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이를 쫘악"...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길래

[골목탐험4] 요즘 담벼락 낙서지존은 바로 '쓰레기투기 금지'

등록 2012.08.25 21:24수정 2012.08.2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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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기억박물관이다. 발전이 더딘 탓에, 사람들 관심에서 벗어난 탓에 오래된 풍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간혹 골목을 거닐다 1960~7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낡았다' '고쳐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이 많지만 몇 백년 전 집과 길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럽이나 미국의 유서 깊은 도시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보면 완전히 수긍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좀더 애정을 갖고 바라보고 가꾸면 골목은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오랫동안 골목을 탐험하면서 발견한 보물들을 여기에 소개한다. - 기자말

초등학교 화장실 통해 배운 낙서, 버스터미널 화장실에서 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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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미널 화장실은 낙서의 보고였다. 그곳엔 온갖 잡다한 글과 그림이 가득했다. 음담패설이 있는가 하면, 전화번호를 내걸고 사람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양지에선 보기 힘든 음지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 김대홍


초등학교 시절 꼭 한 반에 한 명 정도 소문을 퍼트리는 아이가 있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연애소문부터 어떤 선생님에게 어떤 비밀이 있더라는 교사 뒷담화, 학교에서 누가 죽은 적이 있더라는 괴담까지 이야기 소재는 다양했다. 출처는 주로 화장실이었다.

조금 더 나이 들어서 알았다. 화장실 낙서를 통해 소문을 만들고 퍼트리는 이들이 꽤 많다는 것을.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를 타고 여행을 다니던 시절, 버스에 타기 전 꼭 화장실에 들렀다. 중간에 쉬기 전까지 몇 시간 동안 버스 안에 갇혀 있어야 했으니 미리 볼일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화장실은 항상 낙서로 가득했다. 가장 흔한 건 음란물이었다. 주로 여성의 신체 일부를 그려놓거나 야한 이야기를 대충 휘갈겨 쓴 내용이었다. 애인을 구한다면서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겨둔 이도 있었다.

장소에 따라 낙서내용은 달랐다. 도서관에선 제법 철학적인 내용도 본 듯하다. 인생의 삶과 의미를 고민하는 개똥철학성 내용이 있었고, 대학교 화장실에선 정부를 비판하는 낙서도 종종 발견했다. 장소에 따라 화장실 낙서 내용은 조금씩 달랐다.

낙서는 중독성이 있었다. 평소엔 잘하기 어려운 얘기, 체면상 차마 하기 어려운 얘기, '저질'이라며 손가락질 당할까봐 못한 이야기들이 그곳에 있었다. 바깥세상은 제법 근엄하고 예의 바른 곳이었지만 낙서 속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순간 버스터미널에 가면 볼일을 볼 필요가 없는데도 화장실에 가는 게 버릇이 돼 버렸다. 낙서를 보기 위해서였다. 한 화장실에서 낙서를 본 뒤 다른 화장실로 넘어가며 순례를 했다. 낙서를 모두 다 본 다음에 버스를 탔는데, 가끔 시간이 모자라 서둘렀다.

화장실 낙서 구경은 여행을 시작하기 전 꽤 흥미로운 시간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즐거움이 사라졌다. 강력한 청소부들의 등장 때문이었다. 조짐은 화장실이 깨끗해지면서부터였다. 깨끗한 화장실은 마음에 들었지만, 바빠진 청소부들의 움직임은 왠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깨끗해진 화장실에선 낙서를 보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누군가 낙서를 남겨놓았더라도 뻔질나게 드나드는 청소부들에 의해 바로 제거됐다. 화장실 순례를 하면서 낙서를 한 번도 못보는 때가 늘어나다 마침내 낙서가 사라졌다.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낙서가 사라진 때와 동네 담벼락에서 낙서가 사라진 때가. 화장실이 깨끗해진 것보다 조금 앞서 길거리가 깨끗해졌고, 벽에 적힌 낙서가 '싹' 사라졌다. 과거에 비해 깐깐해진 집주인들의 마음씨도 한몫했을 것이다. 집 담벼락이 동네 사람들의 공공물처럼 여겨진 때가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담벼락의 소유권 또한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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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이었던 피맛골엔 낙서도 많았다. 피맛골이 재개발되면서 낙서도 같이 사라졌다. ⓒ 김대홍


