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새는 집에 살아봐서 아는데"...MB표 주인과의 전쟁

[공모 - 나는세입자다] 비 새면 실리콘으로 땜빵하라는 주인에 맞서다

등록 2012.10.03 17:48수정 2012.10.0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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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대도..."

들국화가 부른 노래 가사 중 일부다. 우리에게는 가수 김장훈이 불러서 익숙해진 곡이다. 노랫말이 아름다워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집에 비가 새는 상황이지만 고운님과 함께 하니 젊은 날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걸 보면 작사가는 둘 중 하나인 거 같다. 대단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사람이거나, 비가 새는 집에 살아보지 않았거나. 부디 전자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비가 새는 집에서 살아보니 엄청난 정신력과 인내력이 요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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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율 100% 보일러실은 이미 저수율 100%를 넘겼습니다. 대한민국은 물부족 국가에서 벗어났습니다. ⓒ 신원기

"아니, 아무리 올라도 그렇지 무슨 전세를 44%나 올려달라고 하세요?"

2012년 5월 25일, 전세 기간이 만료되었다. 군대에서 2년은 20년보다 길더니, 전세계약에서 2년은 너무나 빨랐다. 황진이의 시조처럼 시간을 베어내어 겨우내 이불 속에 묻어두었다가 그리운 님 오시는 날에 펼쳐내고 싶었지만, 그건 그저 나의 바람일 뿐이었다.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남거나 떠나거나. 남더라도 전세가격이 동결되거나 혹은 오르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집주인이 그 가격에 계약을 할 리는 만무했다. 몇 달 전부터 강북지역 전세가격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는 보도가 매체를 불문하고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세대란. 불안했다. 이내 그 불안감은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44%, 오직 실력으로 평가받는 프로스포츠에서도 연봉 44% 인상은 보기 힘든 수치다. 시즌을 통째로 씹어 먹는다는 표현을 전문가들과 팬들이 입에 달고 'MVP', '수직상승'이라는 문구가 기사에 수시로 보이면 가능할까. 처음 듣고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본주의 하에서 건물주의 재산권 행사에 대해 탓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전세금의 갭을 줄여보기 위해서 이리저리 얘길 해봤지만, 주변 부동산 업체에서 단단히 바람을 집어넣은지라 나의 입김이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그래도 집주인과 친하게 지낸 덕에 격차를 많이 줄이긴 했지만 회사에서 단돈 10원이 모자라서 부도를 맞아도 부도는 부도 아닌가. 온전한 합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아쉽지만 나름 정이 많이 든 동네지만 떠나기로 결정했다. 안녕.


달라진 집주인, 그리고 어린왕자

2012년 6월 19일, 우여곡절 끝에 이사를 했다. 촉박한 시일에 좀 쪼이긴 했지만 서두른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일단은 전세 물건이 씨가 말라버린 데다가 곧 장마철인데 장마철에 이사를 하기엔 상당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혹시나 이삿날 비라도 오면 낭패가 아닌가. 집이 겉으로 보이기엔 허름해 보였지만 지하철역과 가깝다는 장점이 있는지라(사실 전에 살던 집은 지하철역과 멀어도 너~무 멀었다) 고심 끝에 큰맘 먹고 결정했다.

허름해도 사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에 들어와 잠만 자고 나가는 경우가 많으니 크게 상관없다는 나름의 합리적인 구실이 한몫 단단히 했고, 집주인인 노부부의 첫 인상이 선하다는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정말 만족할 환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세난이 이리도 심한 와중에 좋은 선택이라고 스스로 위안 삼았다. 물론 처음에는 말이다.

생텍쥐페리의 대표작인 어린왕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렇게 해서 어린 왕자는 여우와 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잘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잘 가. 내가 비밀 하나를 알려줄게.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단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여우가 말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잊지 않으려고 따라 말했다.

뜬금없이 갑자기 왜 어린왕자 타령인가 싶겠지만, 그 동화 속 어린왕자가 잊지 않으려고 혼자 말할 때 나도 따라했었어야 했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정말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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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시작 이 사진을 집주인께 감사의 표시로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 신원기

집을 이사하자마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왔다. 외부 방충망이 삭아서 바람 부니 절반이 날아갔다거나 기껏 가져온 에어컨을 달려고 보니 배선비가 에어컨 값보다 더 나오거나 다양한 벌레가 말춤 추며 지나가는 등등 사소한 문제들은 흔하게 일어났다. 내 비위가 너무 강한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2012년 7월 9일, 서울시내에 폭우가 쏟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거세게 퍼부었다. 새로 들어온 집은 4층 같은 3층. 창문만 잘 닫고 자면 들리는 빗소리에 박자 맞춰 잠을 청하면 된다. 촤르르르.

