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탈로치에 대한 오해와 이해

그는 실천적 교육운동가였습니다

등록 2013.02.24 11:27수정 2013.02.2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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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탈로치를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은 불쌍한 고아들을 보살피고 거두어 가르친 성자(聖者)로 기억합니다.

대학시절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선생님을 꿈꾸는 예비교사들 역시 교육철학이나 교육사 또는 교육방법론 강좌를 수강할 때 페스탈로치를 직관과 자발성의 원리에 입각해 노작교육과 지덕체의 조화로운 발달을 추구한 전인교육자로 학습하곤 합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페스탈로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방해물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한국 사회에서 페스탈로치에 대해 고정관념을 낳은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페스탈로치는 대부분 그런 사람으로 묘사되었고 또한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어떤 선생님을 가리켜 '페스탈로치 같은 분'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아이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헌신하는 모습을 이르는 말입니다.

오래 전 서울시교육청에 들어갔을 때 입구 안쪽에도 그런 글이 새겨진 내용을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희생과 헌신의 표본으로 부각된 이미지를 '사표(師表)라는 이름 아래 교사들 머릿속에 각인하려는 국가주의 교육의 잔영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페스탈로치는 교사이자 교육운동가로서 페스탈로치의 중요한 부분을 빠뜨린 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내전 상태인 스위스 혁명(1798)이라는 변혁의 와중에서 페스탈로치는 '교육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됩니다.

당시 봉건적인 질서와 낡은 제도 속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던 민중들을 어떻게 하면 국가 사회적 억압과 봉건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개인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가게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교사로서 진지하게 고민한 부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민중교육을 실천한 페스탈로치는 인간은 누구나 인간성의 능력이라는 씨앗을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고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귀한 머리로 상징되는 지적 능력과 가슴으로 상징되는 도덕적 능력 그리고 손으로 상징되는 신체적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한 능력의 씨앗들을 고루 키워 인격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조화로운 전면적 인간발달론, 바로 전인교육론을 페스탈로치는 역설하였습니다.


또한 루소의 열렬한 추종자로서 <에밀>(1762) 등 루소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탓이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선함에 기초하여 교육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 나아가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교육운동가로서의 실천적인 삶을 주목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가 종사하고 있는 노동을 통해 세계 인식의 기초를 찾아야 하며 머릿속의 공허한 이론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노동 그 자체로부터 자신의 견해를 이끌어 내야 한다"며 생활 속 교육은 노동을 중심으로 집약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렇듯 페스탈로치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은 마치 헬런 켈러나 아이슈타인에 대해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편협한 견해와도 비슷한 모습입니다. 우선 헬런 켈러의 경우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헬런 켈러 여사에 대한 이미지는 3중 4중의 장애를 극복한 불꽃 같은 의지의 화신으로 회자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헬런 켈러에 대한 진정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뿐 아니라 미국 좌파 정당 사회당 당원으로서 정치·사회적 약자나 소수집단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고 결국 미국이라는 국가권력의 부당한 모함 속에서도 꿋꿋이 사회정의를 위해 불꽃처럼 살았던 '사회주의자로서의 헬런 켈러의 삶'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상대성 이론으로 20세기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해 낸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자본주의 체제의 무정부성이 갖는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를 신봉했던 진보적인 사회운동가였습니다. 그는 히틀러의 전체주의를 혐오했고 반전평화를 부르짖은 인도주의 과학자였으며 간첩혐의로 끊임없이 미 연방수사국 FBI로부터 사상이 불온한 위험 인물로 분류되어 인생의 말년에까지 지속적인 감시와 미행을 당했던 인물입니다.

우리는 그다지 분단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지만 한국이라는 분단 상황은 역사적 인물을 그렇듯 편협하게 가르쳐 왔고 일정 부분 대중의 머릿속에 고정관념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사례의 극단적인 표본으로 '악법도 법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을 들 수 있습니다.

