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료는 우파의 정책이다

등록 2013.04.18 17:10수정 2013.04.1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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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경색의 국면에서도 자신의 정치색을 우렁차게 내뿜는 남녘의 정치인이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진주의료원과 관련하여 자신의 정치적 방향성에서 중요한 일보를 내딛었다. 경영악화를 내세우고 진주의료원의 폐업을 천명하더니 그 책임을 병원노조(강성노조, 귀족노조)에 전가하였다. 폐업을 내걸고 정부에서 운영자금을 더 지원받을 구상인지 아니면 엉뚱한 정책을 관철시켜 거국적인 인물이 되고자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공공의료는 원래 수지를 맞추려는 사업이 아니므로 폐업의 이유는 전체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경영실태나 부채사유는 신문지상에 자세하게 보도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공공의료는 박정희의 좌파정책이라는 홍 지사의 발언에만 주목해보겠다. 그의 발언의도가 궁금하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탄생하여 마치 박정희를 부활이라도 시키려는 시대에 박정희가 펼친 좌파정책을 털어냄으로써 박정희를 순수화하자는 것인가! 공공의료 정책이 박정희다운 정책이 아니니까 이제 찍어내야 한다는 것인가! 뉴라이트 역사인식에서 만연한 근본주의적인 난독증을 또다시 만나게 된다. 박정희의 역사에서 제거하고 극복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쿠데타, 유신, 긴급조치, 조작사건, 사법살인, 노동탄압, 인권침해이지 의료보험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보시라. 박정희의 업적에서 공공의료를 제거하자고 주장한다면 사실상 박정희 추종자들을 위압적인 극우파로 전락시키는 것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노동자의 단체행동, 적정수준의 일자리, 교육, 의료혜택, 주거시설, 수입 등을 사회적 권리라고 부른다. 이러한 권리가 인권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사회권의 발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은 급진파들의 논리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우파들의 사회연대사상이나 가톨릭교회의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1891)과 같은 사회교리가 큰 기여를 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회권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사회정의의 기준으로, 혹은 산업평화나 사회방어의 수단으로 생각한다. 이는 정치색에 관계없이 사회권이 모두에게, 모두의 정치적 목표에 유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늘날 정치적 논쟁도 사회권이 권리인지 아닌지에 있지 않고 그 보장의 범위를 둘러싸고 벌어질 뿐이다. 결국 사회권을 와해시킨다면 사회평화도 가능하지 않다.

박정희의 공공의료를 논하는데 독일에서의 사회권의 역사를 언급할만하다. 독일에서 사회권의 탄생은 조금 과장하면 보수정치가인 비스마르크의 작품으로 축약된다. 비스마르크는 1875년에 출범한 독일사회민주당(좌파정당)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악명 높은 이중정책(채찍과 당근)을 구사했다. 독일의회는 1878년 사회주의자금압법이라는 체제보호법를 제정하여 사회민주주의자나 좌익혁명가들을 처벌하였다. 1890년 폐지할 때까지 대략 1500명의 사회민주당원과 노동자들을 이 법으로 감옥에 보냈다. 동시에 비스마르크는 노동자의료보험법(1883), 산재보험법(1884), 폐질노령보험법(1889) 등 일련의 사회법을 도입하였다. 물론 이러한 법들에 대해 사회보험으로서 노동자의 부담이 과중하다는 비난이 따라다녔지만 보수적인 비스마르크가 보험법을 주도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법의 제정과정에서 보여준 정파들의 태도는 흥미롭다. 공제조합을 추진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이윤의 감소를 우려한 기업가들은 당연히 이 법에 반대하였고, 가톨릭 중앙당은 사회보험이 이웃사랑이라는 자발적 의무를 침해한다며 반대했고(이점은 오늘날 미국보수기독교들의 시각과 유사하다), 사회민주당은 내부적으로 격렬하게 토론했지만 공개적으로는 이 법에 반대했다. 이 법을 지지한 것은 이른바 강단사회주의자들과 약자에 대한 국가의 가부장적 배려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이었다. 독일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그룹이 사회보험을 지지하였다는 점이 놀랍다. 즉 공공의료는 우파의 정책이었다. 좋게 말하면 비스마르크는 개별자본가의 이해관계도, 기독교의 자발적 사랑논리도 극복하고 총자본을 대변했다.

1970년대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노동운동을 탄압하기는 했지만 그의 의료보험은 비스마르크의 의도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개인의 주관적인 정치적 의도보다는 객관적인 시대정신이 중요하다. 보수정치가도 좌파정책이 없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다. 공공의료는 이와 같이 원래 우파의 정책이었다.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인물이라면 좋은 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킴으로 비판적인 진영까지도 품을 생각을 해야 한다. 몇 주째 계속되고 있는 도지사의 공공의료에 대한 도전과 파괴는 오히려 박정희와 정치를 재야만화(再野蠻化)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우리 시대의 유산이다. 무엇을 청산하고 무엇을 발전시킬 것인지 합리적으로 계산하자. 모든 정책을 좌우로 나누고 마침내 박정희 삶까지도 좌우로 나누어 찍어내고자 한다면 얻을 것이 무엇인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이재승씨는 인권연대 운영위원으로 현재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진주의료원 #홍준표 #공공의료 #박정희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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