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잊는 자에게 반복된다

윤치호 불망비 친일행적 안내현판 제막식 열려

등록 2012.08.13 19:03수정 2012.08.13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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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불망비 친일행적 안내현판 제막식 현장 ⓒ 김상기


"우리는 윤치호의 친일행적을 용인하기 위해 그의 불망비를 다시 이곳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일제 식민지 주구로 민족반역의 삶을 살아간 윤치호를 통해 후세들의 교훈과 경계로 삼고자 함이며, 불망비 바로 옆에 그의 친일행적을 기록한 안내현판을 함께 세워둠으로써 역사정의가 매국과 굴종의 삶을 단죄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13일 오전 11시부터 진안군 부귀면 부귀초등학교 앞 도로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가 주관하는 '윤치호 불망비 친일행적 안내현판 제막식'이 거행됐다.

불망비는 윤치호의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지었던 소작인들이 세운 '시혜불망비' 1기와 부귀초등학교 건립터를 기증한 데 대해 당시 부귀면 대표가 세운 '흥학불망비' 1기로, 윤치호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일제 강점기 시절 세워진 비석이다. 안내현판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윤치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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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불망기 2기와 친일행적 안내현판이 나란히 서있다. ⓒ 김상기


한때 촉망받던 지식인으로 성장하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 애국계몽활동을 지도한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지만, 1915년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특사로 석방되면서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힘이 곧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인 약육강식의 논리에 빠져 강자의 약자 지배를 용인하고 정당화하는 민족패배주의적 숙명론을 견지했다. 그에 따라 일제의 한국침략과 식민지 통치를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이며 '독립불능론'과 '독립무용론'을 주장하는 등 일제의 충실한 주구배로 전락해갔다.

1930년대 중반이후로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 임전보국단 고문 등을 역임하며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조선의 아들들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이로 인해 윤치호는 조선 내 7명의 칙선귀족원 의원으로 선출, 자신의 아버지에 이어 2대째 일본의 귀족으로 입적하며 조선이 해방되는 그날까지 일제에 충성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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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 참여한 관계자들이 잘못된 역사를 잊지 말것을 다짐하고 있다. ⓒ 김상기


이석영 전주평화와통일을사랑하는사람들 대표는 "부끄러운 역사라고 그냥 묻어두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역사가 잘못돼 왔는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이번 현판식을 통해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없도록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설령 그가 좋은 뜻으로 학교건립비용을 내놓았다손 치더라도 그 돈은 그가 친일의 대가로 엄청나게 받은 돈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며 "그가 돈을 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희생당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뛰어난 지식인이요 선각자였던 사람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때 그 해악이 역사에서 얼마나 큰 과오를 저지르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윤치용이다"며 "그가 철저하게 변절해 가는 과정은 우리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친일행적 #윤치호 #광복절 #불망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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