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서 일본군 코스프레 즐긴 대통령

[정치 톺아보기] 박정희와 장준하 그리고 김대중

등록 2012.08.20 11:12수정 2012.08.20 15:42
1
원고료로 응원
a

장준하 유골의 '싸인' 지난 1일 검사한 고 장준하 선생의 유골. 오른쪽 귀 뒤쪽 두개골에 원형으로 함몰된 흔적이 있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지난해 방송된 <싸인>이라는 SBS 드라마는 법의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소재로 다뤄 인기를 끌었다. 법의학자는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아니라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의사다. 범죄 희생자들에게 남겨진 흔적인 '싸인'(Sign)을 통해 범죄에 숨겨진 '사인'(死因)을 밝혀내는 것이 그들의 본업이다.

그런데 사체가 죽음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보낸다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벌어졌다. 귀 뒤쪽에 둔기에 의한 함몰이 선명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이 공개된 것이다. 그 한 장의 두개골 사진은 37년 동안이나 가려져 있던 타살의 '싸인'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장 선생의 유골을 검사한 이윤성 서울대 의대 교수는 소견서에서 "머리뼈와 골반에는 골절 소견이 있지만 다리나 늑골(갈비뼈)에는 뚜렷한 손상이 없다"며 "(장 선생은) 머리 손상에 의해 사망했으며, 머리뼈와 오른쪽 관골 골절은 둔체(딱딱한 물체)에 의해 손상됐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소견에서 인위적인 가격 뒤에 절벽에서 추락했을 가능성과 강제로 떠밀어서 바닥 근처의 돌에 부딪혔을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았으나 사고사가 아닌 타살에 의한 것임은 부인하지 않았다.

광복군 장교 장준하와 황군 장교 박정희의 삶

a

광복군 시절의 장준하 1945년 8월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군 OSS 특수훈련을 마치고 산동성(山東省) 유현(維懸)의 어느 사진관에서 찍었다. 오른쪽부터 장준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노능서 선생이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이 교수는 18일자 <한겨레> 인터뷰에서 "37년이나 지나 유골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가벼운 마음으로 가서 제대로 검사를 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도 선명하게 37년 만에 드러난 '싸인'과 '사인'이 가리키는 곳에는 평생 장 선생과 대척점에 섰던 박정희가 있다.

장준하는 1918년생이고, 박정희는 1917년생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다 갔지만, 삶의 궤적은 정반대였다.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에 파병되었으나 일본군을 탈출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2400㎞를 걸어 광복군에 합류해 광복군 장교가 되었다.

반면에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졸업후 문경 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1940년 4월 일제가 중국 침략을 위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이하 만주군관학교)에 2기생으로 입교해 1942년 3월 수석 졸업했다. 박정희는 부상으로 부의(溥儀, 푸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은 졸업생 대표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의 창씨 개명)로서 이렇게 답사를 했다.


a

만주군관학교 생도 대표 박정희 <만주일일신문>(42년 3월)에 보도된 만주국 신경 육군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 박정희 생도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나는 오늘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천황 폐하와 부의 황제 폐하께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충성을 다할 것으로 다짐합니다. 나는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백무현, <만화 박정희 1>, 90쪽)

부의는 일본 관동군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한 뒤 이듬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황제다. 일제는 총독을 파견했던 조선이나 대만과 달리 중국에는 중국인으로 '얼굴마담'을 내세웠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친일파로 볼 것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수석 졸업한 박정희는 1942년 일본 육사에 편입-졸업 후 44년 황군(皇軍)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니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

박정희의 혈서 "일본에 '견마(犬馬)의 충성' 다하겠다"

더구나 박정희는 연령 초과로 군관학교 시험에서 탈락하자, 혈서와 함께 입학허가를 호소하는 편지를 지원서류에 동봉해 제출하는 등 입학허가를 얻어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공개된 이 '혈서 편지'는 지금도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는데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을 위해 굳건히 결심합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과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a

