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마누라한테 이혼당해 온 거 아닙니다"

[귀농에 관한 환상과 진실⑤] 친구의 귀농이 고향에 몰고온 충격

등록 2012.11.24 14:19수정 2012.11.30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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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촌 인구가 매년 최고치를 기록중입니다. 2012년 상반기 귀농귀촌인구는 8706가구 1만7745명에 이릅니다. 이들은 왜 도시를 떠나 시골로 향하는 것일까요? 귀농귀촌인 절반 이상은 4050세대이지만 2030 세대의 귀농귀촌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생태적 삶'을 살고자 귀농을 결심하는 이들도 많지만, 상당수는 자영업에 실패하거나 명퇴를 당했거나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귀농귀촌의 리얼스토리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개인의 선택 차원을 떠나 뚜렷한 사회현상이 되어버린 귀농귀촌에 대한 실질적인 사회적 뒷받침이 이뤄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말]
올 봄에 고향 친구 한명이 귀농을 했다. 의외의 일이었다. '에잇, 시골 가서 농사나 짓던지 해야지 원'하는 푸념들은 많이 들었어도 실제로 다 때려 치고 농사를 짓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한 명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두고 고향 어르신들 사이에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무슨 사연이 있지 않고서야 마흔일곱, '한창 젊은' 나이에 홀연히 단신으로 시골로 내려와 농사나 짓겠다고 덤빌 리가 없다는 것이 마을 어른들의 오랜 경험에 의한 판단이었다.

고향 친구의 귀농..."무슨 사연이 있지 않고서야..."

소문의 대부분은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귀향 행보에는 미심쩍은 요소가 다분했다. 대부분, 말년을 고향에 의탁하는 은퇴형 귀촌자들은 먼저 마을에다 으리으리한 새 집을 지어 존재감을 드러낸 다음에서야 비로소 화려하게 등장하곤 했다. 원주민들의 거처와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신소재 건축 재료로 이국적인 풍모를 뽐내는 집을 짓는 것만으로도 집주인이 도시에서 쌓은 화려한 경력과 여유로운 경제력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친구의 귀향은 금의환향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보였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는 당장 몸을 의탁할 집 한 칸도 마련해 놓지 않은 상태로 텐트에 침낭을 멘 남루한 행색으로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근황은 크게 세 가지 가능성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승기 걔가 마누라한테 이혼 당했다더만'  '아니여, 사업이 쫄딱 망했다더랑께"  "큰 병이 들어서 가망이 없다던디'.

'마누라랑 이혼했다'와 '마누라한테 이혼 당했다'의, 능동태와 수동태의 현격한 차이는 불행의 강도를 가늠하는데 있어 중요한 척도가 된다. 친구의 경우 '마누라한테 이혼 당했다' 에 무게가 실려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연민의 감정을 자아냈다. 그의 귀향이 개인사적인 불행에 근거한다는 절대적 이유는 당연히, 부인의 부재였다. 자연스런 귀향이었다면 응당 옆에 있어야 할 부인이 그의 옆에 보이지 않은 탓에 뜬소문은 더욱 신빙성을 더해갔다.


마누라한테 이혼당해 쫓겨났거나 불치병에 걸려 오늘 내일 한다거나 그도 아니면 사업이 망해서 빚더미에 오르지 않고서는 그런 몰골로 고향땅을 밟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나와 동갑인 그의 나이 마흔 일곱은 은퇴자 대열에 들기엔 아직 좀 이른 감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나, 승기다. 나 쌍봉에 와 있어. 어? 뭔 일 있냐고? 아니, 여기서 살려고 내려왔지. 나 참, 정말이라니까 아무 일 없고 우리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라고 왔다니까 그러네, 하하하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마누라한테 쫓겨났거나 죽을병에 걸렸거나 쫄딱 망해서 도망 온 '놈' 치고는 지나치게 밝고 활기에 넘쳤다. 자신을 둘러싼 마을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목소리는 한껏 태연하고 여유로웠다. 마치 엊그제 고향 떠났다 돌아온 사람처럼 편안했다. 한 마을에서 자란 남자 동창이자 가까운 친척이기도 한 그와 실로 몇 십 년 만에 나누는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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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옆 마을에서 어렵게 마련한 빈집. 처음엔 이런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 정미경


