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강국' 리투아니아, 날벼락 맞았다

[해외리포트] 우키오 은행 법정관리와 농구팀 잘기리스의 운명

등록 2013.02.16 10:22수정 2013.02.16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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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굳게 닫힌 우키오 은행 내부를 시민 한명이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고 있다. ⓒ 서진석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전세계가 들끓던 지난 12일 오후, 리투아니아 언론의 관심은 우키오 은행(Ūkio bankas)의 법정관리에 모아졌다. 1989년 설립돼 현재 러시아 출신의 사업가인 블라디미르 로마노프가 최대주주인 이 은행은 리투아니아에서 6번째로 큰 은행이다. 리투아니아 중앙은행은 우키오 은행이 조직을 부풀리고 사업을 확장하는데 투명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해왔으며 실제로 신고한 것보다 유동자산의 금액이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판단해 은행의 영업정지와 함께 정부에서 구성한 임시운영단을 긴급 배치했다.

우키오 은행의 운명은 6일 동안 이 은행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시행된 후 결정이 나지만, 은행 이용객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카드 거래도 안 되고 인터넷 뱅킹도 금지돼 사람들은 은행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고 은행 내부에서 남은 업무를 처리하는 직원들은 침묵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가장 큰 문제를 겪는 이들은 은행계좌로 연금을 받는 노년층들로 당장 생활에 필요한 자금을 인출할 길이 없게 되자 눈물로 하소연하기도 했다. 현재 리투아니아에 유학을 온 한국학생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이 은행과 거래를 하고 있어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우키오 은행 법정관리... 잘기리스 농구단의 앞날은?

우키오 은행 법정관리의 불똥은 다른 곳으로도 튀었다. 바로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잘기리스(Žalgiris) 농구단이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이게 된 것. 우키오 은행은 잘기리스 농구팀을 운영하는 잘기리스 클럽 지분의 75%를 소유하고 있다.

은행 법정관리 발표 이후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잘기리스 농구단은 이미 월급체불이 시작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재정으로 몇 달을 버티게 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리투아니아 정부 역시 이 농구단을 살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리투아니아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이 농구단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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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잘기리스의 명성도 막지 못한 우키오 은행의 몰락' 리투아니아 최대 일간지 레투보스 리타스가 집중보도한 우키오 은행 사태로 불거진 잘기리스 농구단의 운명. 사진에 대통령과 잘기리스 농구선수단이 기념촬영한 모습이 보인다. ⓒ 레투보스 리타스


이 농구단이 어떤 곳이길래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리투아니아에서 농구는 단순한 운동종목 중 하나가 아니다.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농구는 '제2의 종교'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리투아니아 농구단이 참여하는 국제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거리가 한산해지고, 사람이 모일만한 광장에는 대형전광판이 설치돼 시민들이 모여 리투아니아 대표팀의 선전을 응원한다.


리투아니아 농구단은 이미 여러차례 국제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 작은 나라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데 공헌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 리투아니아인들이 농구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농구가 20세기 리투아니아인들의 민족자립과 독립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에 농구가 처음 소개된 것은 1차 대전 이후 리투아니아가 잠시 독립했을 당시로 알려져 있다. 독립 초기 리투아니아에 농구를 보급시킨 대표적인 인물은 1933년 뉴욕에서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까지 대서양 횡단 비행을 시도했던 조종사였던 스테포나스 다류스(Steponas Darius).  그는 1907년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조국이 독립한 직후인 1920년 다시 귀국해 농구, 야구 등 당시 리투아니아에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선진스포츠를 보급하는 데 주력했다. 다류스는 농구의 이론과 규칙이 설명된 책자를 발간해 리투아니아 젊은이들 사이에 농구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27년 다시 미국에 건너간 그는, 또다른 리투아니아 출신 조종사인 스타시스 기레나스(Stasys Girėnas)와 함께 '리투아니카'라는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서 카우나스에 이르는 대서양 횡단을 시도하지만 목적지까지 불과 600 km를 남기고 추락사하고 만다. 그들은 리투아니아 현대사 최대의 영웅으로 추대되어 현재 리투아니아 지폐에도 그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을 정도다.

리투아니아에서 농구의 인기가 최고조에 이른 것은 1937년 이웃나라 라트비아 리가에서 열린 유럽농구선수권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부터다. 그 경기는 리투아니아가 최초로 참가한 국제경기로 리투아니아가 우승을 차지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리투아니아가 우승해 세계 농구계를 발칵 뒤집었다. 리투아니아는 박빙의 승부를 펼치며 이탈리아를 앞서고 있었으나 경기 종료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리투아니아가 벌점을 받아 이탈리아에게 3번의 공격기회를 넘겨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단 한 번의 공격도 성공하지 못했고, 리투아니아가 결국 24:23 라는 기적 같은 스코어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 장면은 유럽농구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손꼽히고 있다.

