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스님, 나무그늘 아래 놓인 바위

[서평] 불필스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등록 2012.10.18 14:40수정 2012.10.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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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외사 마당에 조성되어 있는 대형 단주 사이로 보이는 성철스님 동상 ⓒ 임윤수


인간 못된 게 중(僧) 되고, 중 못된 게 나중에 큰스님 된다고 하잖아.
서 말 벼룩은 끌고 다닐 수 있어도, 중 세 명을 한꺼번에 끌고 다니기는 힘들어.
왜냐고?
한 번 생각해봐.
어미아비 말도 안 듣고 집을 뛰쳐나와 되는 게 중인데 그런 중들이 누구 말을 고분고분 듣겠어.
다들 한 성깔하고 고집 센 것들이 중이거든.
하기야 그 정도 성깔은 있고 고집이 있어야 지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 득도(得道)도 할 수 있을 겨.

2003년 11월, 경북 상주에 있는 북장사엘 들렀다 만나 뵌 스님께서 '요즘 젊은 스님들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걸' 푸념이라도 하듯이 하며 들려주셨던 이야기 중 한 토막입니다.


언뜻 듣기엔 스님들을 비하하는 듯 들리지만 곰곰이 곱씹어 새기면 스님들이 출가하는 과정에서 격을 수 있는 갈등, 출가한 구도자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결기이자 수행생활의 단면을 짙게 그려야 하는 담묵화를 그리듯 담아내고 있는 설명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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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서 영원으로> 표지 ⓒ 김영사

성철스님, 대한민국 현대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일획을 그은 성철스님의 일대기야말로 바로 이런 경우, 어미아비 말도 듣지 않고 집을 뛰쳐나온 못된 인간, 한 성깔로 고집을 세운 못된 중, 그 성깔과 고집으로 득도 해 시대적 불교를 평정한 선지식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김영사에서 펴낸 <영원에서 영원으로>의 저자인 불필스님은 성철스님이 출가하기 전에 낳은 두 딸 중 둘째입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는 불필스님이 구도자로 살아가는 출가 수행이력이자 일대기, 불필스님의 가족사입니다.

불필스님은 '잘 사는 집' 둘째 손녀

1937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출생한 불필스님의 속명은 이씨 성에 수경(壽卿)입니다. 할아버지께서 '명을 받아 오래 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불필스님은 당신 스스로의 어린 시절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공주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필스님이 보낸 유아기와 학창시절에서 느껴지는 건 '잘사는 집 손녀'라는 느낌입니다. 엄청나게 이름난 부잣집,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권세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유학자의 기풍쯤은 꼿꼿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재력과 위세쯤은 지닌 가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버지가 출가를 하고, 언니 도경이 마저 불필스님이 9살 때 세상을 뜨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입장에서야 남다른 손녀였기에 공주처럼 대접6하며 키웠겠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란 '티'가 곳곳에서 드러나는 게 불필스님이 지나온 유아기, 학창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성철스님의 피를 이어받은 유전적 성정 때문일 수도 있고, 공주처럼 대접을 받으며 자란 성장배경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외숙모가 단감을 가져와 반쪽씩을 나누어 주었을 때 하루 종일 울었던 6살 때의 고집이랄까 괴팍함이랄까 아니면 되바라짐이라고 해야 할지가 망설여지는 성정(性情)은 출가 후까지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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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외사에 전시되어 있는 성철스님 생전 모습 ⓒ 임윤수


<영원에서 영원으로>에서 느껴지는 불필스님의 성장 배경과 성정은 지나간 세대 한때, 부르주아(bour·geois)로 지탄 받던 지주의 딸로 연상될 수도 있는 모습입니다. 시집올 때 소 몇 마리와 노비까지 데리고 온 어머니의 결혼, 어렸을 때부터 비단옷을 해 입히고, 속옷까지 빨아 대령했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려지는 불필스님의 성장 배경입니다.         

아버지 성철스님은 불필스님의 사표이자 닮아가고 있는 큰바위 얼굴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한 불필스님의 수행생활은 처절하리 만큼 절실하고 가혹하리 만큼 철저합니다. 때로는 얼음보다 차가운 수행, 때로는 쇳물보다도 뜨거운 용맹정진으로 스스로의 구도를 탁마해 나가고 있으니 바위보다도 굳건한 구도자의 모습입니다. 

