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변을 보는데 긴장이... '여긴 미국이었지'

[시골 한의사, 미국을 달리다] 미국 자전거 횡단 69 -71일

등록 2012.12.09 15:40수정 2012.12.1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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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일요일

Missoula, MT - Powell campground, ID
59 mile = 94.4 km


2층 침대 아래 칸에서 자던 아저씨가 보이지 않는다. 벌써 짐을 챙겨 나간 모양이다. 간밤에 그의 잠든 모습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었다. 커다란 캐리어 가방에서 빼낸 산소 호흡기를 얼굴에 뒤집어 쓰고 애써 잠을 청하던 아저씨. 이따금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몸을 뒤척일 때는 사람 하나 잡는 줄 알았다. 심각한 수면 무호흡증은 지켜보던 사람까지 숨이 넘어가게 만든다.

부스스한 얼굴로 거실에 나오니 한 여자가 커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메리 스미스(Mary Smith)는 콜로라도 보울더(boulder) 출생. 간호사로 8년이나 일했는데 어느 날 서양의학에 염증을 느껴 자연의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시는 그 쪽 세계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주 단호하다.

2달이 넘도록 지켜봤던 미국인의 삶에서 느낀 바를 넌지시 들려주었다. 가까운 거리도 걷지 않고 차에 의존하는 운전자들.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 콜라를 매번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패스트 푸드가 건강에 쥐약이지. 그런데 미국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마찬가지야."

이른바 단일 경작(Monoculture)의 폐해다. 캔자스에 즐비한 옥수수 농장들은 단적인 예다. 대량생산 체제로 진입한 미국의 농업 시스템에서는 넓은 면적에 동일 작물을 빽빽하게 심는다. 종의 다양성이 진화의 원동력이라는 원칙에 비춰볼 때 단일 경작은 병충해 한 번으로도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항시 내포하고 있다.

살충제과 화학비료의 사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지력 또한 급격하게 소모시킨다. 메리의 표현대로라면 허리 높이만큼 두툼했던 기름진 토양층이 지금은 사람 발목 높이까지 줄어들었다.

최대의 이윤만을 위해 급조된 농산물은 영양분 또한 극히 부족하다. 채소를 아무리 먹어도 건강해질 수 없는 이유다. 해결책은 복합 경작(polyculture). 다양한 식용작물을 골고루 섞어서 길러야 땅도 사람도 건강해질 수 있다.

그녀는 우프(World Wide Organic Opportunity Farm) 멤버다. 한국에도 우프 본부가 있다며 나에게 관심을 종용할 정도니 그 열의가 대단하다.

1971년 영국에서 시작된 우프(WWOOF)는 애초 "유기농장에서 주말 동안 일하기"(Working Weekends on Organic Farms)를 의미했다. 당시 런던에 거주하던 수 코퍼드(Sue Coppard)라는 여성은 유기농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도시의 거주자들과 시골 농가를 이어주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서섹스(Sussex)에 소재한 에머슨(Emerson) 대학의 생물역학 농장에서 시험 삼아 주말 농장을 가꾸며 아이디어를 서서히 구체화시켰다.

사람들이 서서히 몰려들었고 자원봉사 시간도 주말을 넘어 평일로까지 확대되었다. 명칭 또한 "유기농장의 자발적인 근로자들"(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s)로 바뀌었다. 이 때 일부 국가의 노동법과 이민 당국에서 '근로'라는 단어를 문제 삼았다. 우퍼(WWOOFer)와 이주 노동자가 혼동될 소지가 있다는 것.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동시에 우핑이 전 세계에 퍼져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유기농가에서의 전 세계적인 기회"(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우핑은 일종의 Farm Stay로 '우퍼'라고 불리는 여행객이 외국인 농가에 들어가 하루 평균 4-6시간 일을 도와주며 농장주에게 식사와 숙박을 제공 받는다. 그 과정에서 농장 가족을 통해 그 나라 문화와 언어를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다.

현재 전 세계 102개국에서 우프 활동이 펼쳐지며 55개국에 우프 대표부가 있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칼질'의 유혹을 다잡고 '카레'로

친환경주의자와 자전거 라이더가 호스텔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대체로 물질문명에서 거리를 두려 하는 이들은 서로 끌리는 데가 있는지도 모른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며칠만의 라이딩을 개시한다.

오늘 코스는 약간 짧다. 59마일. 롤로 패스(Lolo pass)까지 2000피트를 올라가야 하는데다 목적지인 파웰(powell) 다음 66마일 동안 아무런 시설도 없어 불가피한 선택이다.

후덜덜한 마음을 안고 차가 붐비는 Federal Route 93번에 재진입했다. 미줄라를 빠져나가는 길은 들어 올 때처럼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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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호 주에 입성 롤로(Lolo) 패스에 도달하면서 주 경계선이 바뀌었다. ⓒ 최성규


롤로 패스(Lolo pass)에 당도하자마자 오리건 주에 입성하면서 태평양 시간대(pacific time zone)에 들어왔다. 자전거 안장에 앉은 채로 1시간을 번다.

