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에서 낮잠 한 번 자고 싶다

시지 <종소리> 제53호를 받고

등록 2013.02.06 09:37수정 2013.02.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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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제 53호 ⓒ 종소리시인회

국어국문학과는 인문학의 으뜸

48년 전인 1965년 3월 초순, 나는 대학교 신입생으로 입학식 다음날 강의실로 갔다. 첫 시간은 당시 국어국문학과 과장이신 정한숙 교수의 강의였다. 정 교수님은 신입생 35명의 이름을 낱낱이 부른 다음 신입생 한 사람 한사람에게 왜 하필이면 국문학과에 입학하였느냐고 물었다. 그날 신입생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다.

10여 명 학생들의 대답을 듣고 난 뒤 정 교수님의 말씀이었다.

"여학생들의 국문과 입학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남학생들의 국문과 선택은 잘못으로 생각한다."

정 교수님은 당신의 체험을 빌어 국문학과를 졸업해야 대부분 중고교 교사, 출판사나 잡지사의 편집자가 대부분으로 그야말로 춥고 배고픈 '굶을 과'라고 말씀하여 뭔가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나를 비롯한 신입생들은 그 첫 말씀에 여간 실망한 게 아니었다.

이어 정 교수님은 우리나라가 조선시대는 청나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말 잘하는 사람이, 해방 후 미군정 때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행세했지만 장차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여러분의 시대가 될 것이라 하여 그 말씀에 박수를 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정 교수님의 말씀대로 그동안 춥고 배고프게 평생 중고교 평교사로 33년을 살아온 뒤 명퇴하고는 지금은 낯선 강원도에서 한 작가로 살고 있다. 40여 년을 서울에서 평생 아파트 청약 한 번 해본 적 없이 미련스럽게 산동네에서 대문도 달지 않고 한 집에서 34년이나 살다가 강원도로 내려왔지만 내가 국어국문학과를 진학한 데는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내 나라 사람으로 인문학의 으뜸은 우리말을 공부하는 국어국문학과라는 신념에는 그제나 이제나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아흔의 시인

몇 해 전(2005년) 한 문인모임에서 재일동포 <종소리> 시인회원들을 만났다. 이분들은 일본에 살면서 우리말과 글을 오롯이 쓰며 회원들의 쌈짓돈을 모아 세 달에 한 번씩 시지 <종소리>를 펴내는데 그때마다 강원도 산골 내 집으로 한번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보내주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 시지에서 애틋한 망향의 사연과 이국생활의 애환을 그린 시를 두 편씩 <오마이뉴스>에 소개해 왔다.

2012년 6월 9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당신들의 시지 <종소리> 50호 발간 기념모임이 있다고 강원산골 노인을 초대하기에 참석했더니 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분들은 당신들이 펴낸 <종소리>의 작품 일부나마 고국에 퍼지는 게 대단한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1923년 경북 영일 출생으로 올해 아흔이신 정화흡 시인은 "죽기 전에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다"는 말씀에 나도 마치 오랫동안 뵙지 못한 집안 어른을 만난 듯 감격했다. 그 어른은 당신의 시집 <낮잠 한 번 자고 싶다>의 뒤표지에 나의 촌평까지 싣고는 꼭 죽기 전에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 소원을 이루었다고 울먹이시는데 나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낮잠 한 번 자고 싶다


                    정화흡

38선
비무장지대에
거적때기를 깔아놓고
낮잠 한번 자고 싶다

텁텁한 막걸리에
얼근히 한 잔 되어
큰 대(大)자로 누워서
코를 골며 자고 싶다

무기 없는 공간인데
무엇이 겁나겠나
뛴들 뒹군들
벌거벗고 춤을 춘들

벌떼에 쏘여도 좋다
사슴의 발꿈치에 채여도 좋다
총포 없는 내 땅에서
낮잠 한번 자고 싶다

망망이랑
야웅이도
함께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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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 정화흡 시인 ⓒ 박도


다음 시는 이번 종소리 제53호 29편의 주옥같은 시 가운데 연장자이신 오향숙 시인의 시를 소개한다.

꽃 무대
            오향숙

오늘은
우리 유치원
우리 손자손녀들이 출연하는
노래와 춤 발표 모임 날

한 걸음 바깥은
겨울의 찬바람이 불어대는데
민들레, 채송화, 진달래 반 어린이들이
아름답게 가득가득 피어난 무대
나풀나풀 나비들도 춤을 추누나

어느 새 배웠느냐,
방울처럼 또랑또랑 우리 말소리
사나운 칼바람 헤치고
민족의 얼 지켜온 우리의 긍지
풍선처럼 크게크게 부풀어 올라라

아롱다롱 우리 옷
무지개처럼 곱게 입고
흥겹게 두드리는 북소리, 꽹과리소리에
대를 이어 가꾸어온 우리의 자랑
감격의 눈물로 쏟아지누나

얼씨구절씨구 바라춤에
우리 어깨도 저절로 으쓱으쓱
멋지게 돌리는 상모 춤에
"좋다~! 좋지~!"
장내는 기쁨의 도가니로 끓어 번지네

좋구나, 꽃 무대
우리 노래, 우리 춤
오랜 세월 잡힌 주름 활짝 펴이네
창창한 미래가 환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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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만난 시인(왼쪽부터 오향숙 시인, 필자, 김지영 시인) ⓒ 박도


#종소리 #재일시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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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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