이따금 불필스님이 찾아뵙는 아버지, 성철스님은 불필스님의 수행이력과 일대기에서 냉혹하리 만큼 차갑고 호랑이보다도 무서운 선지식, 혹독하리 만큼 공부를 강조하는 선지자이지만 닮아가고 싶은 사표이자 닮아가고 있는 큰바위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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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외사에 볼 수 있던 성철스님 조각상 ⓒ 임윤수


출가해서 두 해가 지난 여름이었다. 또 큰스님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자 "나가라!" 하시곤 애꿎은 시자들을 향해 소리치셨다. "저 가시나들 속가로 보내라. 절로 가시 가면 내 그 절을 불사를 거야." - <영원에서 영원으로> 164쪽

수십여 년을 뵙는 동안, 큰스님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출가할 때 다 버리고 간 분인데 무슨 사심이 있겠는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 홀로 만고 진리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장부의 기상이 펄펄 살아 있는 출가시(출가시)를 보면 원망하고 말고 할 것이 조금도 없다. 그분이 나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라는 생각, 전생과 후생, 이런 것들이 붙을래야 붙을 수 없다. - <영원에서 영원으로> 169쪽

불필스님의 법명 '불필'은 아버지 성철스님이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법명, '불필'에 대해 불필스님은 <영원에서 영원으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당신의 회고록 제목이 된 '영원에서 영원으로' 역시 큰스님의 20대 시절 노트에 쓰여 있는 글귀 '영원에서 영원으로'에서 인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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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외사 마당 ⓒ 임윤수


나는 불필이라는 이름을 받고 "하필 왜 불필입니까?"하고 여쭈니, 큰스님께서는 "하필(何必)을 알면 불필(不必)의 뜻을 안다"고 하셨다. 세간에서는 불필이라는 나의 이름을 두고 흔히 '필요 없다'는 뜻으로 나름대로 해석해, 부처님의 아드님이신 라훌라(장애)에 비견하곤 한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하기 전 아드님이 태어나자 출가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을 지으셨다고 들었다.

그것도 막겠다 싶어서 토를 달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불필이라는 이름을 내리신 큰스님의 뜻은, 세상에서 아주 쓸모없는(不必)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도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신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름에 포함되어 있는 더 깊은 선지(禪旨)는 내가 공부를 다해 마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 <영원에서 영원으로>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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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외사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성철스님 일대기 중 법문을 하고 있는 장면 ⓒ 임윤수


'불필'이라는 법명으로 50여년을 참구하며 살아온 스님이지만 정작 불필에 포함되어 있는 더 깊은 선지(禪旨)는 앞으로도 공부를 더해야만 알 수 있을 화두의 하나로 미뤄 놓고 있습니다.

불필스님의 존재는 나무그늘 아래 놓인 바위

항상 같은 정도로 차가움을 유지하고 있는 바위가 있다고 했을 때, 바위가 햇살아래 놓여 있는 상태에서 앉아 본 사람들은 그 바위가 시원한 바위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바위가 커다란 나무그늘 아래 놓여있는 상태에서 앉아 본 사람들은 바위 때문에 시원하다기 보다는 나무그늘이라서 시원하다고 할 것입니다.

불필스님의 경우가 바로 이 바위와 같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멍을 들이며 출가를 결행할 만큼 절실하고, 은사스님의 명에 만년필을 던져버리며 일어서고, 은사스님의 경책에 '주지실 책상 위에 있던 잉크병을 벽에 던져버릴' 정도로 중심이 꼿꼿할 수행생활 일지라도 그 모든 것이 성철큰스님이라는 배경이었기에 가능한 오만함으로 인식될 수도 있으니 불필스님의 존재는 나무그늘 아래 놓인 바위와 같은 명성을 벗어나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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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외사에 설립된 성철스님 동상 ⓒ 임윤수


한국 현대불교사에 일획을 그은 성철스님의 딸로 태어나, 출가 수행자가 되어 50여년을 구도자의 삶을 살고 있는 불필스님이 회고한 <영원에서 영원으로>에는 일제 강점기와 유교적 삶을 살아야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 세대에서부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출가 수행자가 걸어야 하는 가시밭길 같은 고행, 출가를 경행하는 데 따르는 갈등, 한 쪽 눈을 잃을 만큼 불거지는 가족간의 갈등과 천륜의 그늘로 존재하는 혈연과 우정까지를 반추해 볼 수 있는 회상의 연못을 발견하게 되리라 기대됩니다.

불필스님이 불필에 포함되어 있는 더 깊은 선지(禪旨)를 깨닫고 한 소식을 더했다는 환희에 두둥실 어깨춤이라도 추었다는 소식이 들려와 필자 역시 덩달아 어깨춤 한 번 추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학수고대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영원에서 영원으로>┃지은이 불필스님┃ 펴낸곳 김영사┃2012.09.21┃값 14,000원

영원에서 영원으로 - 불필스님 회고록

불필 지음,
김영사, 2012


#영원에서 영원으로 #불필스님 #김영사 #성철스님 #석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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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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