아파트가 많아진 것도 낙서가 사라진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아파트 주변엔 꽃밭이 있거나 주차장이 있었으니 낙서를 하더라도 남들이 보기가 어려웠다. 낙서란 은밀한 고백이면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다. 쓰기도 힘들고 보기도 힘든 아파트 벽에 낙서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낙서가 사라졌다고 믿었다. 80년대 서정범 교수가 쓴 낙서시리즈를 읽고 낄낄대던 시절은 이미 과거가 됐다고 생각했다. 전국 골목을 돌기 전까진 말이다. 그곳에서 수많은 낙서를 봤고, 사람들의 내밀한 속내를 들여다봤다.

길거리 낙서에서 가장 많은 건 "쓰레기를 버리지 맙시다"

전국 50여 개 도시 골목에서 찍은 낙서를 모아보니 대략 257건이었다. 내용별로 분류했다. 금지에 관한 게 133건으로 전체 절반 정도였다. 그 다음엔 애정이나 성, 욕과 같은 음지성 내용이 48건이었다. 이사나 길없음, 특정 방향을 가리키는 정보성 내용이 33건으로 그 다음을 이었다.

경향성이 보였다. '금지' 항목에서 제일 많은 건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는 내용이었다(47건). 사람들이 쓰레기에 대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알 수 있었다.

경고문구의 성격은 크게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는데 강경파 비중이 많았다. 경고 또는 협박이 많았는데, CCTV를 달았다든지 관할 구청이나 동사무소에 신고한다는 내용이 단골로 포함됐다. 어떤 이들은 쌍욕에 가까운 말을 쓰는가 하면 3대가 망한다며 저주주문을 걸었다. '손가락을 자르겠다' '가랑이를 쫘악 찢어버리겠다' '죽이겠다'는 협박문은 섬뜩했다. 대부분 집주인들이 엄포성 경고를 했다면 쓰레기 버리는 사람을 신고하는 사람에게 현상금 10만 원을 건 적극파도 있었다.

"이곳에 쓰레기 버리는 자는 당국에 고발조치함. 또한 지금까지의 쓰레기 청소비용을 변제 조치함. 신고자는 보상금 십만 원 현상금. 연락처 019-***-***. 가옥주 백"(서울 창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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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때문에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면서 문구도 점점 험악해진다. ⓒ 김대홍


저주나 협박이 강한 접근이라면 애교나 부탁은 부드러운 접근이었다. 담배 피우는 불청객을 만화로 표현하는가 하면, 부드러운 문구로 사람들 양심에 호소했다. 이른바 쓰레기판 '햇볕정책'인 셈.

"꽃은 사랑이요 비양심은 쓰레기입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이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이곳에 쓰레기(양심)을 버리지 마십시오" "쓰레기를 버리면 상근이(1박2일에 나온 개 이름) 동생으로 간주하겠다"와 같은 문구들이 온건파들이 내건 경고문이다.

낙서엔 간혹 지역이나 시대 특수성이 반영된다. 경남 밀양에선 '담배꽁초 휴지를 버리면 범칙금 4000원'이란 안내판을, 서울 용산구에선 영어와 아랍어, 한글 등 3개국어로 된 '쓰레기 투기 금지' 경고문을 발견했다. 밀양에선 1980년대 초 5공화국 정부가 실시한 범칙금 정책을 엿보았고, 용산구에선 지역에 있는 이슬람문화를 느꼈다. 용산구 한남동엔 '이슬람 성전'이라 불리는 서울중앙성원이 있었으니 말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곳에선 외국인들을 겨냥해서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경고문을 보았다. 점점 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타성이 쓰레기 투기와 맞물려 분노로 표현됐다.