박정희의 '견마의 충성' 혈서 일본에 ‘견마(犬馬)의 충성’과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一死以テ御奉公)을 하겠다는 박정희의 혈서는 당시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에 ‘혈서 군관 지원 -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왼쪽은 황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일본에 '견마(犬馬)의 충성'과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一死以テ御奉公)을 하겠다는 박정희의 혈서는 당시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에도 '혈서 군관 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는데 "29일 치안부 군정사에 조선 경상북도 문경서부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군(23)이 죽음으로써 봉공하겠다는 혈서가 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 군관학교 입학 자격이 16~19세였던 것에 비추어 23살이었던 박정희가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견마의 충성 혈서' 덕분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입학허가를 얻은 박정희는 일본의 기대에 부응해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 육사에 3학년으로 편입해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황군 소위로 임관해 군복을 입고 금의환향하게 된 것이다. 여제자 이순희씨는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증언했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을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중략)…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와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박 선생님을 교사 시절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정운현, <실록 군인 박정희>)

사쿠라를 좋아한 박정희의 성취와 향수

군수·서장·교장은 각각 지방의 행정·치안·교육을 관장한 기관장이다. 황군 장교는 그런 기관장들을 사사로이 불러 모을 만큼 일본 군국주의 통치의 핵심세력이었다. 군국주의 황군 장교로서 박정희의 성취와 그에 대한 향수는 국군 장교 시절은 물론 대통령이 되어서도 두 가지 '코드'로 나타난다. 벚꽃과 일본군 장교복에 대한 '코스프레'가 그것이다.

만주군관학교 졸업생 답사에서 "나는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맹세한 박정희는 실제로도 벚꽃을 무척 좋아했다. 또한 대통령이 되어서는 해방후 이승만 정권 시절에 베어져 나간 벚꽃을 부활시키고 진해, 서울 강변북로에 "벚꽃을 심으라"고 직접 지시했다.

또 서울시 기획관리실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교수에 따르면, 여의도 개발은 전적으로 박 대통령의 뜻대로 이뤄졌고, 국회 주변의 조경도 박 대통령이 직접 신경 썼다. 미국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벚꽃 거리를 본떠 국회가 있는 여의도 윤중제에 벚꽃을 심은 것은 박정희 취향이 반영된 '몰역사적인 결정'이었다는 것이 한일 100년사에 묻힌 '벚꽃의 비밀'을 추적한 류순열 기자의 결론이다.

a

박정희와 국가재건최고회의 5.16 군사쿠데타 며칠 뒤의 장도영(왼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 그러나 장도영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의장에서 해임되고 몇 달 뒤에는 혁명세력에 의해 반혁명 내란음모 혐의로 기소되는 곡절을 겪었다. ⓒ 정부기록사진집


놀랍게도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부터 4월이면 최고회의 및 정부 요인과 외교 사절을 초청해 청와대에서 벚꽃놀이 행사를 주재했다. 또 대통령 재임 중에는 4월마다 진해공관을 찾아 휴가를 즐기거나 주한 외교사절을 초청해 벚꽃놀이 행사를 가졌다. 1976년 4월 9일 진해 방문 때는 박용범 진해시장에게 "가로수뿐 아니라 산이나 들이나 심을 수 있는 곳에 모두 벚꽃을 심어 진해는 벚꽃의 명소가 되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박정희 '벚꽃 사랑'은 부인 육영수를 그리는 1977년 4월 1일 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기상하여 공관 후정 산책. 후정 벚꽃 터널을 걸어 본다. 1974년 4월 9일 아침 아내와 같이 마지막으로 거닐던 이 길, 추억의 꽃길을 걸어간다. 낙화가 길을 덮고 있었다…(중략)…매년 봄이면 이 길을 걷는 것이 나의 가장 즐겁고도 감상적인 시간이다."(류순열, <벚꽃의 비밀> 38쪽 재인용)

황군 장교 박정희의 일본 군복 '코스프레'

군국주의 황군 장교로서 박정희의 성취와 향수를 드러낸 또 다른 코드는 뜻밖에도 일본 군복에 대한 '코스프레'다. 다음은 1973년 박정희의 특명을 받아 이른바 윤필용 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강창성(육사 8기) 전 보안사령관의 1991년 회고다.

