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관'으로 등교하는 학생들, 어쩌면 좋을까요

[학생부장 일기 30] 낮보다 밤에 더 초롱초롱해지는 아이들

등록 2012.10.10 14:36수정 2012.10.1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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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잊은' 학교 풍경 1년 365일 불야성을 이루는 곳, 학교의 불빛이 유난히 환하다. ⓒ 서부원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푸른 하늘과 상쾌한 바람이 몸과 마음을 맑게 하는 참 좋은 계절이다. 아이들이 공부하기에도 1년 중 요즘만한 때가 없다. 칼바람 부는 겨울은 말할 것도 없고, 황사에다 꽃가루 날리는 뿌연 봄과 무더위로 꿉꿉한 여름에 어찌 견줄까.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부르는 건 그래서다.

그러나 공부하기에 좋은 계절은 잠자기에도 그만인 모양이다.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는 아이가 여름방학 보충수업 때보다 더 늘어난 것 같다. 무슨 '닭병' 환자도 아니고, 등교하자마자 책상에 엎드려 점심시간 때까지 줄곧 자는 경우도 학급마다 드물지 않다.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교실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일단 자리에 가서 흔들어 깨운다. 그래도 잠을 못 이기면 찬물로 세수를 하라며 내보내고, 아예 코를 고는 등 수업에 적잖이 방해가 된다 싶으면 교실 뒤로 가서 선 채 수업을 받으라고 벌을 주기도 한다. 그래봐야 교실 뒷면에 설치된 사물함에 기대 꾸벅꾸벅 졸기 일쑤지만, 적어도 다른 아이들에게 방해는 되지 않으니 그나마 만족할 밖에.

어떻든 엎드려 자는 아이들과 씨름하다 50분 수업시간이 어느새 지나 버린다. 그들이 학교에 와서 대놓고 잠자는 이유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우선 늦은 밤까지 학원과 독서실을 순례하는 사교육 열풍 탓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학교마다 대학입시 위주로 편성된 획일적인 교육과정과 완고한 학벌 구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무사안일에 빠져 구태의연한 수업방식을 고수하는 교사들에게 화살을 돌릴 수도 있겠다.

'여관'이 돼버린 학교, 단박에 깨어날 방법은 없을까

또 다른 이유는 없을까. 과연 학벌 구조가 완화되어 교육과정이 정상화되고 교사가 열과 성을 다해 수업을 하면, 언제부턴가 '여관이 돼버린' 학교가 단박에 '깨어날' 수 있을까. 조심스럽지만,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학벌 구조와 입시, 사교육 때문인 건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까닭이다.

한창 클 나이인 아이들에게 잘 먹고 잘 자는 건 매우 중요하다. 요즘 아이들에게 밤과 낮의 구분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고등학생들에게 야간자율학습은 정규 교육과정으로 자리잡은 지 이미 오래고, 교문을 나서는 밤 10시 정도야 초저녁쯤으로 여긴다. 집에 가는 길 시내는 대낮 같이 환하고, 시내버스도 웬만하면 자정 너머까지 운행된다.


이 시간까지 공부하자면 아이들에게 밤참은 필수다. 아침은 걸러도 밤참은 꼬박 챙겨 먹는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요즘 아이들은 하루에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밤참, 이렇게 네 끼를 먹는 셈이다. 한밤중 배를 든든하게 채운 후 학원과 독서실로 향하는데, 고등학생이라면 새벽 1~2시는 되어야 귀가한다. 하루 일과가 이때쯤 비로소 끝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음 날 일과 시작 시간은 늦어도 6시다.

학원과 독서실에 가지 않는 아이들의 밤 시간은 과연 여유로울까.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하교 후 다음 날 일과가 걱정돼 바로 잠을 잔다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대개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게임을 하거나 TV로 재방송하는 스포츠 경기와 교육방송 강의를 시청한다고 답했다. 밤참을 먹는 것도,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학원과 독서실 다니는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라진 지 이미 오래라고 여겼던 '4당 5락(네 시간 자고 공부하면 합격하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속설)'이라는 말이 요즘 아이들의 평범한 일과 속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누구는 평생 네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지만, 성장기 아이들에게 하루 4~5시간 잠으로 하루 종일 견뎌내라는 건 누가 봐도 무리다.

