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87세 일기로 타계

쇠퇴하던 영국을 '대처리즘'으로 바꾸려 했던 최초의 여성 총리

등록 2013.04.09 09:26수정 2013.04.0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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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서거를 보도하는 영국 BBC ⓒ BBC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8일 밤(한국시각) 뇌졸중으로 타계했다. 향년 87세.

대처 전 총리의 대변인 팀 벨 경은 성명을 통해 "대처 전 총리가 뇌졸중으로 투병 중 평화롭게 숨졌다고 가족들이 밝혔다"며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매우 슬프다"고 발표했다.

영국 버킹엄 궁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대처 전 총리의 사망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며 "여왕이 대처의 유가족들에게 개인적으로 애도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유럽을 순방 중이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대처 전 총리의 서거 소식을 전해듣자 프랑스 방문을 취소하고 긴급 귀국을 결정했으며, 총리실 대변인을 통해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총리,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고 애도를 표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성명을 통해 "전 세계는 위대한 자유의 투사를 잃었고, 미국은 진정한 친구를 잃었다"며 "대처 전 총리의 유족과 영국 국민에게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이 국장에 준해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치러질 것이며 시신은 화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장은 통상 군주에게만 허락되나 국가적 존경을 받는 인물이 숨졌을 경우에도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의 트라팔가 해전을 이끈 넬슨 제독,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꺾은 웰링턴 장군 등에 이어 가장 최근에는 1965년 윈스턴 처칠 전 총리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졌다.


식료품상의 딸, 영국 최초 여성 총리가 되다

1925년 영국 런던 북부의 그랜덤에서 식료품상의 딸로 태어난 대처의 결혼 전 이름은 마거릿 힐다 로버츠였다.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는 식료품상에 만족하지 않고 지역 정치에 뛰어들어 그랜덤 시장까지 지낸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선거 운동을 도우며 어린 시절부터 정치를 접하게 된 대처는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해 화학과를 졸업한 뒤 데니스 대처와 결혼했다. 법률을 공부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대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기도 했다.

1959년 보수당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한 대처는 보수적이고 남성 위주의 영국 정계에서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재무부 장관, 에너지 장관, 교통부 장관, 교육부 장관 등을 거치며 역량을 발휘했다.

자신을 발탁한 히스 내각이 정권을 잃었지만 대처에게는 오히려 엄청난 기회가 되었다. 정권을 빼앗긴 책임을 물어 히스의 제치고 보수당의 당권을 차지하며 영국 최초로 여성 당수가 되었고, 내친김에 1979년 총선거에서 보수당의 승리를 이끌며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에 올랐다.

정권을 잡은 대처는 화려한 제국의 위세를 잃고 쇠퇴하던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나섰다. 노동당의 국유화, 복지정책을 내리고 철저한 긴축정책과 시장주의 도입, 금융시장 활성화 등으로 짜인 이른바 '대처리즘'으로 영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대외적으로는 아르헨티나와의 포틀랜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영유권을 지켜냈고, 당시 세계 최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과 밀착하여 영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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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 시절의 영국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 '빌리 엘리엇'의 뮤지컬 한 장면 ⓒ 워킹 타이틀


하지만 독단적인 정부 운영으로 공공 분야에 대한 각종 국고 지원을 대폭 삭감하며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고, 영국 경제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정책은 내놓지 못했다는 비판이 엇갈렸다.

대처의 정치 인생 최대의 고비는 적자에 허덕이던 일부 국영 탄광을 폐업하고 수만 명의 탄광 노동자를 해고하겠다는 계획에 반발하여 1984년 일어난 전국적인 탄광 파업이었다.

대처는 파업을 강경 진압하고 매스컴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여론몰이에 나섰다. 결국 탄광 노조가 파업을 해제하면서 승리를 거둔 대처는 더욱 강력하게 정책을 추진했고, 당시 시대상은 영화 <풀 몬티> <브래스드 오프> <빌리 엘리엇> 등에도 잘 그려져 있다.

대처로 투영되는 대영제국을 향한 그리움

대처는 1983년, 1987년의 총선에서 연거푸 승리하여 3선에 성공하였으며 영국 역사상 최다임기를 역임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실업률과 물가가 상승하며 대처의 경제 정책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갈수록 커져갔다. 재정적자까지 겹치자 대처는 '인두세'를 꺼내 들었고,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확산됐다.

또한 유럽공동체 가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당 지도부의 비판에 직면하며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대처는 결국 1990년 자진 사임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이듬해 하원에서도 떠난 대처는 전 세계를 돌며 강연 활동을 벌였고 대학 총장도 지냈다. 하지만 10여 년 전부터 뇌졸중과 치매 증세가 악화된 대처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대외 활동을 자제하며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처는 누구보다 강해보이고 싶었던 지도자였지만 파리-다카르 랠리에서 실종됐던 아들이 구조됐을 때 눈물을 보였던 평범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또한 아들의 구조 비용을 모두 사비로 지불했을 만큼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대처를 향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지만 침체일로에 놓였던 영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해가 저물고 있던 영국은 어쩌면 화려했던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그리워하며 그녀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기대고 싶었던 것 아닐까.
#마거릿 대처 #대처리즘 #영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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