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오 은행 영업정지 이후 잘기리스 농구단의 운명은 공기 중으로'... 리투아니아 일간지 15min 보도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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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농구는 언제나 리투아니아 민족을 대표하는 운동으로 자리잡았고 1944년 창단된 잘기리스 농구단은 리투아니아의 농구를 이끄는 대명사가 되었다. 잘기리스팀은 소련 연방 시절 전소련농구선수권대회에서 총 다섯 번 승리를 거머쥐었고, 80년대 들어서는 세차례나 소련 전체에서 선발된 선수들로 구성된 CSKA 모스크바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 인해 많은 리투아니아 농구선수들이 리투아니아인들의 민족의지를 북돋는다는 이유로 소련 농구계에서 퇴출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 리투아니아인들이 농구를 하면서 조국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농구는 특별한 존재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역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억된다. 당시 소련 농구팀은 결승전에서 미국을 누르고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한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서 농구장을 누비던 소련대표단들 중에서 4명이 리투아니아 잘기리스 출신 선수들이었고, 소련 대표팀이 획득한 스코어 82점 중 62점이 바로 그 리투아니아 선수들의 활약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소련의 이름으로 금메달을 받기 위해서 시상대에 오른 리투아니아 선수들을 바라보는 리투아니아인들의 심정은 아마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따야했던 손기정을 보던 우리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4년 뒤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올림픽은 리투아니아가 최초로 소련이 아닌 독립국으로 참가한 올림픽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동메달에 머무르고 말았다.
당시 서울 올림픽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볼데마라스 호미츄스, 리마스 쿠르티나이티스, 아르비다스 사보니스, 샤루나스 마르츌료니스 이 네 명의 선수들은 리투아니아의 영웅이 되었고, 독립 이후 정계에 진출하거나 리투아니아 농구팀을 대표하는 등 리투아니아의 정치와 스포츠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렇게 리투아니아의 농구사를 써내려간 농구단이 현재 우키오 은행 사태로 주목을 받고 있는 잘기리스 농구단이다. 잘기리스는 1410년 리투아니아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점렴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독일기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지역의 이름으로 (폴란드어식인 그룬발드 전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리투아니아는 독일의 동방진출을 막는 중동부 최고 강대국으로 떠오른다. 이후 리투아니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잘기리스라 명명한 농구단은 명실공히 세계 무대를 누비면서 리투아니아인들의 위대함을 알린 장본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