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지 표지 모습.이윤재 선생이 편집하여 발행함
조선어학회
그렇다면 민족의 영혼을 담는 그릇인 우리말을 유지하여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히 보존하는 투쟁을 전개하다가 침략자에게 희생을 당한 그를 대한민국과 우리국민이 잘 선양을 하였는가? 답은 그렇지를 못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장 크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묘소이다. 현재 그의 묘소는 불행하게도 남의 땅에 있다. 남의 땅에 이윤재 선생을 계시게 함은 선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이에 필자는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제자리를 잡지 못한 과정을 알리고자 한다.
이윤재 선생의 아들 이원갑이 1943년 12월 초에 아버지를 뵈러 함흥감옥에 면회를 갔다. 간수가 머뭇거리다가 이윤재 선생의 사망을 알려 주었다. 이원갑은 아버지를 화장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유골함에 담아가지고 경기도 광주군 방이리에 있는 집으로 모셔왔다. 이윤재 선생이 생전에 개간하여 만든 과수원 근처의 야산(방이리 산 28번지)에 봉분도 없이 가매장하였다.
해방 뒤 함흥감옥에서 나온 이극로 등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동지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봉분도 없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조선어학회는 제대로 이윤재 선생을 안장하려고 앞장섰다.
1946년 4월 6일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의 사회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지금의 서울 송파구 방이동) 유족 주택 부근 산상에서 고 이윤재 선생 이장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봉분 옆에 묘비도 세웠다. 묘비의 3면에는 순 한글로 이윤재 선생의 업적이 기술되어 있다. 이장식 이후에야 이윤재 묘소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사업을 하던 셋째 사위가 그만 사업의 실패로 장인 이윤재 선생 묘소와 집터를 남에게 매도하고 말았다. 6·25전쟁 때 대구에 거처를 정한 셋째 사위는 장인이 남긴 산과 집터를 매도하여, 거기서 남은 돈을 바탕으로 장인의 유골을 수습하였다.
1973년 봄에 셋째 사위는 장인의 묘소를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 산 48번지(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동)로 다시 이장하였다. 현재 마천산 기슭에 안장되어 있다. 다사읍은 대구에서 변두리에 있어 이윤재 선생의 묘소로 부적당한 장소였다. 더 큰 문제는 그 사위가 또 사업에 실패하여 장인의 묘소까지 다시 남에게 매도한 데서 발생하였다. 묘소라도 분할 측량을 하여 온전히 남겨두었어야 했는데 그렇게도 못하였다. 그 뒤 사위는 장인의 묘소도 지키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현재는 외손자가 묘소를 돌보고 있으나, 임야 주인은 이윤재 선생의 묘소가 이장되기를 바라고 있다. 필자가 알아보니 외손자도 건강이 좋지 못해 외할아버지의 묘소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해 2월 필자가 선생의 묘소를 찾아갔을 때, 무덤 주변을 멧돼지가 파헤쳐 놓아 보기에도 민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