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과 함께하는 안성의 오붓한 절들

[안성여행 -1] 서운산 청룡사·석남사

등록 2012.06.18 21:00수정 2012.06.1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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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은 미륵동네다. 남한산성 주변이 장승동네라면 안성은 미륵동네다. 안성에는 미륵당의 태평미륵, 가솔리 쌍미륵과 궁예미륵, 아양동 미륵, 대농리 미륵 등이 있다. 미륵은 먼 미래에 이 세상에 나타나 이상적인 세상을 건설할 부처를 말한다. 민중은 먼 미래에나 나타날 미래불을 현재에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미륵불을 세웠다. 

비천하게만 여겨졌던 민중은 미륵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안성 땅이 박지원의 <허생전>, 황석영의 <장길산>, 홍명희의 <임꺽정>의 배경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성은 새 세상을 만들려는 민중의 바램이 꿈틀대고 있는 곳이었다.


남사당패의 근거지, 청룡사

조계산 동·서에 선암사·송광사가 있듯이 안성의 주산 서운산에는 서쪽에 청룡사, 그 동북쪽에 석남사가 자리하고 있다. 서운산 청룡골과 불당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나는 곳이 청룡저수지다. 저수지를 따라 나 있는 길이 청룡길이고 서운산에 기대어 마을을 이룬 기슭 동네가 청룡리다. 모두 청룡사와 연을 맺고 있는 반가운 이름이다.

청룡사는 민중놀이패 남사당의 근거지였다. 청룡사 앞에 몇 안 되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남사당 마을'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바우덕이 집이 있었던 불당골에는 남사당 후손들이 살고 있다. 아직도 청룡사와 남사당의 연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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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덕이 조각상 바우덕이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최고의 ‘아이돌스타’였다 ⓒ 김정봉


남사당패는 사회적으로 멸시와 홀대를 받아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유랑생활을 하였다. 절은 남사당의 겨울철 집결지나 근거지였다. 안성의 근거지는 청룡사였다. 청룡사에서 겨울을 난 뒤 주로 농번기에 청룡사에서 내준 신표를 들고 장터를 돌아다니며 풍물, 땅재주, 줄타기 등 갖가지 연희(演戱)를 하며 생활했다. 일정한 보수 없이 끼니를 잇는데 급급하였다. 그들의 삶은 고단하였다. 청룡사는 이들에게는 쉼터였고 안식처였다.

말기에는 여자도 가세하였는데 바우덕이(김암덕, 1848-1870)는 여자로써 남사당패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남사당패를 이끌었다. 그녀의 나이는 15세에 불과하였다. 23살 꽃나이에 요절하고 말지만 바우덕이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최고의 '아이돌스타'였다. 불당골 양지바른 언덕에 그녀를 기리는 사당이 서있다.


청룡사는 1265년,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다. 대략 100년 뒤에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던 중에 상서로운 구름(서운瑞雲)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이 머문 자리에 절을 짓게 된 것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이와 같은 내력은 절 입구에 서있는 청룡사사적비에 나와 있다.

청룡사는 절의 규모에 비해 마당이 넓어 옹색해 보이지 않는다. 마당 가운데 양 옆으로 요사채가 있고 왼쪽에 범종각과 그 뒤편에 1680년 조성된 감로탱이 있는 관음전이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 명부전이 북향하고 있고 그 옆 언덕에 산신각이 서향하여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이 크게 강조되고 서향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기도하지만 명부전과 산신각이 대웅전 측면에 크게 자리 잡은 것도 독특하다. 산신각과 명부전이 토착신앙과 불교문화의 융합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고 청룡사가 남사당패의 근거지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청룡사의 성격을 '민중과 함께하는 청룡사'로 규정해도 무리가 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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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가람배치 대웅전이 서향하고 있고 그 옆에 산신각과 명부전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 김정봉


청룡사의 하이라이트는 대웅전, 그 중에도 기둥이다. 천연재료를 천연덕스럽게 사용하여 자연미가 드러나 있다. 휘어진 기둥이 웅장한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경외감마저 든다. 굽은 기둥만 보면 균형을 잃은 듯 하나 좀 떨어져 보면 반듯하다. 굽은 것이 더 곧고 힘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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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기둥(1) 천연재료를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미가 돋보인다 ⓒ 김정봉


대웅전은 화려한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처마 밑 공포에는 청·황·백련의 연봉오리가 새겨져 있으며 법당 안에는 화려한 꽃과 연꽃문양들이 꾸며져 있다. 이런 대웅전이기에 자연석 초석에 굴곡진 기둥이 받치고 있어도 궁핍해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가운데 소박한 맛이 나는 것이다. 간결한 맞배지붕에 소박한 문양을 하고 있는 대웅전이라면 굽은 기둥은 궁색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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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기둥(2) 화려한 공포를 한 팔작지붕을 굽은 기둥이 지탱하고 있어 화려한 가운데 소박한 느낌을 준다 ⓒ 김정봉


청룡사에는 사천왕이 없다. 대웅전 양쪽에는 금강력사가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흡사 사천왕을 대신하여 법당과 부처님을 수호하는 것 같다. 청룡사는 대웅전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대웅전은 청룡사의 보물 중에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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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기둥(3) 좀 떨어져서 보면 굽은 기둥은 더 곧아 보인다 ⓒ 김정봉


청룡사 여행의 마무리는 불당골길을 걸으며 하는 것이 좋다. 청룡사부도와 바우덕이 사당, 불당골 마을을 보면 옛날 청룡사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남사당 마을 분들에게서 산 쌉쌀한 쑥개떡과 시큼 달콤한 산딸기를 머금은 채 석남사로 향했다.

