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 엄마야?" 집을 뛰쳐나왔다

결혼 후 연락없이 늦던 남편과 싸운 날... 조카보니 떠오르는 '사랑 싸움'의 기억

등록 2012.11.26 14:46수정 2012.11.2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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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은지 잘 있죠?"
"은지? 아이고, 말도 마. 얼마 전에 신랑이랑 대판 싸웠다고 짐 싸들고 집에 왔어. 그래서 내가 걔 아예 내쫓아 버렸잖아."


얼마 전, 큰집에 갔을 때 형님에게 지난해 결혼한 시댁 조카 은지에 대해 물었다. 은지는 형님의 딸.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답이 돌아온 거다.

"진짜요? 짐까지 싸들고요?"
"그래. 신랑이 착한데 그렇게 싸울 일이 뭐 있다고. 그래서 내가 아주 걔 버릇 들까봐. 쫓아 보냈어."

조카랑 조카사위 성격을 생각하니 은지가 화가 나서 뛰쳐나온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은지가 짐까지 싸들고 친정에 왔다니 의외다. 나이가 서른도 넘었고 하는 행동을 보아도 철이 다 들었다 생각했는데. 형님이랑 아주버님은 또 얼마나 놀라셨을까? 형님이 어떤 심정으로 은지를 내쫓았는지 알 거 같다.

나도 신혼 때 가출은 했지만 짐을 싼 기억은 없다. 역시 내가 조카보다 철은 더 들어서 결혼을 한 거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도 뭔가 좀 일이 있긴 있었던 거 같다.

"내가 당신 엄마야?" 출근 준비하는 남편 두고 집 나간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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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은 그날 남편이 새벽에 집에 들어왔더랬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싸움은 퇴근 후에 하자며 천연덕스럽게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 때문에 더 화가 났다. ⓒ sxc


첫째가 돌 정도 되었을 때 일이다. 남편이 출근하려고 화장실에서 씻고 있는데 첫째를 집에 두고 내가 쏜살같이 집을 빠져나왔다. 그때 집을 나서면서 느꼈던 통쾌함,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 내가 왜 그랬지?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되었더라? 찬찬히 생각하니 그때 일이 하나하나 생각난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은 그날 남편이 새벽에 집에 들어왔더랬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싸움은 퇴근 후에 하자며 천연덕스럽게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 때문에 더 화가 났다. 그즈음 남편은 종종 집에 잘 안 들어왔다. 물론 술 드시느라. 또 어떤 특별한 날은 연락도 안 주시고. 

"늦으면 늦겠다 전화해야 할 거 아니야?"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연락이 없으면 내가 잘 있는 거야."
"연락이 없으면 걱정하잖아. 집에서 걱정하는 사람 생각은 안 해? 당신은 진짜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어."
"우리 엄마는 연락 없으면 일이 있어서 안 들어오나 생각하고 걱정 안 하셨어."
"내가 당신 엄마야? 왜 내가 어머니처럼 행동하길 기대해? 그리고 그건 어머님께서 당신을 진짜 잘 못 키우신 거야."

그런데 정말로 미치겠는 건 남편이 이런 말을 할 때 진정으로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표정으로 한다는 거다. 그리고 남편이 솔직히 착하게 생겼다. 그런 얼굴에 자기가 하나도 잘못이 없다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니 보는 내가 얼마나 속이 터지겠나.

결혼한 지 2년 정도 된 남편은 그때까지도 총각 때의 자유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날은 결국 참고 참았던 내가 폭발을 했지 싶다. 새벽에 들어와서는 출근 늦었다며 화장실에 들어가 버린 남편에게 어떤 식으로든 복수하지 않으면 미칠 거 같았다. 순식간에 옷을 입고 집을 뛰쳐나왔다. 돌도 안 된 아기는 다행히 자고 있었다.

집 근처 공원을 배회하다가 남편 출근 시간이 지난 시간에 10시쯤 집에 가서 벨을 눌렀다. 창문 너머에 흔들의자에 앉은 아기가 아는 체하는데 남편은 싱크대에 서서는 아기 젖병을 삶는지 움직이지도 않았다. 벨을 아무리 눌러도 남편은 꿈쩍하지 않았다. 아기만 '아빠 뭐해? 엄마 문 열어 줘'라는 눈짓으로 끙끙거렸다. 계속 벨을 눌러 보았자 화난 남편은 문을 안 열어 줄 거 같았다. 어찌해야 할까? 일단 대문을 나서서 공원에 갔다.

신혼 싸움은 '사랑 싸움', 조카야 열심히 싸워라

오전 시간 갈 곳이 없었다. 결국, 친정으로 몸을 향했다. 친정에 간 나는 엄마에게 아무 말 안 하려고 했지만, 눈물이 왈칵 쏟았다.

"엄마, 신랑이 문을 안 열어 줘."

전후 사정을 들은 엄마는 옷을 입고는 앞장을 서라고 했다. 집으로 향한 전철에서 엄마는 한마디도 안 하셨다. 집에 도착해 엄마가 벨을 눌렀다. 나는 뒤편에 있었다. 남편 인기척도 없었고 말도 못하는 아기가 흔들의자에 앉아서 창문을 내다보며 또 끙끙거렸다.

"할머니 왔다."
"어, 어머님 오셨어요?"

남편이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열린다. 싱겁다. 엄마가 나타나니 남편도 더는 문을 안 열어 줄 수가 없었나 보다. 집에 들어간 엄마는 아기에게 가서 "아이고 우리 강아지 잘 지냈어? 할머니가 안 본 사이 많이 컸네" 하면서 안아 주셨다. 엄마 등장에 놀란 남편은 당황해서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엄마는 우리 부부에게 "왜 싸웠느냐", "왜 문 안 열어 주었느냐?", "왜 집을 뛰쳐나왔느냐?" 한 말씀도 안 하셨다. 엄마가 한 말씀도 안 했지만 우린 이미 벌을 받고 있는 심정이었다. 다 큰 어른 둘이 초등학생만큼 유치하게 싸우다가 결국 둘이 해결을 못 하고 엄마까지 불러들여 해결했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 우린 엄마에게 점심 드시고 가시라고 했지만, 엄마는 "일없다"며 훌훌 집을 나서셨다. 남편과 나는 더는 싸울 수가 없었다. 서로 쳐다보며 싱겁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가 물었다.

"오늘 회사는 어떻게 했어?"
"자장가 노래 테이프 틀어놓고 잠깐 회사에 가서 아내가 파업해서 휴가 낸다고 말했어."
"그래서 사람들이 뭐래?"
"뭐라긴 웃지."
"집에 왔을 때 아긴 안 울었어?"
"뭐 잠만 잘 자던데. 그리고 집에 빨리 왔어. 아기 깰까 봐."

당시에 우리 집과 회사가 5분 거리였다. 그러니 가능했던 일이다. 엄마가 집까지 쫓아 와 준 가출 뒤엔 남편과 아무리 싸워도 가출한 적은 없다. 물론 남편도 연락 없이 늦는 버릇을 그때 이후론 싹 고쳤다. 지금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조카나 신혼 때 나나 행동이 참 철이 없고 귀여워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혼 싸움을 사랑 싸움이라 말하는 거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생각해 보면 당시에 일들이 두 남녀가 같이 살아 보려는 치열한 투쟁이었지 싶다. 정말 물러설 수 없는. 그러니 조카에게도 열심히 싸우라고 응원해야겠다. 
#신혼 #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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