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동네 개들에게 몸 수색을 받다니...

봄날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기도 양평 '물소리길'

등록 2013.05.04 15:44수정 2013.05.0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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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리본이 안내해주는 양평 물소리길은 정겨운 시골길, 마을 안길이다. ⓒ 김종성


창가에 스며드는 봄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게 느껴지는 휴일 아침이면, 주저 없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수도권 중앙선 전철에 애마 자전거를 싣고 남한강가를 향해 나선다. 부드러운 연두빛 봄날은 며칠 전 내린 소나기처럼 짧디 짧기에. 팔당댐, 양수리를 지나 양평역까지 강변길을 달리다 귀가 솔깃해지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

자전거로만 지나갔던 경기도 양평 지역에 '양평 물소리길'이라는 산책길이 지난 달 생겼단다. 더욱 흥미로운 건 제주 올레길을 만든 사람들이 참여하여 낸 길이라는 것. 제주도와는 물 다르고 산 다른 이곳에 어떤 길을 만들었을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소리길'은 수도권 전철 중앙선 양수역~국수역(13.8㎞)의 1코스와 국수역~양평시장(16.4㎞)의 2코스로 나눠 모두 30.2㎞로 조성됐다.


오랜만에 등산화를 신고 2코스를 걸어보기 위해 국수역에 내렸다. 2코스를 먼저 선택한 이유는 그냥 뭐든 뒤집어 생각하고 거꾸로 해보는 걸 좋아라 하는 청개구리 기질 덕택이다. 정말 이 코스의 말미에서 청개구리 이야기의 유래가 되는 재미있는 이름의 양평 '떠드렁산'을 만나기도 했다.  

고들빼기 마을, 옥천 마을, 들꽃 마을... 시골길 정겹게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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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지만 풋풋한 농로를 걸으며 봄이 온 들녘을 실컷 눈에 담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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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대문으로 살며시 보이는 단출하고 푸근한 집안 풍경. ⓒ 김종성


국수역 앞의 작은 식당에서 칼국수에 공기밥까지 배를 든든히 채웠다. 자전거 여행자에 이어 도보 여행자들까지 생겨나서인지 역 주변 식당들이 더욱 활기차 보여 좋다. '물소리길'을 간다하니 초입의 들머리도 잘 알려 주신다. 연한 초록빛으로 익어가는 들녘에 난 좁은 농로길을 걷다가 만난 이정표의 마을 이름이 재미있다.

'고들빼기 마을'

씹는 맛은 물론 쌉싸름한 풍미가 좋은 고들빼기 김치의 그 고들빼기가 많이 나는 동네인가보다. 마을 삼거리 슈퍼 주인아주머니는 씨를 받기 위해 마당에 심어 놓은 고들빼기를 보여주며 제 맛이 나는 가을에 수확을 하니 추석 쇠고 꼭 오라고 하신다.


농로 외에 경운기가 지나가기 쉽게 포장된 길도 이어지지만 시골길, 고향길의 정취를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길가의 흙이나 밭 주변에서 열심히 나물을 채취하는 아낙네들, 이름 모를 꽃들로 가득한 화원 같은 비닐하우스, 열린 대문으로 자전거며 항아리들이 살며시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 이런 정겨운 풍경에 힘든 줄 모르고 걷다가 발걸음이 흠짓 멈춰지는 것과 마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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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길 어귀에서 마주친 공포의 목줄 풀린 개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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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긍긍 머뭇거리는 내게 다가와 킁킁 냄새를 맡으며 몸 수색을 하는 동네 개들. ⓒ 김종성


다름 아닌 동네 개들. 어린 개 한 마리와 어른 개 두 마리가 동네 길 어귀에서 목줄도 없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임진강변 마을, 제주도 해변 마을에서 늑대로 변한 개들에게 쫓겼던 공포의 기억이 그대로 몸에 전달되었다.

눈을 안 마주치게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적대적으로 생각해 개가 공격성을 띤다) 고개를 돌리고 어떡할까 전전긍긍. 망연히 서있는 나를 발견한 개들이 천천히 다가오는데 짖거나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없이 걸음걸이가 친근하다.

마치 동네를 지키는 경호원마냥 어른 개 두 마리가 내 신발과 다리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휴~ 안도감이 든 나머지 난생 처음 만난 특이한 동네 개들에게 '착하네, 고맙다'며 말을 붙이기까지 했다. '수상한 점 없네, 통과해' 라고 말하듯 내 곁을 벗어나 다시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있다. 주인이 목줄을 묶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볏짚 태우는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걷던 마을길은 마을과 병풍같은 뒷산들이 훤히 보이는 야트막한 고갯길로 바뀐다. 귀여운 새소리, 우렁찬 꿩 소리만 들리는 아무도 없는 작은 오솔길과 소나무 사이 길을 휘적휘적 걸었다. 재 너머 이웃동네로 들어서는 고갯길로, 마을길은 언덕을 넘어 남한강변으로 이어지고 마을과 마을은 다시 하나로 연결된다. 번듯한 수목 사이를 지나는 숲 속 산책로 대신 딱딱한 콘크리트가 깔린 마을길이 또 이어진다.

