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은 영혼이 없는 동물과 같다?

[역사와 함께 하는 쿠바 자전거 기행 4] 식민지배에서 쿠바혁명 전까지의 간략한 쿠바역사

등록 2012.10.15 08:58수정 2012.10.1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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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자유평등, 이타주의 그리고 독립된 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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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자유평등, 이타주의 그리고 독립된 주권을 상징하는 쿠바 국기 ⓒ 이규봉


쿠바는 멕시코 만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플로리다 해협과 남쪽으로는 카리브 해, 그리고 동쪽으로는 대서양으로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악어 모습을 한 섬나라이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180km 그리고 멕시코의 칸쿤(Cancun)에서 210km 떨어져 있다. 면적은 약 11만 평방킬로미터로 남한보다는 좀 크고 북한보다는 좀 작다. 길이는 동서로 약 1250km이며 남북은 40km에서 200km 정도이다. 서부에는 과니과니코(Guaniguanico) 산맥이 있고 중부는 대부분 구릉과 초원이며 동부에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 산맥이 있다.

연 평균 기온은 25도로 여름엔 평균 기온이 27도, 겨울엔 23도 정도이다. 여행하기 좋은 계절은 12월에서 4월 사이로 이 시기를 벗어나면 고온다습하고 덥거나 태풍을 맞을 수 있다. 나라의 새는 토코로로(Tocororo)로 그 울음소리에서 이름을 땄다고 하며 빨간색과 흰색 그리고 파란색 깃털 국기의 색깔과 같다. 이 색들은 각각 혁명, 자유평등 그리고 이타주의를 상징한다. 국기의 하얀 별은 독립된 주권을 의미한다.

쿠바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스페인이 침략하면서 원정군들은 대부분 독신으로 들어왔기에 원주민 부녀자들을 강제로 정복했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인종이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s)이다. 가혹한 식민 정책으로 원주민이 몰살당하자 노동력이 필요한 백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노예로 수입하였다. 이들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 인종이 뮬라토(Mulatos)이다.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1140만 정도이다. 그중 37%가 스페인의 후예로 식민지에서 태어난 크리오요(Criollos)이고 메스티조와 뮬라토가 51%을 차지하며, 11%는 흑인의 후예 그리고 1% 정도는 중국인이다. 스페인 사람임에도 식민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크리오요는 정치적으로 철저히 배제되어 스페인 출신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다. 종교는 스페인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이 85%를 차지한다.

쿠바는 1961년 5월 1일 사회주의 국가임을 선포했다. 공식 국가 명칭은 쿠바공화국(República de Cuba)이나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1당 체재이다. 14개 행정구역이 있고 수도는 아바나이다. 가장 큰 섬인 후벤투드 섬(Isla de la Juventud)은 특별행정구역으로 옛 지명은 피노스 섬이었다. 이곳에 스페인은 호세 마르티와 피델 카스트로 같은 정치범을 가두었다. 쿠바혁명이 성공한 후 '젊음의 섬'이란 뜻의 후벤투드로 이름을 바꿨다.

1991년 말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어 소련이 해체된 후 쿠바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쿠바는 수정 헌법을 발표하여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의 반제국주의 정신과 반미주의를 내세우며 사회주의로 나아갔다. 그러나 경제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1993년 경제개혁을 단행하여 개방정책을 실시하였다. 미국의 계속된 쿠바의 경제봉쇄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관광산업에 주력하여 2010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5520달러로 세계 94위이다. 이는 같은 공산권 국가인 중국이나 베트남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문맹률은 3% 이내이며 평균 수명은 남자가 76세 그리고 여자가 78세이다.

친절했기에 멸종된 원주민

카스티야의 공주 이사벨 1세(Isabel I de Castilla)는 1469년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와 정략적으로 결혼했다. 1472년 왕위를 상속받으면서 그녀는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인 에스파냐 왕국의 여왕이 되었다. 이사벨 여왕은 1492년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남아있던 이슬람 국가 그라나다 왕국을 점령하여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라비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스페인 제국 시대를 열었다. 이사벨 여왕은 당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 1451~ 1506)가 제안한 새로운 항로의 개척을 지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콜럼부스는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아 1492년 8월 2일 스페인 범선 산타마리아, 니냐, 핀타 3척을 이끌고 스페인 팔로스(Palos) 항을 떠났다.