준법정신을 강조하면서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나 많은 어른들이 아직도 그렇게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탓인지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격언을 그대로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알려졌듯이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자신의 사상에 대해 그런 격언이 담긴 저서를 남긴 적이 없습니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언행과 사상을 잘 수록한 제자 플라톤의 저서 원전 어디에서도 그런 말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영국의 수리철학자 러셀(B. Russell)은 이를 두고 후세의 철학자들이 만들어 낸 농간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시 페스탈로치로 돌아갑시다. 어린 시절 목사였던 할아버지의 감화를 받아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페스탈로치는 루소의 <에밀>을 읽으면서 궁핍에 절은 생활로 허덕이는 시회 기층 민중을 위해 변호사가 되려고 법률 공부로 뜻을 바꾸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공부도 건강상의 이유로 지속할 수 없었으며 마침내 페스탈로치는 18세기 낡은 질서와 봉건적인 제도 속에서 가장 고통 받던 민중인 농민들을 위해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을 단념하고 농부, 농업경영자로서 2년 간 수업을 거친 뒤 결혼을 통해 아내와 함께 농촌 현장으로 새로운 농업 기술을 보급하고 농사개량과 경영합리화로 농촌의 사회경제 개혁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페스탈로치는 경험부족과 재정난으로 농촌활동에 실패하게 되어 기층 민중인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향상이라는 목표는 좌절을 겪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그 좌절에서 교훈을 얻습니다. 민중의 외적 환경과 조건이라는 직접적인 변혁을 꾀하기보다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변화, 곧 교육의 힘을 통해 사회변혁을 통절히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페스탈로치 자신의 교육사상을 실천하는 무대이자 노동을 중요시하는 최초의 실험학교가 세워진 노이호프(Neuhop)에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일절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물교육과 직접 체험을 통해 교육을 실천했던 슈탄츠(Stanz)에서 행했던 교육운동은 이후 유럽의 유아교육과 초등교육에 정신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육철학을 달리 하던 봉건적인 일부 교장들, 세속적인 학부모와 끊임없는 갈등 끝에 배척을 받고 학교에서 쫓겨났던 부르크도르프(Burgdorf)에서는 뜻을 같이 하는 동료교사들과 함께 '인도주의 교육자'로서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됩니다. 그 결과 유럽에서 페스탈로치의 교육철학과 교육방법은 크나큰 반향과 함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교육실천 장소인 이페르텐(Iferten)시에서 초빙된 교육자로서 페스탈로치는 봉건적인 질서와 지시와 통제 그리고 체벌이 난무했던 억압적인 교육제도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자발성의 원리에 기초한 근대교육의 방법을 펼침으로써 유럽 전체 나아가 미국으로부터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전 유럽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페스탈로치 학교를 참관하고 교육방법을 배우기 위한 행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페스탈로치 교육철학은 봉건 질서가 해체되던 격변의 시기에 여전히 낡은 제도와 인간을 억압하는 굴레 속에서 고통 받던 민중을 해방시켜 개인으로서 행복한 인간을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교육을 통해 사회변혁을 꿈꾸었던 위대한 교육사상가이자 실천가였던 페스탈로치는 전근대적인 학교질서를 해체하려고 투쟁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학교장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고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나아가 스스로 대안학교를 세워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교육의 참모습을 실천하려고 헌신적으로 활동하였고 낡은 시대질서에 맞서 용기 있게 투쟁했던 진정한 교육운동가였습니다.

교욱역사상 최초로 교직단체를 조직하여 교권을 위한 선한 싸움을 벌였던 페스탈로치는 1808년 '스위스 교육협회'(Die Schweizerische Gesellschaft der Erziehung)를 창설하여 회장으로 추대되는데 이는 오늘날 스위스 교원노조의 기초가 된 교사조직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페스탈로치를 '교원노조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해방 후 봉건 잔재와 식민 잔재를 청산한 역사적 경험이 없으며 40년 넘게 지속된 반공군부 독재의 잔재 역시 말갛게 씻어낸 적도 없습니다. 대한민국 탄생 이래로 1949년 '반민특위'의 좌절과 백범 김구의 죽음을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단 한 번도 청산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공권력 앞에서 29만원밖에 없다고 강변하는 뻔뻔함이 그간의 한국사회를 반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시대, 교육의 역할과 교사의 역할은 더없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피를 흘리지 않고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기이자 사회적 힘이며 나아가 인간의 영혼을 맑게 정치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역사적 격변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페스탈로치의 그 진정한 면면을 다시 새롭게 조명해 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겠습니다.
#페스탈로치 #교육운동가 #교원노조 #헬렌켈러 #아이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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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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