잘 나가던 보석세공기술자, 왜 고향으로 돌아왔나 했더니

그는 현재 친척의 빈집을 임시 거처로 삼아서 귀농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부부가 살집과 농사지을 땅을 부지런히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병아리도 사서 기르고 있으니 다음에 촌닭을 먹으러 오라고 미리 다짐을 두었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고민했던 듯 그의 고향에서의 계획들은 알차고 막힘이 없었다. 간단한 전화 통화만으로도 그가 이 귀농을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하고 계획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가정파탄을 겪거나 경제적 궁지에 몰려 고향으로 피신한 불쌍한 놈이 아니었다. 다만 농사를 지으러 고향에 돌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직업은 보석세공기술자였다. 숙련된 세공업자이자 보석상이었던 그는 그쪽 방면으로 나름 성공한 편에 속했다. 아들, 딸이 다 자라서 제 앞가림 할 나이가 되었다고 판단되자 그는 오랜 꿈이었던 귀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고 한다. 혼자 내려와서 거처를 마련하는 대로 부인을 데려오기로 계획이 잡혀있었다. 수도권에 번듯한 집도 있지만 그의 최종 목표는 귀농이었다. 이제 고향이 실거주지가 되고 서울에 있는 집은 가끔 한 번씩 들르는 용도로 사용할 것이었다. 그는 최근까지도 잘나가는 사업가였고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부인은 서울에서, 남편이 불러주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당분간은 큰댁 옛날 집 대충 고쳐서 지내고 있어. 워낙 오래 비워놨던 집이라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네. 어디 마땅한 집 나온 거 없나,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집도 집이지만 농사지을 논밭도 구입하고 그래야 돼.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쁘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들떠 있었다.

지금은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나도 한때는 귀촌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시골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귀촌이었던 까닭이었다. 도시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친구들과 마당에서 잦은 술추렴을 벌여 조용한 시골 마을에 물의를 일으켰는가 하면 새벽마다 나오라는 울력에는 번번이 불참한 탓에 마을 이장님한테 단단히 찍혀 있었다. 급기야 이장님은 말 안 듣는 젊은 것들을 시골 지서에다 간첩이라고 신고하기에 이르렀고, 간첩사건은 일대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당시의 경험에 비춰볼 때 귀촌, 귀농이란 결코 함부로 덤빌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계획들을 차근차근 짚어나가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니 이번 그의 귀농만큼은 성공할 확률이 꽤 높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그는 다름 아닌 고향으로 귀농을 했다.  

"하하하하! 어떡하냐. 내 건강에는 전혀 이상이 없고 우리 마누라랑은 금슬이 너무 너무 좋거든? 흐흐흐. 그리고 하던 일도 순조롭게 굴러가고 있었지. 그렇지만 딱 이때다 싶어서  접었어. 어쩌다가 농촌이 패가망신하거나 파탄난 놈들이나 숨어드는 유배지로 전락했을까나. 하하하! 어르신들한테 아무리 아니라고, 마누라한테 쫓겨나지 않았고 사업 망해서 도망다니는 거 아니라고 해도 글쎄 안 믿는 눈치시더라. 어서 빨리 집부터 마련해서 우리 예쁜 마누라를 데리고 와야지 안 되겠다. 귀농이 나한테는, 89년도에 결혼하면서부터 생각했으니까 자그마치, 이십년 넘은 꿈이었다."

그러던 그가 최근에 그의 큰집이자 나의 큰집이기도 한 임시거처를 벗어나서 비로소 영원히 정착할 집을 사서 수리를 마쳤다고 했다. 진짜, 서울에서 부인까지 내려왔는데 착하고 예쁘기가 그만이라는 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정착한 집은 옆 마을에 있었다. 고향 마을에서는 도저히 집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결국 옆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고향마을과 집을 장만한 옆 마을을 오가며 부지런히 농사준비를 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고향으로 농사지으러 온 건데, 지원금 타내러온 사람 취급"

그런 그의 근황이 궁금하기도 해서 며칠 전에는 직접 고향 마을로 향했다. 가기로 한날 아침 일찍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 오늘 산골에서 작업하니까 그쪽으로 찾아와. 휴대폰은 안 터지니까 연락은 안 된다.'

'산골'은 우리 고향 마을의 수많은 골짜기 이름중의 하나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이름인가. 비로소 그가 고향에 정착한 농부라는 실감이 났다. '산골'이니 '뫼골'이니 '장자골'이니 '서당골'이니 하는 골짜기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까마득한 상상 속 이름인줄 알았는데 전화기에 찍힌 '산골'이라는 지명을 보니 비로소 고향의 골짜기 이름들이 실재하는 지명으로  되살아났다.