콜럼부스는 1492년 10월 12일 현재의 바하마 군도에 도착했다. 처음 도착한 이 섬을 그는 구세주란 의미로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 이름 지었다. 그는 이곳을 동방으로 착각하여 지나온 암초와 열도 지역을 서인도제도 그리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콜럼부스가 도착할 무렵 쿠바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다수를 차지한 타이노 족(Tainos)은 이미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콜럼부스 일행은 쿠바 북부에 상륙하였다, 1492년 12월 산타마리아 호가 쿠바 동남쪽 에스파뇰라 섬 북부 해안에서 좌초되었을 때 타이노 족이 콜럼부스 일행을 진심으로 도왔던 까닭에 콜럼버스는 살아서 건강하게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콜럼부스는 1493년 함대 16척과 군사 1만2000명을 이끌고 다시 2차 탐험에 나섰고, 황금을 찾으러 쿠바 내륙 원주민 부락까지 들어갔다. 쿠바 원주민 중 호전적이며 식인의 습관이 있는 카리브 족은 스페인 정복자들과 끝까지 맞서 처참한 운명을 맞이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카리브 족의 이름을 따 자신들이 지나온 드넓은 바다를 카리브 해라 불렀다. 카리브 해는 남아메리카와 스페인을 연결하는 교통과 운송의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하였다. 쿠바는 지리적으로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게 되어 신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곳이 되었다.

신대륙이 알려지면서 유럽의 수많은 탐험가가 이 지역으로 건너왔다. 콜럼부스가 사망한 1506년 이탈리아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는 이 지역이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신대륙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신대륙은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America)로 불리게 되었다.

1510년 스페인 정복자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가 관타나모를 통해 섬에 들어가면서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쿠바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유 없이 원주민들을 살육했다. '인디언은 영혼이 없는 동물과 같다'고 생각한 그들은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정복자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힘들게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도 풍요롭게 살았던 타이노 족을 포함한 원주민들은 체구가 작고 허약하여 폭정을 견디지 못했다. 많은 수가 자살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조차 스페인 사람이 옮긴 전염병으로 거의 전멸하였다. 쿠바 원주민의 문명은 완전히 사라졌고 지금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그들의 유물로 그들이 존재하였음을 알 뿐이다. 

쿠바 정복에 참여한 젊은 성직자인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Las Casas) 신부는 잔인한 실상을 알리고 원주민들을 보호하는 인디언 보호법을 스페인 왕실에 청하여 제정했으나 이 법은 유명무실해지고 원주민에 대한 가혹한 노동력 착취는 그치지 않았다.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 쿠바에 살고 있던 11만 명의 원주민이 1550년에는 3000명으로 급감하고 1560년에는 거의 전멸했다.

그러자 정복자들은 식민지를 개척할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수입하고 계약노동자로 중국인들을 데리고 왔다. 스페인 왕실이 유럽에서 끊임없는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금을 채취하자 쿠바의 금은 바닥을 드러냈다. 쿠바 열풍은 사라지고 쿠바는 명목상의 식민지 영토로 남게 되었다. 식민지 개척의 중심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갔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원조

1588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가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해군에 패하면서 스페인 제국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카리브 해는 해적들과 제국주의 지방귀족들의 낙원이 되었다. 아바나는 아메리카에서 채취한 황금을 실은 스페인 상선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간 기착점이 되었다. 그러자 해적이 들끓기 시작하고 스페인 상선은 아바나 항에 모였다가 1년에 두 번 군함의 보호를 받으며 본국으로 돌아갔다. 해적과 유럽 열강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스페인 정복자들은 아바나 해안에 성벽을 축조했다.

1762년 영국이 쿠바 서부지역을 점령하고 영국의 간섭으로 쿠바의 사탕수수 산업이 자유무역 체제에 편입되었고 동시에 노예 저항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1763년 스페인과 영국은 파리조약을 체결하여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영국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쿠바를 되찾았다. 1824년 페루 아야쿠초 전투에서 스페인이 패하면서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던 대륙의 나라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경제와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한 쿠바는 몰락하는 스페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므로 쿠바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300여 년간 아메리카 대륙의 관문으로서 스페인 제국에 침탈당한 쿠바는 1898년 미국으로 넘어갔고 또 다시 쿠바는 미국에 의해 수탈당했다.