이제 파웰(powell)까지는 12마일이다. 커트(Kurt)가 작년에 거쳐 갔던 길이다. 오클라호마의 집에서부터 시작해 캔자스 주로 입성. 거기서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타고 오리건 주 플로렌스까지 갔으니 절반의 완주를 한 셈이다. 자전거 선배로서 커트는 소중한 정보 하나를 주었다. 파웰에 도착하면 주유소를 공략하라!

캠핑장 초입에 주유소 하나가 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서 텐트를 쳐도 되나요?"
"아! 당연하지. 저기 놀이터에다 맘껏 치라구."

캠핑장으로 들어갔으면 꼼짝없이 8달러를 내야 할 판이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라이더들이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면 이러한 고급 정보를 얻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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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끓인 카레 주린 배를 채워주는 카레와 로티니 ⓒ 최성규


저녁 시간이 되자 근처 레스토랑으로 여행객들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매주 일요일마다 들른다는 밴드가 식사의 흥을 돋우기 위하여 음악을 연주한다. '돈 좀 쓰면 어때? 가서 근사하게 칼질 한번 해야지!' 마음 속으로 유혹의 속삭임이 뻗쳐왔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아랑곳 하지 않고 나홀로 식사를 차려 먹는다. '이제는 혼자여도 괜찮아.'

7월 23일

POWELL CAMPGROUND - STITES, ID
93 MILE = 149 km

오랜만에 90마일 가까운 장거리를 달릴 기회가 다가왔다. 록사(Lochsa river) 강변을 따라 몇 십 마일 동안 약간의 내리막 경사가 지속되기 때문에 최적의 조건으로 달릴 수 있다.

허나 배고픔이 극에 달했다. 잼이나 땅콩 버터를 발라먹을 또띠야는 몇 장 남지 않았고, 싸게 몇 끼를 해결해볼 요량으로 구입한 로티니와 카레 가루로는 당최 배가 차지 않는다.

시원한 강물을 따라 굽이치는 계곡길이 멋있지만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게다가 로웰(Lowell)에 이르기까지 66마일은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는 구간. 캔자스 주에서 견뎌야 했던 마의 58마일, 38마일 구간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몸서리가 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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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마차 로웰(Lowell)가는 길에서 느낀 아날로그의 향수 ⓒ 최성규


그나마 살인적인 더위가 없어서 다행이라면 다행. 갈증이 심하면 배고픔은 덜하지만 배고픔이 심하면 갈증을 느끼지 않는다. 도중에 물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로웰(Lowell)에 이르러 레스토랑을 급히 찾았다. 아침 겸 점심을 한 끼로 해결하고 다시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남은 30마일 구간이 여전히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과잉 충전한 수분이 말썽을 일으켰다. 오줌이 마려웠지만 이 넓은 땅덩어리에 공중화장실은 찾아보기 어렵다. 쩔쩔매다가 인적이 드문 길가에 자전거를 세우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여기가 누군가의 사유지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크게 들었던 것이다. 며칠 전 커트 아저씨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뇌리에 강하게 입력되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한 흑인 여자얘가 어느 집 정원을 지나고 있었대. 뭔가를 들고는 팔을 앞뒤로 휘저으며 갔나봐. 어린 아이니까 신나서 그랬겠지. 백인 주인은 그걸 무기로 생각한 거야. 당장 총을 가져다가 걔를 쐈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대."
"그 주인 미친 거 아니에요? 콩밥 좀 먹어야지."
"아니야. 피해자가 죽어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오해했다면 정상참작이 돼."

개인의 총기 소지 합법과 더불어 미국인들의 정당방위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실제적인 위협이 있지 않는 한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잠재적인 위협만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있다. 한 흑인이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총을 꺼낸다고 생각한 경찰은 그 즉시 총을 쐈고 그는 치명상을 입고는 숨을 거두었다. 어이없게도 호주머니에는 지갑이 들어있었다. 사법질서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쓰라린 참상이다.

무사히(?) 소변을 마치고 어느덧 쿠스키아(Kooskia)에 들어섰다. 간단한 식료품을 구입하고 4마일을 마저 달리니 오늘의 목적지 스타이츠(Stites)에 도착.

마을 옆으로 시원한 강이 하나 흐르는 가운데 공원에서는 캠핑이 가능하다. 땅거미가 질 무렵, 사위는 적막해지고 나는 텐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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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이츠(Stites)의 공원 사진 맨 아래 하얀 비닐 봉지가 놓여 있는 게 보인다. 일용할 양식이 들어있는 소중한 보따리에 그렇게 큰 일이 생길 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최성규


침묵의 소리를 들으며 눈을 살며시 감았다. 문득 음악이 그리워졌다. 영화 [아비정전]에서 주인공 아비(장국영 역)가 맘보춤을 추던 장면. 로스 인디오스 타바하라스(Los Indios Tabajaras)가 연주한 마리아 엘레나(Maria Elena)가 흘러나온다. 그 선율에 빠져 감상에 젖어보고 싶은 밤이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

없어진 햄과 치즈... 범인은?

