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이국 땅 비탈길을 오르내린다

<종소리> 50호 발행에 부치는 글

등록 2012.07.07 15:56수정 2012.07.0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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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시인회 여러분, 그리고 동포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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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50호 표지 ⓒ 박도

반갑습니다. 재일 동포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고국에서 온 작가 박도입니다.  동포 여러분! 정말 반갑습니다.
여러분을 뵈니 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고모를 뵌 듯 반갑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1900년에 경상북도 선산군 도개면 도개라는 곳에서 집안 종손으로 태어나 열한 살 때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시고, 스무 살 때는 기미 만세운동을 보셨습니다.

청년 시절 망국민의 백성으로 마음 붙일 곳이 없어 그 시절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났던 민족종교인 보천교에 몰입하여 전 재산을 헌납하셨답니다. 그러다가 집안어른과 가족들로부터 재산을 날린 추궁을 당하자 어느 날 송아지를 파신다고 선산 장에 가셔서 송아지를 판 다음 여비를 마련하자 아무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그 길로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가셨답니다.

할아버지가 일본에 와서 처음 한 일은 일본말을 몰라 도쿄 거리에서 100엔짜리 잡화를 파셨다는데, "100엔!"이라는 말만 외쳤다고 하시더군요. 그 뒤는 고물장사를 하셨다는데, 리어카를 끌고 도쿄 골목마다 다니며 고물을 수집하여 분리한 뒤 도매상에 파셨답니다.

그리고 뒤늦게 도쿄로 온할머니와 고모들은 홀치기로 생계를 도왔고, 저의 아버지는 나토 장사와 신문배달로 도쿄에 있는 주계상업학교를 다니셨다 하시더군요. 그러시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들은 대동아전쟁 중 귀국하여 경북 구미에 터전을 잡으셨고, 아버지는 종전 직전 귀국하여 다행히 저희 집안은 일본 땅에 남지 않았습니다.

다만 둘째 고모만은 귀국 도중 도쿄 역에서 혼란한 소용돌이 속에 그만 아들을 잃어버렸는데, 아직도 그 아들의 생사를 모르고 있습니다. 올해 94세인 고모님은 아직도 그 아들을 자나깨나 잊지 못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그때 우리 가족도 귀국치 못하였다면 지금 여러분과 같이 도쿄에 거주하는 재일동포가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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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홍심 대표가 인사를 하고 있다. ⓒ 박도


모국어를 지키는 여러분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자랐는데, 할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할아버지가 송아지 팔아 일본으로 간 얘기와 도쿄 시내 시나가와 역전에 사셨다는 얘기, 그리고 우에노, 신주쿠 등 일본 지명이었습니다. 아울러 할아버지는 정종을 매우 좋아하셨는데 한 푼이라도 돈을 모으신다고, 그 좋아하시는 정종도 한 잔 이상은 드시지 않았다는 말씀을 귀에 익도록 듣고 자랐습니다.

솔직히 제 할아버지는 항일투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보천교에 헌납한 돈이 독립운동자금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제가 항일유적답사길에 보천교의 발상지인 전북 정읍에서 확인한 뒤부터는 당신의 행적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당신 생전에 일본말을 단 한 마디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늘 바지저고리를 입으셨고, 나들이 때는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다니신 깐깐한 조선 선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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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정일구 실행위원장(<종소리> 초대대표 정화수 시인 아드님), 오른쪽은 필자 ⓒ 박도

할아버지는 제 어린 시절 한자를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마다 한자를 많이 배워두면 동양 3국에서는 필담으로 다 통한다고 제 종아리에 회초리를 치시며 엄하게 가르쳐 주신 덕분으로 저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자를 많이 알았고, 그 때문에 후일 국어 선생이 되고, 작가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2007년 여름 오홍심 선생을 만난 이후,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시지 <종소리>를 보내주셔서 잘 읽고 있으며, 때때로 제가 시민기자로 소속된 오마이뉴스에 감명 깊은 작품을 한두 편 소개하였습니다.

정말 여러분은 장하시고, 대단히 훌륭하신 분들로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해외에서 모국어를 지키고, 이를 2세, 3세로 이어가는 일은 대단한 애국심과 자긍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솔직히 제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여러분처럼 우리말을 사랑하고 우리의 혼을 지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는 <마지막 수업>이라는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가령 어떤 국민이 노예의 신분이 되더라도 자기 나라의 국어를 건실하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자기가 갇힌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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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모임에 오신 내빈들 ⓒ 박도


여러분이 종전 후 70년이 다 될 때까지 우리 얼을 지키고 모국어를 지키는 그 뜨거운 조국애에 진심으로 고개 숙여 경의를 드립니다. 솔직히 저는 여러분의 그 뜨거운 조국애에 감동하였기에 오늘 여기에 왔습니다. 

종소리에 실린 시들은 모두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 가운데 이번 50호에 실린 <나그네> 와 그리고 저는 시인이 아니지만, 20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마지막 행적 답사 중, 극동 러시아 우수리스크 역에서 취재수첩에 긁적거린 시 한 수 읊겠습니다.

 나그네
               김윤호

내 고향을 등지고
이 땅 왜땅에 살기 시작한
그날로부터
흘러 흘러 60년 세월

내일이면 가리라
명년이면 가리라
통일이 되면 가리라

손가락을 곱기도 하고
펴기도 하며
반세기가 10년이 다 넘는 세월

이 땅에서 주름살이 지고
백발을 이게 될 줄이야
생각조차 못했다

하나의 조국을 꿈꾸고
고향을 찾아갈
글귀 한 줄 쓸 때마다

내리는 흰 서리에
불어나는 주름살에
한숨 쉬며 보내온
해와 달이 아니었던가

오늘도 나는
고향이란 짐과 통일이라는 짐
무거운 두 등짐을 지고
이국 땅 비탈길을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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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러시아 우수리스크 역, 안중근 의사가 우덕순 동지와 함께 하얼빈행 2등 열차표를 산 곳이다. ⓒ 박도


우수리스크 역에서       
                 박 도

내 십 수 년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
해외를 누벼보니까

나라와 겨레를 두 조각낸 38선(휴전선)은
한반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베이징에도 있었고,
도쿄에도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도,
워싱턴에도 있었다.

어느 영웅이 나타나
두 조각 세 조각 네 조각으로 찢어진
나라와 겨레의 속살에 깊이 새겨진
38선을 지우고,
휴전선 철조망을
걷어낼 수 있을까?

저무는 10월 하순 한낮
극동 러시아 우수리스크 역에서
내 아들이나 조카와 생김새가 똑같은
구릿빛 얼굴의 노동자를 만났다.

나의 안내자는
그들이 시베리아 삼림지대에서 일하는
북한 벌목공들이라고 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들에게 다가가
몇 가지 물었더니 한 노동자가
북한 여기저기에서 온 림업부 소속이라고
대답은 하는데
언저리 수많은 눈초리가 경계의 빛으로
우리 두 사람을 죄고 있었다.

나는 그를 덥석 껴안고 싶었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날카로운 철조망이
여러 겹 드리워 있음을 알아차리고
못내 뒷걸음질을 하고는
우수리스크 역 육교에 올라 그들 뒷모습만
카메라에 담았다

내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연해주의 북풍이 몹시 찼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포 여러분.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2012년 6월
            고국의 작가 박도 올림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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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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