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지만, 하루종일 투표장에 있었어요

미래 유권자, 투표 도우미로 참여해 보니

등록 2012.12.22 12:28수정 2012.12.2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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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소에 투표하러 들어가는 유권자들이에요. ⓒ 이슬비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내가 직접 투표를 하지 않았어도 한바탕 홍역을 치른 것 같다. 하물며 직접 투표권을 행사한 유권자들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지지한 후보의 당락에 관계없이 그럴 것이다.


나는 투표권이 없다. 아직 고등학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보고 신문을 펴도 온통 선거가 이슈였다. 투표권이 없는 우리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선거일에 투표 도우미로 참여하게 됐다. 우연찮은 기회였다. 학교에서 선거 도우미를 뽑는다는 공지를 듣고 신청을 했다. 선거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흥분도 되고 기대도 됐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투표소로 가야 한다고 엄마 아빠한테도 말씀을 드렸다. 엄마와 아빠는 '기특하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러나 선거일 전날 밤이 되자 조금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다.

다들 늦잠을 자는 날인데, 나 혼자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투표소로 가야 한다는 게 귀찮아졌다. 괜히 도우미를 하겠다고 신청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라'는 엄마 아빠의 성화에 못이겨 새벽 2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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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찍은 투표소입구에요. ⓒ 이슬비


내가 일어나야 하는 시간은 4시30분쯤이었다. 2시간 반밖에 잘 수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알람소리에 눈을 비비며 깨보니 4시30분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안 주무시고 계셨다. 새벽밥을 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


5시 조금 넘어서 친구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갔다. 새벽 바람이 차가웠지만 공기는 상쾌했다. 아빠께서 손수 차에 태워 데려다 주셨다. 거리는 아직도 캄캄했다. 지나다니는 자동차도 많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 시간에 잠자고 있을 텐데.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중대한 일을 결정하는데 일부라도 채운다는 생각에 마음 뿌듯했다. 친구와 함께 투표소에 도착한 시각이 5시40분. 내가 도우미로 참여할 투표소는 전남대학교 안에 있었다.

밖은 여전히 캄캄했다. 먼저 오신 분들이 마지막으로 투표소 점검을 하고 계셨다. 투표를 하려고 벌써 오는 유권자도 계셨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피곤하고 힘들어 하는데. 이른 새벽부터 투표소를 찾은 분들이 존경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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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도우미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에요. 왼쪽은 친구고 오른쪽이 저랍니다.^^ ⓒ 이슬비


나와 친구가 투표소에서 할 일은 말 그대로 도우미였다. 투표장 입구에서 선거인명부에서 등재번호를 확인하고 번호를 분류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어색했다. 하지만 1시간 정도 하다 보니 마치 오래 전부터 이 일을 했던 것처럼 멘트가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등재번호 알고 오셨어요? 확인해 드릴게요."
"모르시면... 신분증이나 주민등록증 가지고 오셨죠?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번은 들어가셔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돼요. ○번은 들어가셔서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 멘트를 쉴 틈 없이 오전 내내 읊었다. 반복해서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기계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꼭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우리가 일하는 곳은 투표소 입구여서 더 추웠다.

어떤 분들은 "왜 신분증을 검사하냐"면서 언성을 높이고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복도에서 추위에 떨며 고생한다"면서 "난로라도 놔주지"하며 걱정해 주는 분들이 많았다. "수고한다"며 격려해 주시는 분도 계셨다. 그런 분들로 인해 우리 마음이 따뜻해졌다.

투표를 하러 오신 분들이 많아 투표소 입구 복도를 지나 밖에까지 길게 늘어선 줄을 볼 때는 뿌듯했다.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투표 참여 열기가 높다는 생각에 보람도 있었다.

대한민국의 청소년으로서 투표에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틈틈이 '내가 생각하는 후보가 뽑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표소로 텔레파시를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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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도우미 할 때 목에 걸고 있었어요. ⓒ 이슬비


아쉬운 점도 몇 가지 보였다. 투표소를 찾는 길이 안내장에 나와 있지 않고, 또 투표소의 입구와 출구가 알아보기 쉽게 구별돼 있지 않아 불편했다는 유권자들이 여럿 계셨다. 이런 점은 앞으로 개선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나와 친구는 난방이 되지 않고 난로도 하나 없는 투표소에서 새벽부터 온몸을 덜덜 떨면서 일을 했다. 목소리도 떨렸다. 다음에는 우리 같은 도우미와 종사자들을 위한 배려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2014년 지방선거 때부터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5년 후에는 대통령 선거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고쳐져서 투표율이 앞으로 더 올라가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도우미로 일하는 분과 종사자들한테 "수고하세요"라는 한 마디 인사는 꼭 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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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소 안, 투표가 이루어지는 중이에요. ⓒ 이슬비


덧붙이는 글 이슬비 기자는 광주문정여자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대통령 선거 #투표도우미 #전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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