7월 24일 화요일

Stites, ID - Riggins, ID
73.5 mile

공복감을 느끼며 기지개를 편다. 피크닉 테이블 위에 놔뒀던 음식 생각이 났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식탐을 달래며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는 비닐봉지들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몇 초간의 정적 후 난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어쩜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봉지의 매듭은 그대로인데 밑 빠진 독 마냥 옆구리가 북 찢어져 있었다. 황급히 속을 살폈다. 비스킷, 식빵, 포테이토 샐러드. 뭐가 더 있었는데. 어허, 햄과 치즈가 없어졌구나. 샌드위치를 만들려고 샀던 재료들이다.

설마 설마 했는데 당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커트가 일러준 말이 있었다.

캠핑을 하다보면 야생동물이 꼬이는 경우가 많아. 이럴 때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지. 요리나 식사는 텐트에서 100피트 떨어져서 할 것. 텐트에 냄새가 배면 동물들이 한밤중에 몰려들 수 있거든. 자, 먹고 남은 음식은 어떻게 하냐? 나무에 매다는데 땅에서 10피트 높이, 줄기에서 10피트 떨어지도록. 바닥에서 뛰어봤자 닿지 않고 나무를 타고 올라도 가져갈 수 없는 위치거든.

깊은 산 속도 아니고 마을 근처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여봐란듯이 식탁 위에 음식을 모셔놨으니 굶주린 녀석들이 안 오고 배겼을까? 보시했다 생각하고 텁텁한 식빵을 입 안에 구겨 넣었다.

마을 동편에 우뚝하니 서 있는 동산 위로 해가 떠오른다. 냉랭했던 대기가 열을 받으며 따스해진다. 오늘은 지도 밖으로 행군할 차례다. 현지인들만 아는 비밀 루트. 식품점 아주머니는 이 길이 기존의 도로보다 빠르고 아름답노라며 자랑을 늘어놓았었다. 공원 뒤쪽에 놓인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꺾었다. 강변을 따라 2마일 가량을 올라가다 보니 갈림길 등장. 'Lamb grade' 길을 따라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길은 360도 꺾어지며 가파른 경사로 도전자를 시험한다. 록키 산맥 이후로 오랜간만의 고난이도. 차량 통행은 거의 없어 심리적 안정감은 탄탄하다.

지그재그로 핸들을 돌려대며 조금씩 언덕을 정복해 나간다. 5, 6 마일을 힘겹게 오르자 반갑기 그지없는 평원이 드러났다. 고위 평탄면에 올라와 바라본 전경은 경이롭다. 익을 대로 익은 황금빛 물결. 싱그러운 초록빛 파도. 둘이 한데 섞여 현란한 색채감을 조성한다. 소나 말의 먹이로 쓰는 곤포 사일리지가 여기저기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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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 빌리지(Grant village) 가는 길 시원스레 펼쳐진 목초지, 그리고 저 멀리 쭉 뻗은 신작로. ⓒ 최성규


그랜트 빌리지(Grant Village)에 도착. 다시 한번 샛길로 빠진다. 95번 Federal Route 대신 'Old white bird hill road'를 오른다. 동네 뒷산을 오르는 느낌. 이른바 삼림욕 라이딩이다. 정상에 도착하니 이제껏 2800피트의 고도를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새로 닦인 도로를 마다하고 Old highway 95로 들어섰다. 산모퉁이를 돌자마자 눈 앞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협곡의 위용이 인간을 압도한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도로에서 온 몸으로 자연을 느끼며 페달을 밟았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거나 브레이크가 고장나면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문안인사를 드려야 한다.

Old highway 95가 끝나고 White bird 마을이 나왔다. 지형의 영향인지 온도가 만만치 않다. 타들어 가는 목구멍을 식히기 위해 근처 가게에서 얻은 얼음물을 세 번이나 연거푸 마셨다.

이제 리긴스(Riggins)까지는 30마일. 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억지로 나 자신을 채찍질한다. 오랜 휴식으로 몸이 퍼져 버리면 남은 시간은 더욱 고통으로 점철되기 때문. 벌써 무노동의 단맛에 취해버린 허벅지를 두들겨 깨우며 갈 길을 재촉한다.


3마일, 2마일, 1마일. 힘차게 계곡을 굽이치는 Salmon River 옆으로 RV 파크 하나가 보였다. 쌀쌀하지는 않아도 바람이 세차다. 바람결에 몸을 싣고 야영에 돌입한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2주일 남짓. 손가락으로 일정을 헤아려보며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미국 #자전거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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