얼 그리 보시냐는 물음에 돌아온 자조 섞인 대답이다.

"허이구, 농촌서 일하는 사람만 불쌍허지. 인제 다 늙은이밖에 없으니 땅을 놀릴 수도 읍구, 헐 수 없이 짓는겨. 농사짓는 사람만 애매혀."

"지난번 국회의원 뽑을 때 누가 면세유 준다구 하드만. 그것두 다 생색이여. 농사 짓는 만큼 줘야지, 농사를 짓거나 안 짓거나, 얼마를 쓰거나 들 쓰거나 다 똑같이 주니 원. 이앙기 한 대 쓸려면 얼마나 드는지 아남? 하루에 겨우 60리터 나오는디 그 곱절로 들어가. 현실적으루 안 맞는 얘기지. 농기계 마력에 따라 지원해야 하는디 말여. 농기계 부속품 값은 또 어떻구. 요새는 기계가 농사를 짓는디, 한 번 고장나면 돈이 무섭게 들어."

"두구 봐. 앞으루는 농협만 돈벌게 돼 있다니께. 농협이 너무 비대해져서 봉급으루 다 나가잖어. 그나마두 일 많이 하는 밑에 직원들 봉급을 많이 줘야 하는디 왜 임원들이 그르케 많이 받아가는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농업정책에 대한 불만은 하얀색 낡은 프라이드 밴이 등장하면서 정리된다. 얼굴 한가득 사람 좋은 웃음을 띤 식당 아저씨가 시원한 물 한 병 놓고는 총총 사라진다. 밥은 왔는데 물병을 빠트려서 다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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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숟가락을 놓자 마자 다시 논에 들어간 자리, 다 먹은 들밥 쟁반이 빨간 보자기에 싸여 홀로 놓여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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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수 없어 짓는 농사여" 팔십 평생을 농사만 지었다는 김정환 할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논둑길을 걸어가고 있다. ⓒ 장선애


아주머니가 아니라 아저씨가 갖다주는 밥, 주전자가 아닌 페트병에 담긴 물, 삼베 보자기 대신 빨간 나일론 보자기. 모든 게 달라졌는데, 변치 않는 밥맛의 비결은 무엇인가. 아침나절 내내 땀 흘려 일하고, 논둑에서 다리쉼 하며 밥 한 술 크게 떠 먹으면 '꿀맛'이 따로 없다. 마침 시원한 바람 할 줄기 불어주면 열부자 안 부럽다. 들밥은 누구의 손맛이 아니라, 노동과 자연의 맛이려니.

"우리 어렸을 때 '장꽝에 가서 밥 먹는다'고 혔잖어. 바깥 밥이 그만큼 맛나다는 거 아닌감?"

또 하나, 들밥의 맛처럼 변치 않는 '이웃'이다. "형님 일 거들러 왔다"며 이앙기를 모는 이, 다 심은 모판을 논에 가둔 물로 깨끗이 씻는 이, 씻은 판을 가지런히 묶어 옮겨놓는 이. 별 말 없이도 손발이 척척 맞는 폼이 구태여 묻지 않아도 수십 년지기 이웃이 틀림없다.

"저거 깨끗이 씻어다줘야 1000원 퇴받을 수 있어. 사올 때 3000원 줬으니, 저거 갖다줘야 2000원 되는 거지."

그냥 이웃이라면서 끝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르신이 일러주신다.

이제 곧 논의 연둣빛 모는 진초록의 벼로 자랄 테고, '어느새 또' 황금빛이 되어 모두의 마음과 몸을 건강하게 해주리라. 농촌은 그렇게 아버지 어머니처럼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부모님 생전에 잘해야 하는 것처럼, 농촌 또한 그러하다. 농촌은 나이가 들어 쇠잔해가고 있다. 특히 논은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하고 오래된 습지'이고, 문화유산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지역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예산지역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들밥 #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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