리투아니아에 너무 특별한 운동 '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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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오 은행 영업정지 이후 잘기리스 농구단의 운명은 공기 중으로'... 리투아니아 일간지 15min 보도내용. ⓒ 15min


그 이후 농구는 언제나 리투아니아 민족을 대표하는 운동으로 자리잡았고 1944년 창단된 잘기리스 농구단은 리투아니아의 농구를 이끄는 대명사가 되었다. 잘기리스팀은 소련 연방 시절 전소련농구선수권대회에서 총 다섯 번 승리를 거머쥐었고, 80년대 들어서는 세차례나 소련 전체에서 선발된 선수들로 구성된 CSKA 모스크바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 인해 많은 리투아니아 농구선수들이 리투아니아인들의 민족의지를 북돋는다는 이유로 소련 농구계에서 퇴출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 리투아니아인들이 농구를 하면서 조국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농구는 특별한 존재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역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억된다. 당시 소련 농구팀은 결승전에서 미국을 누르고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한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서 농구장을 누비던 소련대표단들 중에서 4명이 리투아니아 잘기리스 출신 선수들이었고, 소련 대표팀이 획득한 스코어 82점 중 62점이 바로 그 리투아니아 선수들의 활약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소련의 이름으로 금메달을 받기 위해서 시상대에 오른 리투아니아 선수들을 바라보는 리투아니아인들의 심정은 아마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따야했던 손기정을 보던 우리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4년 뒤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올림픽은 리투아니아가 최초로 소련이 아닌 독립국으로 참가한 올림픽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동메달에 머무르고 말았다.

당시 서울 올림픽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볼데마라스 호미츄스, 리마스 쿠르티나이티스, 아르비다스 사보니스, 샤루나스 마르츌료니스 이 네 명의 선수들은 리투아니아의 영웅이 되었고, 독립 이후 정계에 진출하거나 리투아니아 농구팀을 대표하는 등 리투아니아의 정치와 스포츠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렇게 리투아니아의 농구사를 써내려간 농구단이 현재 우키오 은행 사태로 주목을 받고 있는 잘기리스 농구단이다. 잘기리스는 1410년 리투아니아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점렴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독일기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지역의 이름으로 (폴란드어식인 그룬발드 전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리투아니아는 독일의 동방진출을 막는 중동부 최고 강대국으로 떠오른다.  이후 리투아니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잘기리스라 명명한 농구단은 명실공히 세계 무대를 누비면서 리투아니아인들의 위대함을 알린 장본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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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기리스 농구선수를 활용한 우키오 은행의 광고판 ⓒ 서진석


2011년에는 잘기리스의 거점도시 카우나스에서 유럽농구선수권대회가 열렸고, 그 대회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잘기리오 아레나' 경기장은 현재 잘기리스 농구단의 주 활동무대가 되었다.

2012년까지 리투아니아 국무총리를 역임한 안드류스 쿠빌류스는 얼마전 정치에세이집 <왜 리투아니아에서는 농구가 정치보다 아름다운가>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그 책 말미에 "리투아니아 농구는 야망이 끊이지 않는 반면, 리투아니아 정치는 유럽연합 가입 이후 별다른 야망을 상실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리투아니아의 현 시점에서 농구가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표현한 이야기다. 그런 차원에서 쿠빌류스는 "농구는 종교이기 전에 리투아니아의 정치 그 자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어차피 은행의 거취야 주말을 기점으로 결정이 되겠지만, 리투아니아 농구의 미래는 불투명한 상태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은 법정관리에 들어간 우키오 은행과 은행 대주주 로마노프의 미래보다 잘기리스 농구단에 대한 관심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우키오 은행 법정관리 파장, 어디까지 미칠까

우키오 은행의 문제는 리투아니아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우키오 은행은 스코틀랜드 축구팀 '하트 오브 미들로디언 FC'의 운영권도 가지고 있어 스코틀랜드 내에서도 이 사태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관계자들은 스코틀랜드 축구팀의 지분은 우키오 은행이 직접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 은행이 만든 별도의 투자기업인 UBIG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사태와 연관성이 없다고 축구팬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하지만 로마노프는 UBIG의 총회장이며 에딘버러에 위치했던 우키오 은행 지점은 작년 8월 철수했고, 당사자 로마노프는 현재 행방마저 묘연한 상태이다. 13일 현재 이 우키오 은행은 국영화나 파산선고보다는 리투아니아 지방은행 중 하나인 샤울례이 은행과 합병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회생을 모색하고 있다. 

2009년 예고 없이 파산한 리투아니아 국영항공사, 2011년 스노라스 은행에 이어 2013년 우키오 은행까지 리투아니아에는 자금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부실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 리투아니아 관료들이 과연 이번엔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 국내외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리투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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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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