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우상 앞에 서다

[주장] 비이성의 시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우상들

등록 2012.07.12 10:33수정 2012.07.1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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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리영희 선생님께서 별세하신 지 어언 2년이다. 지난 2010년, 리영희 선생님은 고귀한 인류애의 정신, 인간사랑의 정신, '자유'의 정신이 한가득 담긴, 심지어 시대를 아예 바꿔버린 <전환시대의 논리><자유인><우상과 이성><대화> 등의 작품—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렸지만—을 남겨놓고 일생을 마치셨다. 누구에게나 '마음의 스승'은 존재하게 마련인데, 필자에겐 리영희 선생님이 그런 존재였다. 아니, 필자에겐 스승을 넘어 동경의 대상이었고, '존경'을 넘어서 '우상'에 가까운 존재였다. 스스로 '우상 파괴자'를 자처했던 리영희 선생님이 지금 이 내 글을 보신다면 단번에 찢어버렸으리라. 그러나 정말로 선생님이 내게 '우상'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정확히 말하면 선생님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선생님의 정신이 나의 우상이다. 그만큼 선생님의 글은 내 마음을 뿌리채 흔들다 못해 아예 붕괴시켜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사실 리영희 선생님이 가장 폭발적으로 읽히던 시기는 지났다. 막 20대에 접어든 필자 또래들 중에는 리영희 선생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고, 안다 하더라도 '교양서' 쯤으로 인식하거나 심하게는 '1970년대 구닥다리' 취급하곤 한다. 리영희 선생님 말고도 읽을거리가 지천인데, 게다가 리영희 선생님보다 더 뛰어난 글이 쌓여있는데 개 중에서도 굳이 리영희 선생님을 고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일게다. 이런 흐름 속에 리영희 선생님의 글은 '교양서'로 남는 것도 벅차 점차적으로 잊혀져가고 있다. 리영희 선생님의 글과 함께 잊혀지는 것이 차라리 이름 뿐이라면 다행이겠다. 그 분의 정신마저 잊혀져가기에 안타까운 것이다. 리영희 선생님의 정신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우상파괴'와 '자유인'으로 집약된다.

리영희 선생님이 별세하신 후 2012년 현재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지난 2년간, 대한민국은 '우상의 귀환식'을 아주 성대하게 치루었다. 그 귀환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리영희 선생님이 그토록 경멸하고, 기를 쓰고 파괴하였던 그 '우상', 인간의 기본 판단력조차 마비시켜버리는 '우상'이 다시금 귀환 중이라는 소리다. 리영희 선생님은 '숭배라기보단 그것에 대한 생각을 금지시키는 것'을 '우상'이라 정의했다. 지금 이 땅에, 그 '우상'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말이다. 리영희 선생님 추모식 때, 명진 스님은 추모사에서 '편히 잠드셔선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맥락은 다르지만, 여전히 리영희 선생님이 편히 잠들 수 없는 까닭은 이 땅에 그 경멸스러운 '우상'이 다시 그 뻔뻔한 고개를 쳐들고 있기 때문에 스님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우상'들이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시점은 우리가 리영희 선생님의 정신을 잊고 살던 그 시기와 일치한다.

'생각하지 못함'은, 즉 인간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당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으랴! 그것은 곧 노예일 따름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그것은 '생각'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함'을 부정당하고 대신 '반응'만을 허락한다면 그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인간의 반대말은 짐승도, 식물도 아니고 '노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우상은 무엇인가? 그 어떤 것이 우리의 '생각함'을 가로막고 금지시키는가. 무슨 권력으로, 어떤 이유로?

작금의 현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우상화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국가'라는 집단과 가치의 우상화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인물에 대한 우상화다. 전자의 이데올로기는 보수적 한국사회의 고질병이자, 수구-보수 언론 및 세력이 악용한 선례가 수두룩하고, 그것은 여전히 진행 중이기도 하다.

