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허풍담 속에 번쩍 스치는 게 있다?

[서평] 요른 릴의 <북극 허풍담>

등록 2012.08.02 09:40수정 2012.08.0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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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겉그림 요른 릴의 〈북극 허풍담〉 ⓒ 열린책들


수다스러운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과묵한 사람보다는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죠. 설령 그 속에 알맹이가 없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허풍이라도 좋죠. 후덥지근한 요즘 같은 날씨엔 그것은 마치 새벽녘에 불어오는 시원한 찬바람과 같겠죠? 팍팍해진 살림살이에 삶의 불쏘시개와도 같고요.

때론 수많은 수다 속에도 진실이 감춰져 있다고 하던가요? 취중진담(醉中眞談) 같은 것 말입니다. 그 말이 허풍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뭔가 의도된 익살이었다는 것 말입니다. 말 장난 같은 말 속에 뼈가 들어 있는 것 말이죠. 그런 의도라면 허풍은 단순한 풍자소설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른 릴의 <북극 허풍담>이 그렇습니다. 릴은 19살 때 그린란드 북동부 탐사에 참여했다가 그곳의 매력에 빠져 16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고 하죠. 이 책은 그곳의 체험 속에서 풍겨져 나온 이야기라 할 수 있겠죠. 1년에 한번 소포와 보급품을 싣고 오는 수송선 이외에 달리 신나는 일이라곤 없을 것 같은 그곳에서 과연 그는 어떤 일들을 목격한 걸까요?

"매스 매슨은 자기도 모르게 막 검은 머리 빌리암의 마음속에서 뭔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지금껏 그의 욕망은 수피아에게 쏠려 있었는데 이제 그는 엠마를 애타게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소리 없이 비밀로 고이 간직한 채로, 그는 어느새 분홍색 엠마를 뇌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저녁이 되면 그녀를 침대로 데려갔다."(132쪽)

모두 10가지 사건이 담긴 내용 중에 표제작으로 내민 '차가운 처녀'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엠마'라는 여자를 둘러싸고 몇 몇 사냥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제 욕심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과연 그녀는 그토록 아름답고, 모두가 흠모할만한 매력을 지녔던 걸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그녀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공한 인물입니다.

이쯤 되면 다들 짐작하실 것입니다.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두가 허풍으로 지어냈다는 걸 말이죠. 그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잠꾸러기나 전직 군인, 귀족이나 주정뱅이, 그리고 수다쟁이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모릅니다. 그들 모두는 대륙의 사냥회사에서 진짜로 파견한 진짜 직원들일지 말입니다. 이쯤 되면 고무풍선 바람 빠지듯 뭔가 빠져나가는 기분일까요?

"눈과 얼음과 바람과 고독 외에는 모든 것이 결핍된 세계, 1년에 한 번씩 물품을 실은 배가 오는 것 외에는 달리 사건이라 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얼어붙은 세계에서 이 작은 사냥꾼 공동체가 벌이는 소동은 연신 유쾌한 웃음을 준다."(212쪽, 역자의 말)


그렇습니다. 온갖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에서 몇 달 동안 말할 상대가 없어 묵혀두었던 말 보따리를 풀기 위해 눈썰매를 타고 가는 모습만 생각해도 유쾌하지 않을까요? 동료의 수다에 시달리다가 다시 고독이 그리워져 혼자만의 막사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만 생각해도 괜히 짠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동료의 장례식이 갑자기 즐거운 술자리로 돌변했다는데 뭔가 수상쩍은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요?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허풍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허풍은 허풍으로만 끝나는 건 아니죠? 다들 농담 속에 진담이 묻어 있다고 합니다. 그린란드의 외로움이 빚어낸 허풍 속에도 뭔가 진실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요? 무엇보다도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우애 같은 게 번쩍 스칠 것입니다. 어쩌면 그걸 생각토록 하기 위해 릴은 수많은 허풍담 시리즈를 엮어낸 게 아닐까요? 앞으로 나올 허풍담도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북극 허풍담 1 - 차가운 처녀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열린책들, 2012


#북극 허풍담 #요른 릴 #취중진담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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