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인사청문회에서 5·16을 '혁명'이라 할 건가

[주장] 혁명과 군사반란 구분하지 못하는 장관, 자격 있을까

등록 2013.02.28 10:41수정 2013.02.2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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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7월 14일 프랑스 인민들은 루이 16세 폭정을 상징하는 '바스티유'를 점거한다. 루이 16세는 '폭동'이라 칭했지만, 실은 '인민혁명'이었다. 농민들은 지주에 맞서 봉기했다. 귀족과 부르주아는 8월 4일 봉건체제와 1/10세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유·평등·사유재산불가침성·폭압에 저항할 권리를 천명한 사람과 인민권리 선언을 천명하지만 루이 16세는 거부했다. 하지만 파리 인민들은 다시 저항해 베르사유로 행진한다. 루이 16세는 잡혔고, 1793년 1월 21일 처형당한다. 역사는 이를 '프랑스대혁명' 또는 '1789년 혁명'이라 부른다. 프랑스혁명은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종말이었다.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투표함 바꿔치기' 등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인민은 일어났다. 경남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이 다니던 김주열 학생도 참가했다. 하지만 그는 28일 만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전국에 혁명의 불꽃이 타올랐다. 14년 동안 독재자로 군림했던 이승만은 물러났다. 우리는 이를 4·19 혁명이라 부른다.

군사정변이 혁명이라고? 

이처럼 '혁명'이란 왕정·봉건·독재라는 구체제를 인민의 힘으로 무너뜨려 인민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물론 혁명이 반드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대혁명 역시 루이 16세를 제거했지만 또 다른 폭정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4·19 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1년 만에 소장 박정희는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5·16 군사반란(쿠데타)을 자행했다.

쿠데타 coup d'État

무력에 의해 정권을 빼앗는 일. '국가에 대한 일격'이라는 뜻이다. 혁명이 피지배계급에 의한 반란인 데 비해 쿠데타는 일부 지배권력이 자기의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수행되며, 권력이동은 지배계급 내부의 수평이동에 불과하다. 쿠데타는 군대, 경찰, 그밖의 무장집단 등에 의해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며 정권탈취 후에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계엄령 선포, 언론 통제, 반대파 숙청, 의회의 정지, 헌법 개폐(改廢) 등의 조치를 취한다. 일반적으로 쿠데타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을 국가적인 규모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위기, 기성 정치권의 무능, 의회의 정상적인 기능 마비 등이며, 또 이에 대해 국내에 유일한 무력조직으로서의 군대나 경찰 및 이를 지휘하는 야심적인 정치가나 장군 등의 존재이다.

박정희는 군대를 동원한 민주시민이 뽑은 민주정권을 무너뜨렸다. 명백한 군사반란이다.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에 대한 기본인식이 있다면 결코 5·16 군사반란을 혁명이라 부를 수 없다.


하지만 박정희는 1969년 3선 개헌을 하면서 헌법 전문에 "4·19 의거와 5·16 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라고 했다. 4월 혁명을 '의거'로, 군사반란을 '혁명'으로 적었다. 또 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 헌법 전문에도 "4·19 의거 및 5·16 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적었다.

자신이 자행한 군사반란은 혁명으로, 민주시민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의거로 표기함으로써 민주헌정을 훼손한 자신의 죄를 반복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군사정변을 혁명으로 규정한 것은 민주공화국에 대한 모독이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도 국회의원 시절에 5·16 군사반란을 "구국의 혁명"이라 불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임명한 장관 후보자, 그것도 '법과 질서'를 강조해야 하는 법무부 장관 후보자 황교안은 자신이 쓴 책에 5·16 군사반란을 '혁명'이라 적었다. 5·16 군사반란을 혁명으로 규정한 이가 대통령이 되고, 법무부 장관이 된 것은 통탄할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황교안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5·16 군사반란과 10월 유신쿠데타에 대한 역사적·법률적 평가를 묻는 질문에  "역사적·정치적으로 다양한 평가가 진행 중이므로 법무부 장관 후보자 신분에서 그에 대해 개인적 견해를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선> <동아>도 '군부 쿠데타'로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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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1960년 5월 16일 호외를 발행했다. 그리고 '혁명'이 아니라 '군부쿠데타'로 적었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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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역시 5월 16일 호외를 발행해 '군 쿠데타' 발생이라고 적었다. ⓒ 동아일보


황 후보자는 지난 2009년 3월에 펴낸 <집회 시위법 해설>의 머릿말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역시 4·19 혁명 이후 각종 집회와 시위가 급증하여 무질서와 사회불안이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 5·16 혁명 직후 제정되었다"며 5·16 군사반란을 4·19 혁명에 동등하게 평가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국 신문들은 이를 두고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로 규정했다.

당시 신문들이 5·16을 혁명이 아니라 군부 쿠데타로 표기한 것은 군부가 무력을 동원하 방송을 장악하고, 정권을 탈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 이념을 떠나 군부가 군대를 동원한 그 자체만으로 혁명으로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은 '혁명'으로,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쿠데타'로 보려는 시각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민주공화국 장관 후보자가 '개인적 견해'를 운운하면서 밝히지 않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법을 공부한 사람이 혁명과 군사반란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일 아닐까. 법이란 공평과 정의다. 정의가 무너진 법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법과 질서를 그 어느 누구보다 강조한 황 후보자 아니었던가. 그런데 헌법질서를 무너뜨린 군사반란을 혁명이라 부르고, 지금도 그 견해를 견지하는지에 대한 질의에 "개인적 견해"라고 말하는 것은 민주공화국 장관의 자격과 거리가 멀다. 개인 자격 운운하려면 장관이 왜 되려고 하는가.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혁명을 "인류의 진보를 위한 힘"이라며 "혁명은 사회에 좀더 높은 윤리적 토대를 실현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단계"로 해석했다. G.W. F.헤겔은 혁명을 인간운명의 완성으로 생각했고, 혁명지도자들은 개혁을 부추기고 실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로 봤다.

칸트와 헤결의 혁명관에 따르면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더 높은 윤리적 토대를 마려하지도, 인간 운명의 완성을 이끈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박정희 독재 18년은 대한민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고, 자신을 비판하는 정치세력을 잡아넣거나, 죽였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이를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가 끝까지 '5·16 혁명'을 포기할 수 없다면 깨끗하게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장관직을 원하지 않는 게 맞다. 그게 정의다.
#황교안 #5·16 #혁명 #군사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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