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 떨리는' 고생해 봤어?

마취없이 이 뽑기... 일생 '트라우마'로 남는다

등록 2012.11.09 11:53수정 2012.11.0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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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한 달동안 연달아 세 번 치과에 갔습니다. 치료 받는 데 많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자초한 아픔'은 제게 성숙을 가져왔습니다.


"마취를 하고 할까요? 그냥 할까요? "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사랑니 뺄 때, 스케일링할 때 말고는 치료로는 처음 찾은 치과인데 얼마나 아플지, 견딜만할 지의 판단을 제게 맡기다니요. 하지만 '범생 기질'은 이럴 때도 작동하나 봅니다. 어른이 물으면 얼른 대답해야 하니까요.

"그냥 할게요."

의사는 의외라는 듯, 그냥 물어 본 건데, 괜히 물었다는 듯 약간 망설이더니 " 정말 괜찮겠어요? 그럼 그럴까요?" 했습니다.


'뭘 알아서? 마취하겠다고 할 걸. 난 이제 죽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이렇게 해서 저는 발치할 건 아니었지만, 유태인 고문 전력을 가진 괴한으로부터 마취없이 (고문이니까) 생니를 뽑히는 영화 <마라톤 맨>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것 뿐 실은 견딜만 하니까 의사도 마취를 할 건지 말 건지 타진했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꼭 의례적인 물음이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취를 선택할 거라는 일련의 생각이 불안과 함께 빠르게 스쳐갔습니다.

이가 뽑히는 '마라톤 녀'가 될 것도 아닐 바에야 반쯤은 결기로, 나머지 반은 얼결에 시작된 마취없는 치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셋째 날 절반의 치료는 결국 마취제에 의지했으나 그간의 고통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술하지 않겠습니다.

흔한 말로 그 고통이 일생 '트라우마'로 남는다 할 지라도 삶의 요긴한 에너지로 두기에 이보다 더 선연하고 샤프한 경험은 없을 테니까요.

배를 곯아 보지 않았고, 무수리처럼 건강했으며 기억에 남을 사고를 당한 적도 없었으니 몸이 고생하고 감내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지혜나 겸손, 미덕을 쌓을 기회가 없었던 저로서는 주로 편식을 하고 있었다고 할까요?

비록 내 잘못, 내 실수로 초래했을 망정 마음고생은 그럭저럭 해 본 터수라 깨어짐, 죄의식, 자존심 상하는 따위의, 정신적 고통을 통한 성장은 어느 정도 맛보았던 것에 비한다면 말입니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는 그것이 아픔을 동반하느냐 안 하느냐에 있다고 한다면 제 아픔의 연유는 대부분 정신적 고통이었으니 음식으로 치면 편식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사실 육체적 고통이 갖는 집중성, 직접성, 구체성, 선명성은 대부분의 정신 고통을 능가합니다.

군대를 갔다 온 남자와 안 간 남자, 갔다 와도 방위였던 남자, 애를 낳아본 여자와 안 낳아본 여자, 낳아도 자연분만한 여자와 제왕절개한 여자의 차이는 우스갯 소리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몸이 기억하는 시련만큼, 육체적 고통의 정점만큼 '사람을 만드는' 확실한 것이 없기에 아이들에게도 말로 하다 안 될땐 매를 들게 되는 게 아닐까요.

'마취없는 치과'를 다녀온 후 치아관리에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마다 아팠던 치료 기억이 떠오르며 정신이 바싹 드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말그대로 '치떨리는' 고생을 해 봤기 때문에 '마취 주사 한 대면 둔탁하고 불편한 느낌 정도에 얼마든지 치료받을 수 있으니까 까짓 거 망가지면 또 가면 되지'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시기심이나 인색한 마음이 들때, 공연한 욕심이 솟을 때 , 자족보다는 불평불만하게 될 때 몇 달 전에 앓았던 지독한 감기, 한 해 전 혹독했던 이석증을 생각하면 마음이 바로 가라앉습니다. 몸만 나으면 다 감사할 것 같았던, 몸만 안 아프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며 진저리치던 그때 그 순간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는 부처님 말씀은 제 경험상으로도 진리입니다.

허기지다는 것을 느끼기 무섭게 배를 채우고, '덥다, 춥다'는 기껏해야 냉난방 장치 가동을 위한 정보일 뿐, 한 그릇 밥의 절실함, 극한의 더위와 추위를 생명의 위협으로 느껴본 적이 저는 없습니다. 자동차 안의 안온함 속에 있는 한 아무리 느껴보려고 해도 차창 밖의 현실은 비현실일 수밖에 없듯이요. 어쩌면 인류는 육체적 고통의 완화, 그것의 궁극적 제거를 위해 가열찬 노력을 기울이며 물리적 고통이라는 일체의 현실을 비현실화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마취제의 발명은 정말이지 전인류의 육의 구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쯤은 육체적 아픔을 날것으로 겪어볼 일입니다. 일평생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도 감사했던 사도 바울처럼, 아픈 것도 축복이니 진통제 없이 견뎌냈던 두통, 치통, 생리통을 종종 떠올려 볼 일입니다. 생에 대한 오만과 망상을 줄이고 겸손과 한계를 깨닫는 계기를 자주 만들 일입니다. 그러한 경험은 손에 쏙 들어오는 주머니 난로의 매작지근한 온기를 닮은 조촐한 행복감을 선사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자유칼럼그룹www.freecolumn.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치과 #트라우마 #깨달음 #육체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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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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