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떠나고 참으로 못난 꽃 하나 지상에 남으리라

[고 박영근 시인] 솔아 푸른 솔아 ④ 마지막

등록 2012.12.20 17:51수정 2012.12.2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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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구청 옆 신트리공원을 산책하다보면 시(詩)가 새겨진 커다란 돌 하나를 만날 수 있다. 2006년 타계한 고(故) 박영근 시인을 기리는 시비이다. 박 시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시집인 '취업공고판 앞에서'를 펴내며 노동시의 주춧돌을 놓았다. 시비에 새겨진 '솔아 푸른 솔아-백제 6'은 1990년대 저항의 현장에서 어김없이 울렸던 노래, '솔아 솔아 푸른 솔아'의 원작시이기도 하다.

박영근 시인은 1985년부터 2005년까지 20여년 동안 부평에서 살았다. 시인은 이 기간에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1994년 제12회 신동엽창작상,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 수상 등 그가 남긴 화려한 이력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이뤄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인은 생전 신트리공원길을 자주 거닐었다고 한다. 그가 걸어온 삶의 흔적을 그가 남긴 시, 그리고 그를 추억하는 이들을 통해 되짚어보았다.


아내와 헤어진 후 쓴 시, 백석문학상 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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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영근 시인. ⓒ 성효숙

박영근 시인은 1998년부터 타계하기 전까지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인천지회에서 지회장과 시분과위원장, 이사 등의 직책을 맡으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대외적인 모습과 달리,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도 벌어졌다. 2000년대 초, 15년을 함께한 아내 성효숙(화가)씨와 헤어진 것이다.

시인은 이 일을 마음에 두고두고 되새겼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시를 썼다. 2002년 세상에 나온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창작과비평)에는 괴롭고 혼란스러운 '나'가 자주 등장한다.

시인이 아꼈던 후배인 박일환 시인은 "한 술자리에서 박 시인은 '저 꽃이 불편하다'에 실린 작품이 연시(戀詩)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내와 헤어진 겨울부터 쓰기 시작했고, 아내의 시선을 의식하며 쓴 작품이라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한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잊을 것도, 사라진 것도 없다. 삶에 대하여 지키지 못한 약속도 때론 남은 시간을 지키는 불빛이 되지 않던가"라고 써놓았다. 글 속의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다만 짐작할 뿐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은 '노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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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4동 신트리공원에 있는 박영근 시인 시비. 시 ‘솔아 푸른 솔아’가 새겨져 있다. ⓒ 심혜진

이 시집으로 그는 이듬해인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인 그에게 두 번째로 주어진 영광스런 순간이었다.   2004~2005년에는 한 대학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그와 오랜 친분을 나눈 이들과의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2003년 그가 믿고 따르던 선배 정세훈 시인이 지병 때문에 거처를 김포로 옮겼다. 2005년에는 그와 한 동네에 살면서 자주 왕래한 고향친구 허정균씨마저 서울로 이사 갔다.
정 시인은 "떠난다는 말에 허망하게 바라보던 박 시인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시인은 어딘가 모르게 점점 몸이 야위어 갔다. 2005년 11월, 인천 남동구 용현동에 있는 친누나의 집 근처로 이사 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병색이 짙었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 "병원에 가 보라"는 말이라도 할라치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성효숙씨는 2006년 4월, 시인을 만났다. 성씨는 "걷기도 힘든 몸으로 저녁밥 반 공기를 비운 후 그가 형형한 눈빛으로 '노동시' 이야기를 꺼냈다"고 했다.

"그때 내가, '이제 당신은 노동시 안 써도 되니 존재에 대해 써보라'고 했다. 시인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붙잡고 있었던 것은 시, 노동시였다."

2006년 5월 11일 오후 8시 40분, 시인은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지만 치열했던 48년의 생이 끝났다.

전집 발간과 문학관 건립은 남은 과제

살아서 네게 술 한 잔 사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살아서 네 적빈의 주머니에 몰래 여비 봉투 하나 / 찔러 넣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몸에 남아 있던 가난과 연민도 비우고 / 똥까지도 다 비우고 / 빗속에 혼자 돌아가고 있는 / 네 필생의 꽃잎을 생각했다 / 문학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 목숨과 맞바꾸는 못난 꽃 / 너 떠나고 참으로 못난 꽃 하나 지상에 남으리라 / 못난 꽃 (도종환 시 '못난 꽃' 중에서)

그가 세상을 뜬 후, 많은 문인과 평론가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을 썼다. 시인 도종환은 '못난 꽃'이란 시를 썼고, 판화가 이철수는 '드문드문, 몇 해 만에 한 번씩 만나면 제 말랑말랑한 판화를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면서도 넉넉한 웃음으로 슬몃 넘어가주던' 시인의 일화를 적은 판화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성씨를 비롯해 그의 선·후배와 동료들은 인터넷에 '박영근 시인 추모카페'(http://cafe.daum.net/poemwindow)를 만들고, 해마다 기일이 되면 추모제를 여는 등 그와의 추억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9월 신트리공원에 세운 시인의 시비는, 지난해 9월 홍미영 부평구청장이 한 행사장에서 '박영근 시비를 세우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후 시비 건립은 빠른 속도로 추진됐다. 김이구 '창작과비평' 이사와 고향친구인 허정균, 그의 문학 동료였던 서홍관·박일환 시인, 그리고 성효숙씨 등 8명이 집행위원회를 구성했고,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시비 세울 곳을 수차례 답사하고, 시비로 사용할 돌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 시비에 새겨진 '솔아 푸른 솔아'는 성효숙씨가 시인의 육필 원고에서 하나하나 글자를 모은 것이다. 시비 제막식이 열린 행사장은 각지에서 온 문인과 유족 등 200여 명으로 가득 찼다. 차분하면서도 마냥 엄숙하지 않은 분위기에서 행사가 진행됐다.

그의 곁을 지키는 이들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고 이야기한다. 절판되는 바람에 쉽게 구해 읽을 수 없는 그의 시집을 다시 출간해, 박영근 시 전집을 발행하는 일이다. 가장 많은 시가 탄생한 장소인 부평4동 집을 문학관으로 만드는 것도 과제다. 그의 삶을 지탱한 '노동시'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당신이 지금 이 순간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낮고 분명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박영근 #노동시 #박영근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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