'금지' 항목에서 쓰레기 다음으로 비중이 많은 건 '변' 계열이었다. 소변과 대변을 하지 말라는 내용. 역시 강한 내용이 많았다. '작두' '가위' 그림을 그리거나 개로 간주하겠다는 내용들이었다. 그림이나 내용을 보면 경고 대상은 단연 남성이었다. 강경파가 득세하는 가운데 온건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서울 한 동네에서 본 문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게 만들었다.

"추운 겨울날 밖에서 볼일 보기 추우셨죠? 노크하세요. 문 열어 드릴게요. 화장실 사용하세요. 밖에서 볼일보다 사람 지나가면 부끄럽잖아요. 꼭 노크하세요."(서울 충신동)

'금지' 항목에선 그 외 '불법주차'(17), '담배'(14), 무단침입'(11건), '개'(9건), '꽃꺾기'(7) 등이 뒤를 이었다.

이성에 대한 억눌림, 타인에 대한 분노 등 낙서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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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낙서엔 종종 애정관계에 대한 관계도가 올라온다. 이런 낙서엔 고발의 성격과 함께 자기 소망대로 관계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 있다. ⓒ 김대홍


낙서 내용에서 '금지' 다음으로 많은 건 '음지' 계열이었다(48건). 평상시엔 표현하지 못하는 욕구를 낙서를 통해 드러냈다. 

'애정'과 관련된 내용이 특히 많았다. 누구와 누가 사귄다는 내용이 많은데, 익명파와 실명파로 나뉜다. 의외로 익명파보다는 실명파가 많았다.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 걸 드러내고 싶거나 누구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욕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남녀의 생식기나 성행위를 표현한 내용도 일부 있었다.

'욕' 부문은 무차별 다수와 특정인으로 나뉜다. 내용은 대부분 특정인을 겨냥했다. 하지만 제3자로서는 욕을 하는 대상과 욕을 먹는 대상을 알 수 없었다. 낙서라는 게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지만 글쓴이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아야 할 때가 많다는 점을 '욕' 낙서는 제대로 보여줬다.

'음지' 계열 다음으로 많은 건 정보와 홍보성 내용(33건)이었다. 물건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다수. '이사' '열쇠수리' '점포임대' '가게이전'과 같은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그 외에도 신상고백, 정치사회종교에 관한 발언, 불조심 경고, 신변잡기 등 분류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다. 세상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고, 담과 벽, 바닥은 오갈 데 없는 불평과 걱정들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낙서는 주변 더럽혔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 마음에 파문 일으켜

낙서의 사전 속 정의는 "글씨나 그림 따위를 장난이나 심심풀이로 아무 데나 함부로 씀"이다. 정의에 따르면 낙서의 역사는 꽤 깊다. 몇 만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나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를 초창기 낙서로 보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보다 더 오래된 낙서들이 발견돼 뉴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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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도시 골목 또는 다리 밑에서 꽤 정교한 그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순식간에 남들이 보지 않는 시각에 그림을 그리고 사라졌다. 그라피티라 불리는 이들 그림에 대해 한편에서는 도시를 더럽힌다고 하고, 또 한편에서는 작품으로 인정한다. 사진은 서울 도림천에서 본 그라피티. ⓒ 김대홍

어쨌든 중요한 건 낙서의 역사가 꽤 오래됐다는 사실이다. 낙서란 기본 성격 자체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리를 이룰 때 가능하다. 따라서 낙서엔 집단의 공통 심리가 어느 정도 스며든다.

1972년 이화여대 김절은 교수는 캠퍼스 내 낙서를 통해 낙서를 하는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다. ▲ 사람은 원래 더럽혀주고 싶은 본능이 있으나 제도나 법률 등 사회 규범 때문에 제약을 받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낙서를 한다 ▲ 낙서를 하면서 복잡한 생각과 갈등에서 해방된다 ▲ 사회를 비판하면서 풍자나 해학을 만들어낸다.