그가 작업 중인 블루베리 농장은 산골 골짜기 중에서도 저수지를 끼고도 한참을 지나서야 나타났다. 고향마을에 위치한 골짜기라지만 나는 처음 가보는 곳이다. 수많은 골짜기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여기서 나고 자랐어도 내가 아는 골짜기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지점에서 주차를 하고 골짜기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비로소 밭 언저리에 움직이는 사람들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때까지 골짜기에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핸드폰은 진즉 서비스 지역을 벗어났음을 알리는 표시를 남긴 채 먹통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고향 마을은 어디서나 핸드폰이 잘 걸리지 않았다.

얼굴이 하얀 어설픈 농부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친구는 완연한 농부로 변신해 있었다. 몇 십 년 만에 만나는 친구지만 스스럼없이 반갑고 친근했다. 열심히 삽질을 하며 두엄더미를 뒤집는 가운데 그는 귀농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그는 주말이면 전국의 산과 들을 돌며 정착할 땅을 물색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의 삶도 귀농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정을 떠나 자연을 접하면서 농촌과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또 봉사활동을 하며 목격한 도시노인들의 스산한 삶도 그의 귀농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몸과 마음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을 때 인생 최종 목표인 귀농을 완성시켜 놓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과감하게 귀농지로 고향을 선택했다.  

"왜 텐트에 침낭은 메고 왔나?"

"아, 서울에서 여기 집을 알아보니까 답답해서 그랬지. 일단 내려가서 집을 구해보자 그랬던 거다. 주택문제 해결해놓고 귀농하려면 한정 끝이 없겠더라. 정 안 되면 노숙이라도 할 각오로 텐트에 침낭을 메고 일단 내려오고 본 거지. 무턱대고 왔는데도 한데 잠은 안 잤다. 하하하. 고향이라 가능한 거야."

"빈집 구입해서 수리하고 논, 밭 장만하고 또 닭하고 가축들 키우고 몇 달 만에 참 많은 걸 한 거 같네."

"준비를 많이 해서 왔다. 그런데 주택문제가 가장 힘들었다. 빈 집들은 많은데 아무도 팔겠다는 사람이 없는 거야.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자신들이 딱히 고향에 돌아올 계획들은 없으면서 집만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놓겠다는 거더라. 그 마음 이해가 가지. 도시 생활이 힘들수록 시골에 쓰러져 가는 집이라도 한 채 남겨두고 싶은 그 심정 말이다. 그래도 난 계획한대로 순조로운 편이다. 같은 귀농학교 출신 동기들 귀농운동본부 회원들 거의 적응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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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의 변신 그 황량했던 빈집이 친구의 손의 거쳐 아늑한 보금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친구가 입만 열면 자랑하는 친구의 아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네요. ⓒ 정미경


그는 해당 지자체의 귀농, 귀촌 대책이 전무하다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각 지자체들의 귀농, 귀촌 대책이 천차만별인데 화순군의 경우 귀농자들을 위한 배려가 거의 없다고 했다. 

"군청 같은데서 귀농인 대하는 시선이 별로 곱지가 않아. 귀농인들 배려하는 정책은 하나도 없으면서 일정 여건을 갖추고 귀농한 사람조차 홀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난 순수하게 고향에 농사지으러 내려온 사람이잖아. 귀농자금이나 타내려고 머리 쓰는 사람 취급을 하는데 정말 괴롭더라."

그가 느끼기에 화순군의 경우는 대도시에 인접한 이점을 노려 위성도시형 인구정책에 중점을 두다보니 귀농, 귀촌에 힘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번거롭게 귀농, 귀촌 인구를 유치하느니 차라리 광주와 인접한 지정학적 위치를 살려서 개발과 택지조성에 주력하면 인구유입은 훨씬 더 효과를  거둘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위적으로 조성된 한옥마을이나 아파트단지에 입주한 주민들이 인구수는 늘려줄 수 있을지 몰라도 순수한 농업인구로서 기여도는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군 스스로가 농도로서의 기능을 포기한 채 도시의 하숙촌 역할에만 안주하는 꼴이 된다.

"군내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귀농운동본부의 내실은 어떤 편인가?"

"귀농학교 출신 동기들 중에 실제 귀농, 귀촌으로 정착한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운동본부 주변을 기웃거리는 수준이다. 여전히 귀농, 귀촌에 대한 미련은 남겨둔 채 힘든 농사일은 꺼리는 사람들도 많다. 귀농에 대한 확신 없이 귀농운동 자체만을 하나의 문화로 즐기는 사람들도 있고."

