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라는 새 세계를 알게됐다

등록 2012.11.12 09:53수정 2012.11.1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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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를 시작한 지 꼭 한 달째입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어릴 적에 처음 라켓을 잡아본 후 중고등학교 때 몇 번 집적거리다, 결혼 전후 간간이 탁구장을 찾은 것이 저와 탁구 간의 헤아려 본 인연의 전부입니다.


그러다 최근에 둘의 인연을 바싹 쪼매게 된 것은 나이 50이면 더 늦기 전에 한가지 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변과 스스로의 채근에 더는 견디지 못한 선택의 결과입니다. 혹자는 "호주에 살면서 탁구는 무슨…, 저 푸른 초원에서 골프를 할 일이지"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모로 저는 탁구가 좋습니다.

우선 실내 스포츠라 얼굴 검게 탈 일 없어 좋고, 같은 이유로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시드니엔 눈이 안 오지만) 바람이 불든 날씨에 상관 없어서 좋고, 골프보다 비용 적게 들어 좋고, 준비가 간편해서 좋고, 장비가 무겁지 않아서 좋고, 탁구대 하나 들어갈 정도의 공간만 있으면 아무 데서나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골프에서는 공이 잘 안 맞으면 공연히 남 탓, 주변 탓하고 싶어진다지만 탁구는 상대보다 실력이 뒤져서 실점할 뿐이니 순전히 제 탓만 하면 되는 운동이라는 것도 맘에 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부가 함께 할 경우 탁구대만큼의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너무 붙어있어도, 너무 떨어져도 부부전선에는 이상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속옷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고, 집중하고 열중하며, 동호인들과 유쾌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늦게 배운 도적질'에 요즘 제대로 '필'이 꽂혔습니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는 말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서만 우리는 세계를 인식한다'는 말처럼, 탁구는 제게 새로운 언어 체계, 새로운 인식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어느 분야에나 '무림의 고수'가 있듯이, 지금껏 제게는 닫혀 있던 언어, 인식되지 않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한 '진검대결의 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탁구는 구력이 말해 주는 곳입니다. 그러하기에 60 먹은 여성이 스무살 청년의 환상적 랠리 파트너가 된다거나 나이와 성별, 국적과는 무관한 '탁구 지존'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도 흔한 일입니다.

내가 모르는 또다른 스포츠의 장마다 각각의 언어가 있고 따라서 나름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어찌 스포츠뿐이겠습니까.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 영역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리는 법이니까요. 악기를 배우는 것, 악기도 세분하여 피아노, 기타, 바이올린이 각각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그림, 바둑을 시작하는 등의 모든 행위가 새로운 언어, 새로운 세계로의 입문이라 할 것입니다.

탁구라는 '새 언어, 새 세계'를 알게된 후 삶이 더 풍성해졌습니다. 제 삶의 메뉴 보드가 달라진 것입니다. 일상의 메뉴가 바뀌니 삶의 의미와 가치, 결과물에도 차이가 날 수밖에요.

평균 주 5일, 어떤 때는 일주일 내내 하루 서너 시간을 탁구장에서 보내는 일상은 풍요로워짐과 동시에 단순해졌습니다. 단순함은 풍성함을 거스르는 개념처럼 들리지만 탁구를 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의 우선 순위를 재조정하고, 필요치 않은 일, 덜 중요한 것을 과감히 삭제해 버린 결과 삶의 실속이 깊어지고 온전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지금 막 새로워진 일상이 습관으로 굳어지고 규칙성을 갖게 된다면 수행이나 영적 훈련에서 얻어지는 기쁨 비슷한 것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조차 있습니다.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행위'를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은 나이 들어가는 자신과의 천진한 조우입니다.'감'을 익힌다고 표현하듯이 반복 훈련된 직관과 반사 신경에 의존하여 자기 자신의 미지의 영역을 개발해 나가는 긴장과 흥분은 각별하고 신선합니다.

사람은 어느 나이에나 살아가는 재미가 있다는 말을 요즘 저는 탁구를 통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취미 #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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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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