낙서하는 방식은 꽤 다양하다. 벽에 곧장 펜으로 쓰는가 하면 종이에 써서 붙이기도 하다. 시멘트가 굳기 전 말랑말랑할 때 쓰기도 하는데 이때 장소는 주로 바닥이다. 어느 순간 스프레이를 사용한 낙서가 나타났다. 주로 특별한 뜻이 없는 글자나 그림 등이었는데, 꽤 공들여 작업했다는 게 특징이었다. 이들 낙서는 그라피티라 불리며 작품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낙서란 형식이나 내용 자체가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무나 돌 등 자연물이나 문화재에 낙서하는 행위는 꽤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낙서를 없애고자 할 때 이런 사례들이 주로 인용됐다.

"지난번 설악산에 올랐을 때 느낀 것은 위험한 곳과 길 잃기 쉬운 곳에 표지해둔 안내판 위에다 별로 유명하지도 못한 자기 이름과 학교이름을 긁어놓거나..."-경향신문(1962년 10월 9일)

2011년 국보인 천전리 각석에 돌로 낙서한 범인을 잡기 위해 울산시 울주군과 울주경찰서가 포상금을 내건 것이나, 해외 문화재에 관광객들이 남긴 낙서가 종종 외신을 타는 걸 보면 낙서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이뤄지는 모양이다.

낙서는 때때로 주변 경치를 더럽혔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군중의 움직임에 민감한 정부들은 이런 낙서에 촉을 곤두세웠다. 식민지 백성과 점령지 백성으로 나뉜 일제시기, 일본 경찰은 학교대문과 벽, 화장실에 쓰인 낙서를 수시로 검사했다.

"함흥부내 대화정 공동변소벽에 메이데이에 관한 낙서가 있어 함흥서에서는 혈안 활동 중이라 한다."-동아일보(1936년 5월 2일)

해방 뒤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이 땅엔 민주주의가 자라지 못했고, 군인들이 정치했다. 사람들은 그 점이 불만이었다. 대놓고 불만을 토하면 잡혀가거나 고초를 겪었으니 탈출구는 결국 낙서였다.

"서울역 공중변소에는 대통령을 그려놓고 ×몽둥이로 때리는 그림이 자주 등장했다. '유신 철폐' '박정희 ××' '공화당 ×들이 국민을 다 죽인다' 같은 정치구호를 휘갈겨 쓴 것도 많았다. 관할 남대문경찰서 보안과는 이런 정치성 낙서를 남들이 보기 전에 지우는 일이 큰 업무였다. 혹시라도 중앙정보부 요원이 먼저 그걸 발견하면 경찰서장이 곤욕을 치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네이버 한국현대사 '그시절 그이야기-유신시대 낙서의 사회학'

세월이 흐르면서 동네 담벼락이나 화장실에서 "농산물 개방 반대" "FTA 반대"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낙서들이 뒤를 잇긴 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불만이나 불평은 점점 제도 속에서 흡수됐다. 

더불어 개인 재산에 대한 주장이 강해지고, 청결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면서 낙서는 보기 어려워졌다. 인터넷이나 모바일폰이 대세가 되면서 낙서 장소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갔다. 과거 골목 담벼락이나 화장실에서 볼 수 있었던 낙서들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나 온라인 댓글에서 보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골목 낙서는 낯설다. 낙서만큼이나 골목 자체도 낯설어졌다. 낙서문화가 활발하던 시기 사람들은 낙서모임을 만들고, 학자들은 낙서를 연구했다. 골목이 살아있던 시절 이야기다. 낙서가 사라진 건 골목이 사라진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골목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동네 전체가 사라진다. 몇몇 도시에선 골목의 가치에 주목하며 골목탐방을 진행한다. 골목안내 책자를 만든 곳도 있다. 같은 시기 어느 곳에선 골목을 부수고, 어느 곳에선 골목을 칭송한다. 골목과 낙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느 순간 골목탐방을 하듯이 낙서탐방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장소는 기억을 자극하고, 기억은 장소나 사물을 통해 되살아난다. 오래전 선사인들이 남긴 낙서를 통해 그 시대를 유추하는 것처럼 지금 낙서 또한 그럴 것이다. 현시기 어느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한 부분이 소리 없이 사라져간다.
#낙서 #화장실낙서 #담벼락낙서 #그라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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