국가의 우상화는 국가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비판을 불허한다. 대신 '국익' 또는 '안보' 따위의 1차원적 국가논리 앞에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고, 비판자들을 '빨갱이', 내지는 '비국민', '비애국자' 등으로 간주하여 배제시켜 버린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애국자'와 '비애국자'-최근에는 '비애국자'가 '종북'으로 바뀌었다.-로 구분하고, '국민'과 '비국민'으로 구분하여 후자에 속하는 이들에 대하여 낙인을 찍고, 배제시켜 버리는 태도이자 이데올로기다. 제주해군기지, 나아가 최근에 이루어졌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물론이거니와, 지금은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한창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종북' 논쟁에서 수구-보수 세력은 항상 '애국'과 '국익' 내지는 '안보' 따위의 논리로 모든 것을 일축시키며 응대해왔다. 여기에 대해 반대하고, 비판하는 행위는 그들에 의해 곧장 '빨갱이', '종북' 따위의 저열한 언어로 낙인찍힌다. 국가 논리에 의해 무조건적 동의가 강제되고, 비판과 해석 내지는 비(非)동의분자들에 대해서는 '적' 혹은 '배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게끔 '반응'하도록 만드는 논리다. 온갖 전체주의 폭력의 온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비이성의 극단이자, 비생명성, 반역동성 그 자체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여전히 '국가'의 노예다. 국가와 관련한 모든 가치 판단이나 비판 내지 논쟁은 여전히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자리하고 있다. '국가'라는 것에 대하여 '새로운 국가가 가능한가'라고 질문하는 행위조차 매국노로 취급받곤 한다. 비록 '빨갱이'에 관한 신화는 어느 정도 깨졌지만, 여전히 '국가'에 대한 신화는 오히려 더욱 성역화되는 양상이다. 최근에 있었던 화물연대 파업 당시 그들의 파업이 그들만의 '특정한 집단이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생존권', 나아가 그들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그리고 누리고자 하는 권리들에 대한 투쟁으로 그 당위성과 정당성이 명명백백함에도 불구하고 "불법 파업 엄정 대처", "국가기간 뒤흔드는 파업 단호하게 진압해야" 따위의 발언이 버젓이 활개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민중' 위에 '국가'가 군림하려 하는 이같은 행태들은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논리 속에 '인간'이 있으며, '민중'이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그들의 '국가'는 결코 '민중'을 위하지 않는다. 그들의 유치한 정당화 속에서는 언제나 민중의 희생이 전제되지 않았던가! '체제 보전'이라는 명목 하에 개개인의 '생각할 자유'마저 앗아갈 가능성이 높은,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던(박정근 사건, 권용석 사건) '국가를 위한 법'인 국가보안법에 의해 지난 5년여간 국가보안법 수감자가 급증한 것은 '국가'를 위해 '민중'의 희생마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우리가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후자의 경우엔 박정희 우상화다. <시사인>에 따르면, 대선 시기를 앞두고 대구-경북 지역 지자체들이 박정희의 '성역화'를 위해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고 지적한다. 박정희로(路), 박정희 대학원, 박정희 체육관부터 시작하여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딴 '정수초등학교', 박정희 생가 주변 공원화 사업, 박정희 홍보관, 나아가 '새마을운동'을 기리기 위한 '새마을 테마 공원', 박정희 기념관…….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는 현재진행형이고, 곧 완료형이 될 것처럼 보인다. 독재자에 대한 거의 종교 내지는 숭배에 가까운 이러한 사업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경제발전'을 시켰다는 이유로 그가 '최고의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얻어내는 것은 위선이 아닐 수 없다. 단지 민중에게 '빵'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왜 '최고'가 되어야 하는가. 한편, 그가 민중에게 '빵'을 줌과 동시에 칼을 들이밀지 않았던가. 민중은 빵을 얻었지만 자유를 잃었다. 빵을 포기하고서라도 자유를 되찾고자 움직인 이들은 가차 없이 짓밟혀버렸다. 우리가 빵을 찾는 동안, 우리의 자유와 정신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독재란 무엇인가. 민중을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독재다. 우린 지금 그 '독재자'를 '숭배'하는 광경을 보고 있다. 그가 단지 민중에게 빵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행했던 비인간적인, 반시대적인, 반민중적인 모든 행각이 덮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혹여, 빵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모든 것들을 정당화하지는 않았는가.

지금의 우리 현실은 감히 '우상의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과거로의 '화려한 복귀'라고도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리영희 선생님이 편히 잠드실 수 없는 이유다. '우상'이 활개 치는 곳에서, 과연 리영희 선생님이 편히 잠드실 수 있을까. 리영희 선생님은 언제나 '이성의 힘'을 강조하셨다. 우상이 제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이성의 날카로운 눈이 있으면 우상은 파괴될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우상에 지배당하고 있지 않은가? 혹시 그저 '반응'하는 것을 두고 '생각한다'고 말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신경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그러한 '우상'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 될 뿐이다. 우상은 늘 '인간의 조건'을 부정한다. 대신 우리가 '노예'이길 바란다. 지금 그 '우상'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는 땅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다시, '이성'으로 '우상' 앞에 서야 한다. '자유인'을 위하여, 나아가 진정한 '인간의 조건'을 위하여.

덧붙이는 글 | 너도나도 '성역화' 경쟁이 한창이다. 민중이 꿈틀거리며 살아가는 땅에, '민중'이 사라지고 '국가'만이 남아 그 자신을 스스로 성역화하는 시대다. 아니, 우리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가고 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하며 어떻게 비판해야 할까. 최근 우리 사회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명백하게 '우상화'로의 회귀다. 우상은 거부돼야 한다. 우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는 순간 우리는 '노예'로 천락할 것이다. 극단적 우상의 시대를 거쳐오며, 스스로 우상파괴자를 자처했던 리영희 선생님은 한평생을 그 고결한 인간애의 정신,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기 위한 '이성'으로 버티셨다. 지금 우리 시대는 '이성'의 시대인가. 되려 '우상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글은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보며, 우리가 마땅히 '거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보고자 쓰여졌다.


덧붙이는 글 너도나도 '성역화' 경쟁이 한창이다. 민중이 꿈틀거리며 살아가는 땅에, '민중'이 사라지고 '국가'만이 남아 그 자신을 스스로 성역화하는 시대다. 아니, 우리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가고 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하며 어떻게 비판해야 할까. 최근 우리 사회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명백하게 '우상화'로의 회귀다. 우상은 거부돼야 한다. 우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는 순간 우리는 '노예'로 천락할 것이다. 극단적 우상의 시대를 거쳐오며, 스스로 우상파괴자를 자처했던 리영희 선생님은 한평생을 그 고결한 인간애의 정신,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기 위한 '이성'으로 버티셨다. 지금 우리 시대는 '이성'의 시대인가. 되려 '우상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글은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보며, 우리가 마땅히 '거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보고자 쓰여졌다.
#우상 #이성 #독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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