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가도 시는 남아있다

김규동 시인의 1주기에 부치는 글

등록 2012.09.29 10:00수정 2012.09.30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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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모임 안내장


김규동 선생의 편지

시인 김규동 선생의 1주기 추모 모임이 지난 27일 오후 5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있다는 기별을 받고 청량리 행 열차에 서둘러 탔다. 이즈음은 가능한 나들이를 자제하건만 이 모임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을 느꼈다. 그것은 선생이 생전에 나에게 보낸 편지 한 통 때문이었다.


나는 1999년 8월 5일 항일전적지 답사길에 도문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승첩지를 탐방하였다. 일행이 봉오동 전적지를 둘러보는 길에 조중 국경선의 두만강이 있었다. 두만강을 바라보자 문득 김규동 시인의 '두만강'이 떠올라 나의 <항일유적답사기>에 전재하였다. 그 뒤 책이 나온 다음 가장 먼저 선생에게 우송해 드렸다. 곧 선생의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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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동 선생 약력 ⓒ 창비

박도 선생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 특히 두만강에 인접한 지역의 묘사는 옛 생각에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군요. 저의 졸작을 소개해 주신 것도 분에 넘치는 일이올시다.

제 욕심 같아서는 명동학교 설립자요 독립운동가인 김약연(金躍淵) 선생이 조금 소개됐더라면 하는 일입니다.

김약연 선생은 너그럽게 생기신, 머리가 하얀 노인으로 일 년에 두어 번 함경도 종성 우리 집에 오셨지요.

약국을 경영하시던 아버님이 김약연 선생님 오실 때는 그때 돈 200원, 혹은 300원을 독립자금으로 내놓곤 하시는 걸 저는 어릴 때 보고 자랐습니다. 제 아버님은 문익환 목사의 선친 문재린 목사와 명동학교 동창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시는 우리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는 돈 없는 사람한테는 약값도 받지 않고 치료하고, 겨우 겨우 먹고살 만큼 돈푼이나 모아놓으면, 너희 아버지는 그 지전을 곱게 인두로 다린 뒤, 흰 수건에 곱게 싸서 무릎을 꿇으시고 김약연 선생님에게 드렸다.

그래서 너희들한테는 된장국이나 조밥만 먹였다. 규동아, 너는 입쌀밥이 그토록 먹고 싶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조밥을 하라는데 너만 입쌀밥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이와 같은 하소연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이야기를 더러 하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독립운동이 어느 만큼이나 중하고 급한 것인지를 모르시는 탓으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
                                                                           2000년 11월 17일 김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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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강 너머가 북한 땅이다. ⓒ 박도


두만강

나는 이 편지를 매우 귀하게 갈무리하며, <항일유적답사기> 재판 때는 그 사연과 함께 이 편지도 함께 실었다. 이 편지에서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이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의 한 장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백성들이 있었기에 훌륭한 독립전사가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이 편지의 사연을 추모 모임에서 유족과 선생을 잘 아는 문우와 후배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이날 추모 모임장에서 여러 귀한 분을 뵈었다. 초청자이신 민영 선생, 고인 회고를 하시는 백기완, 김병익 선생, 그리고 고인의 시를 낭독하시는 윤정모 소설가와 김형태 변호사, 그밖에 김종길, 정희성, 구중서, 김사인, 김창규, 오철수 … 등 여러 선후배 시인과 선생의 자제분, 그리고 사모님을 뵙고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사모님은 이날 처음 뵈었는데 김규동 선생처럼 아담하시고 아직도 얼굴이 고우셨다. 부부가 금슬이 좋으면 얼굴이 닮는다는데 내외분이 남매처럼 얼굴이 비슷했다. 시인의 아내로 평생 고생이 많으셨을 테지만 평소 덕을 많이 쌓으셨던 탓인지 나이에 견주어 매우 고우셨고, 선생의 아드님도 선생처럼 아담한 체구에 다정다감해 보였다.

소설가 남정현 선생은 식순에 '50년의 인연을'이라고 나와 있기에 이 자리에서 으레 만날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자가  선생은 건강상 이유로 오실 수 없어 영상편지를 보내 화면으로만 뵈었다. 남 선생은 남북작가회의 때 불편함에도 백두산까지 올라갔으나 통일 해맞이 행사에는 참석치 못하시고 승용차 안에 계시다가 나의 부축으로 장군봉에 올랐다. 선생은 천지를 배경으로 "조국통일 만세!"를 외치셨다. 그때의 사진이 아직도 내 컴퓨터에 저장돼 있다.  2부 소연 자리에서 나는 김규동 선생의 '두만강'과 함께 편지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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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장군봉에서 '조국통일만세!'를 부르는 소설가 남정현 선생 ⓒ 박도


두만강

            김규동

 얼음이 하도 단단하여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못 타고
 썰매를 탔다.

 얼음장 위에 모닥불을 피워도
 녹지 않는 겨울 강
 밤이면 어둔 하늘에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강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멀리 들려왔다.

 우리 독립군은
 이런 밤에
 국경을 넘는다 했다.

 때로 가슴을 가르는
 섬뜩한 파괴 음은
 긴장을 못 이긴 강심 갈라지는 소리

 이런 밤에
나운규는 <아리랑>을 썼고
 털모자 눌러쓴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과 싸웠다.

 지금 두만강엔
 옛 아이들 노는 소리 남아 있을까
 강 건너 개 짖는 소리 아직 남아 있을까

 통일이 오면
 할 일도 많지만
 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 놓아 울고 나서
흰머리 날리며
 씽씽 썰매를 타련다

 어린 시절에 타던
 신나는 썰매를 한번 타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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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동 선생님의 글과 그림 ⓒ 김규동


느릅나무
           
나는 이 시를 낭독한 뒤 선생의 생전 꿈이 이제 귀신이 되어 겨울마다 두만강에서 마음껏 썰매를 타시라고 말씀드렸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데 유족들이 <느릅나무에게>라는 시집 한 권과 참석 답례로 손수건 한 장을 주었다. 염치 없이 받아 중앙선 열차를 타고 원주로 돌아오면서 열차 안에서 시집을 펼쳤다.

느릅나무에게

               김 규동

나무
너 느릅나무
50년 전 나와 작별한 나무
지금도 우물가 그 자리에 서서
늘어진 머리채를 흔들고 있느냐
8·15 때 소련병정 녀석이 따발총을 안은 채
네 그늘 밑에 누워
낮잠 달게 자던 나무
우리 집 가족사와 고향 소식을
너만큼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이제 아무 데도 없다.
그래 맞아
너의 기억력은 어린 시절 동무들은 어찌 되었나
산 목숨보다 죽은 목숨 더 많을
세찬 세월 이야기
하나도 말고 들려다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 날아가마
나무야
옛날처럼
조용조용 지나간 날들의
가슴 울렁이는 이야기를
들려다오
나무, 나의 느릅나무.
#김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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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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