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밥 투표'를 아십니까? 저도 당했습니다

[나의 투표권 수난기] 군대에서 맞은 첫투표... 사실상 '공개투표'였다

등록 2012.10.28 16:39수정 2012.10.3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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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민주노총은 '나의 투표권 수난기' 기획을 진행합니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는 투표날에도 특근해 일을 합니다. 유통업·건설현장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식당 아주머니·아르바이트 학생들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일단 투표 마감을 현행 오후 6시에서 9시로 세 시간 연장하면 어떨까요? 여러 시민의 투표권 수난기가 한국 사회의 참정권 문제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말]
1978년 논산 훈련소 대공초소 경비소대에 파견 근무를 할 무렵이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부식차량은 닦다만 군용도로 대신 늘 가파른 비탈을 내려가야 하는 옆구리 등성이에 부식을 내려놓고 가곤 했다.

맨 밑바닥 쫄병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그나마 3명의 경비대 전입동기가 같이 포대로 가는 바람에 서로 위안이 되었다. 동기 중 하나가 소대 주방장 보조를 맡아서 부식이 오는 날이면 늘 같이 내려갔다.

우리에게 잘 맞는 맞춤형 민주주의, 유신?

12월의 어느 날로 기억된다. 추웠다가 풀린 날씨 탓인지 질척질척한 산등성이에서 미끄러졌던 기억, 그리고 우리를 인솔해 부식 수령을 나갔던 고참의 말이 기억난다. 쌓여있는 부식더미를 이리저리 들추어보던 고참이 빙긋이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야! 부식이 화려한 걸 보니 또 선거 때가 되긴 된 모양이네. 소고기에 양고기에…. 야 한덩어리 떼어놔라. 나중에 구워먹게."

전역을 채 한 달도 남겨 놓지 않은 고참은 거의 군복을 제대로 입지 않고 지냈다. 야전점퍼만 걸칠 뿐, 내의도 스웨터도 사제였고 그나마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았다. 지게에 부식을 지고 올라가며 고참이 이야기한, '선거'와 '고기'가 무슨 관계가 있나 궁금해졌다.

초소 주방에 부식을 내려 놓으며, 동기가 썰고 있는 고기 덩어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고참 눈치를 보며 간신히 물었다. 그런 호기심 때문에 매를 벌기도 했지만 도무지 궁금한 게 있으면 머리 속이 간지러워 참지를 못했다.


"야 이놈아, 박정희 각하께서 하사하신 이 고기 잘 쳐먹고 낼 모레 투표 잘 하면 돼."

내무반에 TV도 신문도 없던 시절에 세상 돌아가는 정보는 최소한 상병은 달아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낼 모레 무슨 선거가 있고, 또 고기 잘 먹고 뭘 어디에 찍는다는 거야. 투표 한 번도 해보지 않고 오로지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만 귀가 따갑도록 세뇌당한 고졸 출신 군인의 사회인식 능력은 거기까지 였다. 그저 투표는 시민의 권리이고 비밀투표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깨인' 시민이던 시절이었다.

며칠 후 대대본부에서 교육 참가 명령이 떨어졌고 소대는 둘로 나뉘어 교대로 교육에 참가했다. 교육내용은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서양의 민주주의는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과 같으며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맞는 민주주의가 따로 있어 그것을 잘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유신이며 유신이야말로 우리에게 잘 맞는 맞춤형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늘 듣던 이야기 였다. 정신교육이 끝날 무렵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이승복 이야기와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있는 간첩세력들이 국회에 들어가 있으며 이번 선거에서 꼭 그 빨갱이들을 골라내야 한다는 연설이 있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교육이 끝나고 모두에게 별사탕 건빵이 두 봉지 씩이나 배급되었다. 누가 옆에서 '야 선거 매일 해라' 하며 좋아했던 기억이 새롭다.

"비밀투표 좋아하네, 짬밥 투표는 따로 있는 거야 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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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난 2007년 만리포 해수욕장 홍대 만리포 해양연구원에서 금일 오전 10시부터 제17 대통령선거 부재자 투표가 실시, 헌병이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는 모습 ⓒ 정대희


저녁 점호 때 소대장의 일장 훈시가 있었는데 훈련소장 별 떨어지게 하고 싶지 않으면 실수하지 말고 제대로 투표하라는 것이었다. 골수 공화당원이자 집에 박정희 사진까지 걸어놓고 있던 아버지 덕에 훌륭한 각하로 알고 있던 박정희에 대해 조금씩 의문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그저 거기까지였다. 박정희에 대해서 다르게 이야기 해 준 사람은 우리 집에 잠깐 하숙을 했던 대학생 형이 유일했다. 

그 형은 박정희가 독립군을 잡아죽인 일본군 장교 출신이요 반란을 일으켜 대통령이 된 독재자라고 했으나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나쁜 사람을 국민들이 투표로 뽑아줄 리가 없으니 아마도 그 형이야말로 선생님이 이야기하던 빨갱이가 분명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지 소대장은 이번에 들어온 3명의 쫄병들을 일으켜 세우고는 크게 만든 모형 투표용지까지 보여주며 어떻게 어디에 찍어야 하는지 투표법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찍은 부분이 접히면 다른 곳에 묻어 식별이 안 되니 기표 후에 접지 말고 편 채로 앞에 들고 나오고, 투표함에 넣을 때도 접히지 않게 똑바로 펴서 넣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투표는 국민의 의무이니 기권은 없다라는 말로 훈시를 끝냈다. "그럼 다 보이지 않나?" 옆에 비스듬히 기대 앉은, 소대에서 유일하게 소대장조차 껄끄러워 하는, 고참에게 물었다.

"비밀투표 좋아하네. 야 이 00야 여기가 사제냐? 짬밥(잔반) 투표는 따로 있는 거야 인마."

투표 날이 되었다. 군인도 투표를 하는지 처음 알았거니와 투표도 질서정연하게 마치 열병을 하듯 하고 있었다. 입구에도 기표소에도 투표함에도 장교들이 총 출동하여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마치 빨갱이 놈이 한 놈이라도 있으면 당장 요절을 내고야 말겠다는, 이글거리는 눈빛들이었다. 칸막이도 없는 기표소와 접지도 못하는 투표용지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투표함에 앉아서 잘못되지 않았나 확인하고 있는 싸개들 앞에서 위대하신 각하의 공화당을 찍지 않을 재주가, 아니 용기가 없었다. 아직도 마치 전투의 한 장면 같던 투표의 기억이 남아있다.

다시 '한국적 민주주의'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내 생애 첫 번째 투표권은 비밀이 아닌 협박투표로 강탈되었다. 그리고 계속 들어오는 강제징집 훈련병들에게서 귀동냥 해 들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실체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될 즈음,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은 '유고 소식'을 새벽근무를 서다  초소에서 들었다.

그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고, 군복무 중인 아들이 요즘 부쩍 늘어난 정신교육의 스트레스를 참기 힘들다고 하소연 하는 것을 들으며 참으로 잔인한 역사라고 느껴진다. 예전과 달라서 대부분의 군인이 대학 재학 중에 입대를 하고 그들의 역사인식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군 장교보다 우위에 있을 텐데 종북이니 민주주의에 대해 누가 누구를 교육한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사학과 재학 중 입대한 아들은 투덜댔다.

나는 아들에게 나의 투표권 박탈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래도 너는 비밀투표라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을 위로랍시고 했다. 하고 나니 아버지로서 내 자신이 너무 미안하고 초라했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했을까.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한국적 민주주의'로 재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본다.
덧붙이는 글 <나의 투표권 수난기> 응모기사입니다.
#투표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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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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