기독교를 신봉한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제국과 미국이 식민지 지배를 하면서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못했을까? 이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이른바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다.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더 많이 개발해야 하는 데 식민지 원주민은 그럴 수 있는 문명 단계에 도달해 있지 못하므로 할 수 없이 유럽인이 가서 그들을 계몽하고 자원도 대신 개발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다. 일본의 조선 지배를 타당하게 보는 세칭 뉴 라이트라고 하는 단체가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꼭 닮았다. 유럽을 일본으로 원주민을 조선인으로 바꾸면 말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존 로크(John Locke)에 의해 최초로 아메리카 식민지 침탈을 정당화 시키는 논리로 체계화됐다. 존 로크는 원주민은 원시적 인간으로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정말 웃기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왜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경제적 이익은 고루 나누어 갖지 않았나?

노예제도와 중국인 쿨리

스페인 정복자의 무자비한 폭정과 그들이 옮긴 전염병으로 원주민이 거의 전멸하자 식민지 정복자들은 식민지를 개척할 노동력을 충당할 필요를 느꼈다. 스페인 왕실은 1513년 세비야 항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은 스페인의 흑인 노예를 쿠바로 수출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로써 쿠바의 노동이 원주민에서 아프리카 노예로 바뀐다. 흑인 노예는 짐승처럼 다루어졌다. 흑인 노예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마스크나 수갑, 족쇄 등을 채웠다.

유럽 열강들의 경쟁적인 노예무역은 오늘날 쿠바에 복잡한 흑인사회 구조를 탄생시켰고 다양한 흑인문화를 이루게 했다. 쿠바에 도착한 노예들은 가혹한 환경에 평균 7년 밖에 살지 못했다. 주인들은 노예들에게 가톨릭 교리를 듣게 하고 세례를 받게 하는 것 외에 어떠한 교육도 시키지 않았다.

1804년 아이티가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장군의 지도 아래 독립하여 최초로 흑인 민주국가를 세웠다. 그 이후 열강들은 차례로 노예제를 폐지했고 이는 미국 남북전쟁의 불씨가 됐다. 1865년 미국이 노예제를 폐지하고 이어서 1870년 스페인은 푸에르토리코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노예제가 지속되었다. 왜냐하면 스페인 정부가 농업의 기계화를 방해하여 농업은 전통적인 노예 노동력에 의존해야 했고, 복잡한 흑인사회 구조로 노예들은 단합하기 어려웠고 또한 지주들이 노예반란을 철저히 진압했기 때문이다.

1844년 쿠바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저항운동이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이후 일어난 10년 전쟁은 다양한 인종을 하나로 뭉치게 해 주었다. 노예제도는 초기에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으나 이후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그래서 각 나라가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고, 스페인 정부는 1868년에 노예제 폐지를 선언했다.

노예해방은 노예들의 불쌍한 처지를 생각해 인본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자본주의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다. 영국은 자국 농산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쿠바의 노예해방운동에 적극 개입하게 된다. 그러자 쿠바의 대지주와 노예상인들은 영국의 노예해방주의 영향으로 스페인 정부가 노예제를 폐지할 것을 염려하여 미국이 쿠바를 합병하는 것까지도 지지했다. 물론 이는 실패했지만.

중국인의 경우는 흑인 노예와는 달리 강제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해서 왔다. 그래서 이들을 쿨리(Los Cuiles)라 부른다. 계약 노동자란 뜻이다. 스페인은 대체 노동력으로 중국인이 필요하자 1847년 스페인의 이사벨 2세가 중국인 쿨리 수입을 허가했다. 스페인은 1864년 중국과 톈진 조약을 맺고 쿠바로 수출할 중국인 노동자를 모집하였다. 중국의 연안지역의 인구는 늘어나고 있으나 흉년이 들어 중국인들은 먹고 살기가 매우 힘들었다.

이러한 때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문호를 개방해야 했고 이에 맞추어 노예상인들도 들어왔다. 많은 중국인들은 노예상인들에게 속아서 끌려왔다. 그러나 노동 환경이 매우 열악하여 계약기간 내에 중국인 쿨리의 사망률은 75%에 달하였으며 평균 노동수명은 5년에 불과하였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1880년 새로운 협약을 맺어 중국 쿨리들은 인권과 자유를 얻고 노예 노동계약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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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수학의 창을 통해 보다>,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현 배재대 교수이며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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