이른바 '좋은' 대학 가기 위해 잠자는 시간을 아껴서라도 공부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된 풍경일 테지만, 어느덧 공부에 별 뜻이 없는 아이들조차 똑같이 '4당 5락'의 일과를 보내게 된 것이다. 학원과 독서실 대신, 게임과 TV 시청을 하는 게 그 차이라면 차이다. 낮보다 밤에 눈이 더 초롱초롱해지는 아이들이 시나브로 늘어나고 있다.

사찰 체험에 간 아이들, 제일 힘든 게 뭔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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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고등학교 교실 풍경 '여관이 돼버린' 학교가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 서부원


이태 전 방학을 이용해 학급 아이들과 함께 인근 사찰에서 1박 2일간 사찰 체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예불도 참여하고, 다도도 익히고, 묵언 수행도 따라 하면서 뜻 깊은 이틀의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에게 이틀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게 무엇인지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예상하기는, 온통 나물인 사찰 음식 때문에 공양 시간이 힘들었다거나, 아침 예불에 참여하기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게 고통스러웠다고 이구동성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십여 명의 아이들 중 그렇게 말한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일찍 자야 하는 게 가장 힘이 들었다'고 했다. 아이들 중 잠들지 못해 밤을 꼬박 새운 경우도 더러 있었다.

스님들은 대개 밤 9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고 사찰 주위는 그즈음 적막에 빠져들지만,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단 한 번도 그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이른 시간이다. 울타리 넘는 양 수백 마리를 세어도 보고, 몰래 가방에 숨겨온 MP3로 잔잔한 음악을 들어도 봤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모두 무사히 사찰 체험을 마쳤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스님들의 일상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초저녁부터 잠이라니, 스님들이 마치 다른 나라,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공부를 곧잘 했던 한 아이는 스님들처럼 생활하기에는 밤 시간이 너무 아깝다며 되레 안타까워했다.

'어두운 낮'을 노리는 산업이 활개... 밤엔 좀 자자!

요즘 아이들에게 밤이란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적어도 자정까지는 밤이 아니라,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하는 '어두운 낮'일 뿐이다. 그러한 가운데 아이들의 밤을 노리는 산업이 덩달아 활개치고 있다.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과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 PC방, 만화방 등이 이미 학교를 포위한 채 성업 중이다.

8일부터 한국방송(KBS)이 24시간 종일 방송을 시작한다고 한다. 방송통신위원회가 하루 19시간으로 제한된 지상파 방송 허용 시간을 해제하기로 결정한 이후 내린 조치다. 주로 스포츠 프로그램과 시청률 높은 다큐멘터리를 재방송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문화방송(MBC)도, 서울방송(SBS)도 덩달아 방송시간을 늘리겠다고 하니, 머지않아 TV에서 애국가를 들을 수 없게 될 것 같다.

'잠들지 않는' 방송의 수요자가 적지 않다는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일 테고, 이미 24시간 운영되고 있는 케이블 방송 채널이 한두 개가 아닌 현실에서 뭐 그리 대순가 싶지만, 정부와 방송사가 나서서 밤과 낮의 구분을 없애려는 듯해 썩 달갑지 않다. 교사로서, 이로 인해 수업시간 잠자는 아이들이 더욱 늘지 않을는지 솔직히 걱정스럽다.

'밤을 잊은' 아이들에게 하루 7~8시간 푹 자고 멀쩡한 정신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또, 가족과 함께 아침 든든히 챙겨 먹고 등교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정녕 배려해줄 수는 없을까. 그런 뒤라야 학력신장도 있고, 생활교육도 있는 법이다. 환한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캄캄한 밤에는 푹 쉬어야 하는 건, 아이고 어른이고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부디 아이들 밤엔 잠 좀 자게 하자.
#학생부장 일기 #KBS 24시간 종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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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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