청룡사는 대웅전이, 석남사는 영산전이 보물

석남사는 서운산 동북쪽 기슭에 있다. 석불(석남사 마애불)의 남쪽에 자리한 절이라하여 석남사라 불렸다고 한다. 울주군에 있는 가지산석남사가 석안산(石眼山 가지산의 다른 이름-가지산석남사 홈페이지에는 석면사로 오기)남쪽에 있다 해서 붙여졌다 하니 서운산석남사 유래도 그럴싸하게 들린다.

석남사는 문무왕 20년(680년)에 석선스님이 열고 그 후 문성왕18년(856년)에 염거선사(가지산문의 2조)가 주석하면서 중수했으며 고려초 혜거국사가 중창하였다. 조선 초 사찰을 통폐합할 때는 교종(敎宗)중에 안성을 대표하는 절로 지정되었고 세조 때에는 승려의 사역을 면제해 주는 친필교지를 받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거의 폐사되었고 영조 때 해원선사에 의해 중수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남사의 내력은 대략 이러한데, 염거선사는 문성왕6년(844년)에 입적하여 856년 석남사에 주석하였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사력(寺歷)을 좋게 하기 위해 가지산문의 2대조사인 염거선사를 의도적으로 사력에 끼워 넣었다면 이 석남사라는 이름은 도의선사(가지산문1대조사)가 창건한 가지산석남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석남사의 본사(本寺)인 화성 용주사는 염거선사를 창건주로 하고 있고 용주사 말사인 용인 용덕사, 평택 수도사와 약사사도 염거선사를 창건주로 하고 있다. 석남사가 무리해서 염거선사와 연을 맺으려는 것도 이런 연유인 듯하다. 

석남사는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서운산석남사(瑞雲山石南寺)'현판을 달고 있는 금광루가 맨 앞에 자리하고 있고 가파른 계단 길 맨 꼭대기에 대웅전이 앉아있다. 그 아랫단에는 오층석탑 두기와 영산전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건물이 늘어나는 등 조용한 산사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어 아쉬운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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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전경 계단 길 맨 꼭대기에 대웅전이 있고 그 아랫단에 영산전이 있다. 최근 조용한 산사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 김정봉


대웅전은 정면, 측면 모두 3칸이고 맞배지붕을 하고 있어 암팡지게 보인다. 공포는 기둥 위는 물론 기둥사이의 평방(平枋)위에도 얹은 다포집 양식으로 맞배지붕과 어울리지 않는데 원래 팔작지붕을 맞배지붕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보기 드문 것으로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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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대웅전 정면·측면 모두 3칸이고 맞배지붕이어서 암팡져 보인다 ⓒ 김정봉


원래 영산전 앞에 있던 것을 1978년에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이 당시 '옹정3년기사3월일조성(雍正 三年 乙巳 三月日 造成)'이라 쓰여 있는 대웅전 수키와가 발견되어 영조1년(1725년)에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옹정은 청나라 세종 옹정제의 연호로 1723년에서 1735년까지 13년간 쓰였다. 옹정 3년은 1725년 영조 1년에 해당된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아담하다. 공포는 다포 양식으로 튼튼하고 짜임새 있다. 영산전은 1562년(명종17년) 처음 건축하고 3년 뒤에 내부에 닫집과 불상을 시설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후 1865년에 네 번째 중수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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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영산전 조선후기 건축양식인데 공포만은 임진왜란 이전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특이하다. 닫집의 양식을 복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김정봉


특이한 것은 공포를 제외하면 지붕틀, 벽체, 기둥형상 등 일체의 건축구조가 조선 후기의 양식이나 쇠서(소 혓바닥 같이 생긴 장식)가 아래로 뻗치는 형상을 보여주는 등 공포만은 임진왜란 전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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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전 공포 쇠서가 앞으로 쭉 내밀고 있다 ⓒ 김정봉


영산전 옆에는 2기의 오충석탑이 서있다. 홀쭉하여 초라해 보이나 석남사 지형을 감안하면 이렇게 홀쭉한 탑이 잘 어울린다. 조금이라도 더 컸으면 허세를 부린다고 욕먹었을지 모른다.

절 왼쪽으로 나있는 계곡 길을 따라 10여분 정도 오르면 석남사의 유래가 된 마애불이 있다. 통일신라나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윤곽이 또렷하지 않으나 부도와 함께 석남사를 찾는 객들에게 서운함을 달래주기에 충분하다. 이 석불 남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석남사인데 이 마애불은 북동향을 하고 있으니 석남사의 유래도 어딘가 석연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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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목어 서툴게 조각되어 더욱 정이 간다. 예전의 석남사와 잘 어울린다 ⓒ 김정봉


잠깐 쉬어갈 겸 금광루에 걸터앉았다. 거기에는 목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나무혹을 그대로 놔둔 채 조각했고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서툴게 움직이는 끌 자국이 그대로 비늘이 되었다. 보면 볼수록 정이 가는 목어다. 예전 석남사의 모습과 딱 어울리는 목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청룡사 #석남사 #남사당 #미륵 #바우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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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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