다채로워 좋은 야트막한 고갯길, 시원한 강변길과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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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로 울창해 걷기 좋은 고갯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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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름없는 산중 무덤위에 때깔 고운 할미꽃들이 고개를 숙이고 피어났다. ⓒ 김종성


'물소리길'은 새로 만든 길이 아니라 옛날 옛적부터 주민들이 이용하던 동네 길이다. 제주 올레길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공적인 손질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길을 살렸고 잊힌 길은 복원했다. 치적이나 홍보 차원에서 길을 내는 게 아니라 비뚤비뚤 마을길, 울퉁불퉁 논 밭길을 살리고 이어 마음속 고향 길을 완성했다.  

고갯마루 양지바른 곳에서 왠 이름 없는 무덤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비석은 없지만 단정한 무덤위에 고운 보라빛깔의 할미꽃들이 무덤을 감싸 안듯이 곳곳에 고개를 숙이고 피어났다. 무덤의 주인이 생전에 이 꽃을 무척 좋아했나보다. 누가 할미꽃을 심었을까, 어떤 사연으로 이 꽃을 심었을까. 괜한 상상들이 꼬리를 문다.

고갯길에서 내려오니 걸어 오르느라 흘린 땀 식히라는 듯 남한강 강변길이 반갑게 나타난다. 강변길 또한 따로 도보용 길을 내지 않고 이미 있던 자전거길 옆의 산책로를 걷는 길이다. 하여 한동안 자전거 여행자들과 함께 길을 나아가게 되고, 자전거 길에 있는 과거 기차 터널이었던 축축하고 긴 동굴 속을 지나가게도 된다. 동굴 속에 조명시설이 잘돼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묘한 기분속에서 걷게 된다.

옛 철도길도 걷고 심충겸 선생 묘를 지나 옥천교를 건너면 옥천 초등학교와 함께 마트와 상점, 차를 타고 많은 사람들과 마주친다. 동네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점심밥을 잘 먹고 나오니 오후 3시. 국수역에서 장장 5시간을 걸어온 것도, 동네에 있는 아신역이 국수역 다음역이라는 것도 놀랍다. 강변길을 자전거로 휙 지나갔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풍성한 길들이 있었다니.

청개구리 이야기의 유래 '떠드렁산', 240년 전통의 양평 오일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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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길'에 어울리는 남한강 강변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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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팻말에 청개구리 이야기의 유래라고 써있는 '떠드렁산'은 작은 '떠드렁섬'으로 건너가면 나온다. ⓒ 김종성


벌들이 날아드는 노랑 유채꽃 만발한 들꽃마을을 지나 만나는 강변길, 유장한 남한강도 드넓은 들꽃 수목원도 좋았지만 더욱 여행자의 눈길을 끈 건 안내 팻말과 함께 나타나는 '떠드렁산'.

뭐든 반대로 하길 좋아하는 나 같은 청개구리들의 유래가 된 산이란다. 이 청개구리 이야기는 조선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괄의 난'으로 유명한 무신 이괄 (1576-1624)이 바로 청개구리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유래가 재미있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정말로 강가 모래에 무덤을 만들어 드려 비만 내리면 무덤이 쓸려 내려 갈까봐 구슬피 '개골개골' 청개구리들이 하도 울어대어 이름도 '떠드렁산'이라 지었을 것 같다. 이 작은 산은 '떠드렁섬'이라는 역시 작은 하중도(河中島)에 있어 한층 더 흥미롭다. 섬이 강변에서 가까워 연결된 길로 걸어서 건너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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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봄 나물과 풀들로 봄날의 양평 시장이 풍요롭다. ⓒ 김종성


강변길을 걸어 마침내 이 코스의 대미 '양평군립미술관'과 중앙선 전철 양평역 앞에 있는 240년 전통의 양평시장을 만나게 된다. 입장료 500원만 내면 큰 미술관의 다양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고, 매 3일과 8일 날에 찾아온다면 동네가 시끌시끌해지는 양평 오일장터를 볼 수 있다.

봄날의 전통시장은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가지고 나온 산두릅, 돌미나리, 엄나무순, 용문산 취나물 등 이름도 다양한 풀과 나물들로 풍성하기만 하다. 뜨끈한 순대국에 밥을 말아 먹으니 뭉친 다리근육이 좀 풀리는 것 같다.  

천천히 저녁밥을 먹으며 지나왔던 '물소리길'을 떠올려 본다. 딱딱한 콘크리트가 깔린 농로를 지나면 비뚤비뚤 마을길이 나온다. 길을 걷다 지루하다 싶으면 완만한 산길을 만나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면 남한강의 시원한 강바람이 마중을 나온다. 그 끝에 있는 양평 오일장터처럼 사람 냄새 나는 길이었고, 고향을 찾아 떠나는 아득한 여정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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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km 밖에 안되지만 6시간 넘게 다양한 풍경의 길을 경험하며 걸을 수 있다. ⓒ 양평군청


덧붙이는 글 5월 1일날 다녀왔습니다.
#물소리길 #양평 #떠드렁산 #양평오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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