창문에 부딪치는 빗소리에 잠이 막 들려고 하는 그 찰나, 저 꿈속 저편에서 들려오는 무엇인가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소리, 이건 물소리다!! 설마 했었는데. 내 눈을 의심했다. 창문, 정확히는 창틀과 천장의 경계면에서 뚝뚝 떨어지는 액체는 바로 비였다.

과학적으로 수킬로미터 상공에서 중력에 못 이겨 지상으로 떨어진 빗방울이지만 그 순간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점점 거세지는 빗방울에 힘입어 창틀에서는 마치 수도꼭지 덜 잠근 마냥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을 흥건히 적셔나갔다. 순간 정신을 번쩍 차리고 대접으로 내리는 비를 받쳐 놨다. 그 순간, 이성을 잃고 떨어지는 성난 빗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건 뭐지? 전기 배선이 비가 새는 벽에 있는지라 쉽사리 다가서지도 못하는 상황, 비는 밤새 내렸다.

다음날 집주인과 어렵게 통화연결이 되었다.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을 제시하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따졌는데 주인의 대답이 불후의 명작이었다. 선한 인상에서 받은 좋은 느낌을 아주 시원하게 단 한 번에 날려주셨다.

"에... 그 동네 집들은 봐서 알겠지만 투자목적으로 산거라... 돈을 왜 들여... 그리고 나도 젊을 적엔 비 새는데 많이 살았어..."

이런! $&^(*%&^5^^*(*)&^%(&*#... 할 말을 잃었다. 이런걸 전문용어로 유구냉무라고 하나.

누수와의 전쟁, 실리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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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제 623조 임대인은 목적물을 임차인에게 인도하고 계약존속 중 그 사용, 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의무를 부담한다. ⓒ 신원기

바야흐로 7월 초. 여름은 이제 시작이고 비는 우발적으로 아낌없이 쏟아졌다. 집을 내놓고 나가고 싶었지만 비새는 집에 들어올 세입자는 전세대란이라 하더라도 없다. 그렇다고 사기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비새는 집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아니다.

'집주인과의 대화'는 이쯤되면 막 나가는 수준이었다.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르고 짜증이 마르지 않았다. 주택 임대차 보호법을 줄줄 외워대면 집주인은 실리콘으로 맞섰다. 젊을 때 실리콘 공장에 다니셨는지 일단은 그걸로 처치를 해보라나. 그렇다고 질 수 있나. 좋게 얘기도 해보고 내고 사정도 해보고.

새는 비에도 이젠 무덤덤 해질 법했던 어느 날, 새벽에 우발적으로 내린 비가 받아놓은 그릇을 넘쳐서 부엌을 가로질러 현관에 있는 신발까지 죄다 촉촉하게 적시는 사고가 발생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대로 쓰러지는 줄 알았다. 누렇게 물들어 버린 하얀 캔버스화를 보니, 새삼 전의가 불타올랐다. 절대 지지 않겠다!

집주인을 '존경'합니다

투쟁방법을 바꿨다. 주인과의 모든 전화통화는 녹취를 했고 일단 비가 새면 사진부터 찍었다. 그리고 하루에도 수십 번 전화를 했다. 법적 책임부터 인간의 도리까지 동서 고금의 모든 미사여구를 다 들이댔다.

집 주인은 일상이 무료했던지 전화하면 아주 넙죽넙죽 즐겁게 받으셨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면 천번 만번이라도 찍으리라! 전화하는 나도 지쳤는데, 한결같은 자세로 열심히 응대해주신 집 주인께 이 자리를 빌려서 수고하셨단 말을 드리고 싶다. 이 수기의 80%는 당신이 만드셨습니다. 존경합니다.

내가 미처 몰랐지만 덥고 습한 여름에 돈 들어가는 얘기만 줄창 들으니 집 주인도 슬슬 짜증이 올라왔던 모양이다. 조금씩 전화를 피하고 통화 도중 갑자기 바빠지시는 등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했는지 격한 용어도 자주 등장하였다. 물들어버린 캔버스화에 항전을 맹세한 나는 더욱 고삐를 당겼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결국 9월 8일. 역사적인 날이었다. 드디어 지붕 방수 공사가 시작되었다. 망치소릴 듣는데 아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어찌나 감격스럽던지! 집 주인은 못마땅한지 전화로 아주 생색이란 생색은 다 냈지만 뭐 어떤가. 이제 큰 걱정거리를 덜어서 다소 심심해질 거 같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승자의 아량으로 그 정도는 봐 줄 수 있다. 이제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좀 보내 볼까. 어라? 왜 불이 안 들어오지.. 후우. 방심하면 안 된다.

"안녕하세요. 저 301호에 사는 세입자인데요. 불이..."
덧붙이는 글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입니다
#세입자 #전세 #누수 #어린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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