사료공장 취업부터, 주말농장 체험까지..."나 많이 준비했다"

그가 작년 6월 귀농을 목적으로 사업을 접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료공장 취업이었다. 그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사료공장만큼 노동 강도가 센 곳은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사료공장에서 6개월을 버텼다. 장차 농사일에 필요한 근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동안도 꾸준히 체력을 길렀지만 귀농이 임박하자 노동으로 몸을 단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5년 전부터는 서울 인근 주말농장에 5백여 평을 분양받아 농사를 지으면서 흙에 대한 감각도 서서히 익혔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그는 육체적, 심리적으로 시골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내가 예전에 보석세공기술을 제대로 익히려고 호주로, 캐나다로 세계 곳곳을 안 다녀본 데가 없다. 그렇게 32년 동안 내 일에 최선을 다했지. 덕분에 업계에 최고라는 평판과 더불어 자부심도 컸어. 귀농도 마찬가지로 그만큼 꼼꼼하게 준비하고 노력했다."

"그동안 귀농에 소모된 비용은 대략 어느 정도인가?"

"8천 정도? 집은 내가 직접 수리했어도 1200정도 들어갔는데 중장비 대여료 같은 거지. 현재 논은 1800여 평 확보했고 앞으로도 훨씬 더 많은 논을 구입할 예정이다. 적어도 오륙십 마지기 정도는 지어야 중장비를 구입해도 효용가치가 있겠어서."

"벼농사 이외의 다른 계획은?"

"어지간한 나무와 약초들은 다 심어볼 생각이야. 친환경 농법을 최대한 유지해야 하니까 퇴비 얻으려면 소도 몇 마리 키워야 하고, 식품위생법 관련 법규 알아보고 유기농 과일이나 약초를 이용한 발효 효소도 만들 계획이다. 다양한 유기농 식품을 꾸준히 개발하고 생산해 내고 싶어."

그는 자신의 귀농은 성공적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귀촌, 귀농이 실패로 끝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고 했다.

"스스로 부대끼고 일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는다면 귀농은 성공할 수 없어. 여기 와서 살이 11킬로나 빠졌다. 그만큼 농촌 일이라는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내 몸 움직이지 않고는 거저 되는 일이 없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귀촌,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충고해 주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농촌에서 살려면 지출을 최대한 줄여라. 둘째 고향이나 연고지로 귀농해라. 마지막으로 고향이나 연고지가 없다면 차라리 마을이 형성되지 않은 외딴집을 선택해라."

고향이나 연고지가 없을 때는 차라리 마을과 동떨어진 외딴집으로 귀촌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했다. 낯선 동네에서 마을주민으로 적응하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에너지를 낭비하다보면 귀농 자체에 집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고향이 없고 연고지가 없을 바에는 차라리 마을과 동떨어진 외딴집에서 자신만의 귀농에 집중하는 것이 나은 방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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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귀농한 고향,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어느 골짜기에 위치한 고추밭입니다. 승기의 귀향을 계기로 뜻있는 친구들의 귀농, 귀촌이 이어져서 예전처럼 오손도손 모여살면 좋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어 봅니다. ⓒ 정미경


"11킬로 빠질 정도로 부대낄 각오해야 귀농 성공"

그는 이야기 도중에도 쉼 없이 부엽토와 두엄을 섞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삽질을 하는 손놀림이 능숙하다. 농부로 전업한 지 이제 겨우 팔 개월째. 그런 그에게서는 몇 십 년 묵은 농부의 체취가 묻어났다. 익숙한 솜씨로 삽질을 하는 그의 모습 어디에도 과거 숙련된 보석세공업자로, 화려한 보석상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화려한 금은보화를 제련하던 그는 지금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대신 흙속의 진주를 캐는 농부가 되어 열심히 두엄을 헤집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무척 근사해 보였다.  

"허이참. 토끼탕 끓여놨는데 그냥 간다고? 친구 온다고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서 토끼탕을  끓였구먼. 진짜 맛있게 끓여놨는데 집에 가서 저녁 먹고 가라니까."

시골의 밤은 일찍 찾아와서 오후 다섯 시에 벌써 마을은 어둠에 휩싸였다.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도시로 돌아오는 길. 광주로 향하는 도로에 진입하고 나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친구, 고향으로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 친구야말로 우리 가문의 보배다ㅋㅋ'

그러자 답장이 왔다.

'어이 토끼탕을 못 먹여 보내 아쉽네. 다음에 오면 꼭 저녁 먹고 가야 해'

40명 넘는 한마을 친구 중에 한명쯤 귀농을 하고 보니 참 든든하다. 요즘도 농촌에서 울력이라는 걸 하는지 모르겠다. 그 친구는 울력도 앞장서서 잘할 사람이다. 누구처럼 울력에 빠져서 괜히 동네 이장한테 찍히거나 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 친구라면.
#귀농 #귀촌 #고향 #농촌 #유기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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