"계엄선포(1971년 10월 17일) 한 달 전쯤인가.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류순열, <벚꽃의 비밀> 39쪽에서 재인용)

일국의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침략군 군대에 몸담았던 시절의 복장까지 갖춰 입고 '좋았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박정희가 가끔 일본군 장교복 코스프레를 즐겼고, 또 그럴 때면 항상 기분이 좋았다는 것은 그가 '뼛속까지 황군 장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박정희가 선우휘 <조선일보> 주필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 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a

광복군과 일본군의 대척점 광복군 장교 시절의 장준하와 일본 황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동시대를 산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정반대였다.


청와대에서 벚꽃 놀이를 즐기고 집무실에서 일본 군복 코스프레로 행복감에 젖은 황군 장교 출신 박정희에게 광복군 장교 출신 장준하의 존재는 그 자체가 눈엣가시처럼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며 박정희의 친일 경력을 폭로한 장준하의 일갈은 박정희의 감성과 성취감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떠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영구집권을 꾀한 한국 정치의 암흑기인 1973~75년 무렵에 박정희 최대의 정적이었던 김대중에 대한 도쿄 납치사건과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장준하의 의문사가 연달아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함석헌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어"

김대중과 장준하는 박정희에 맞선 민주화투쟁에서 한 길을 걸었다. 김대중은 장준하가 발행한 <사상계>에 글도 쓰고 재정적으로도 후원했다. 그러나 1971년 대선 때는 장준하가 다른 진영에 가담해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김대중과 장준하 사이에는 약간의 앙금이 있었다. 그러나 긴급조치가 난무하자 장준하는 효율적인 반독재 투쟁을 위해 민주세력의 단일화를 촉구했고, 이를 계기로 1975년 3월 31일 김대중·김영삼·양일동·윤보선 4자회담이 열렸다.

그런데 일련의 야권 통합 논의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에게 단독 회담을 제의하면서 깨졌다. 김영삼은 박정희와의 청와대 회담 후 일체 그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세인들은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김영삼의 입장 변화와 시국 상황에 낙담한 장준하는 1975년 7월말 김대중의 자택을 찾아 "김 선생과 함께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사회를 이루고 싶다"고 밝히고 앙금을 풀었다. 두 사람이 점심을 함께 하며 나눈 대화 내용은 <김대중 자서전>에 이렇게 실려 있다.

"식탁 가득 화기가 넘쳤다. 장 선생은 등산의 묘미를 얘기하며 등산 때문에 건강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그간에 오른 산 이름을 두루 열거했다. 거의 모든 산을 오른 듯했다. 내가 염려되어 한마디 했다.

'그렇게 다니셔도 괜찮겠습니까?'
'설마 놈들이 날 어떻게 하겠소.'
'그래도 혼자서는 절대 다니지 마십시오. 세상이 너무 험합니다.'

그것이 내가 장 선생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의 따뜻한 웃음과 우리 집을 나서는 뒷모습이 선한데,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 계곡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홀로 등산'을 강력하게 만류했어야 하는데, 그리하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김대중 자서전 1>, 348쪽)

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을 확신했던 함석헌 선생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a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 하나는 죽었어야 했어" 1975년 10월 49재를 맞이해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재야 및 정치권 인사들. 함석헌과 이희호, 김대중의 모습이 보인다. 타살을 확신한 함석헌은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하고 힘을 합쳤기 때문에 박정희 입장에서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의 하나는 죽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는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

한편, 장준하기념사업회와 유족은 20일 오전 유광언 기념사업회 회장과 장남 장호권씨가 청와대를 직접 방문해 사건의 재조사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낼 예정이다. 장호권씨는 "37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아버지의 유골은 추락사가 아닌 타살의 가능성을 너무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며 재조사와 진상규명에 착수해줄 것을 촉구했다. 1924년생인 김대중은 2009년 8월 18일 눈을 감았다. 박정희 독재에 맞서 싸운 두 사람의 기일은 공교롭게도 각각 8월 17일과 18일이다.
#장준하 #박정희 #김대중 #함석헌 #광복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